브런치북 멧새 1 02화

호박

by 최연수

벙어리 세계가

차라리 그리워

천년 아뢰올 말씀을

머금고만 있소이다.

앉은뱅이 신세가

오히려 부러워

만리 걸을 발목을

묶고만 있소이다.

내 몸에 줄을

죽 죽 긋는다고

수박이야 될 수가

있겠습니까?


허수아비 머리에서

참새들이 춤추는 세상인데,

둥글둥글 사는 게

미련한 짓만도 아니외다




얼굴을 붉히면서 외쳐본다.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쳐본다. 두 주먹을 휘두르며 부르짖어본다. 메아리 되어 되돌아올 뿐, 산도 들도 물도 까딱없다.

내가 파수꾼인가?

내가 나팔수인가?

내가 기수(旗手)란 말인가?

생명이 있으니까 저항해보는 것이지, 거슬러 올라가는 송사리가 물결 따라 다시 내려가듯이, 아버지께서 그러했던 것처럼, 연약한 내가 어찌 조류(潮流)를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는데, 내 딴으로는 머리 좋고, 똑똑하며 재주도 많다고 여기지만, 과대망상증(誇大妄想症)에 걸려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볼 것 안 보고, 들을 것 안 듣고, 할 것 안 하고 사는 것이 오히려 지혜롭고, 정신위생(精神衛生)상 좋은 것 아닌가? 현실 도피,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의 은둔(隱遁)...역사의 발전은 도전(挑戰)과 응수(應酬)라는데, 창조․개혁은 잘 난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차라리 죽은 물고기같이 배때기를 위로 드러내고 흐르는 물결에 맡겨버리자.

못났으면 호박 같다고 한다. ‘호박에 침주기’라는 속담은, 아무런 감정도 주관도 없다는 뜻이다. 아닌게 아니라 배꼽을 드러내놓은 채, 발가벗고 누워 있는 호박처럼 둥글둥글 사는 것이, 아주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만 같다. 그러나 서너 살 발가숭이 같이 멍청하게 웃으며 사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처세(處世)요 여유 있는 삶인지도 모른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 될 수가 있나?’라고 한다. 그렇다. 생긴 대로 살아야지, 발버둥 친다 한들 별 뾰족한 수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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