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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스꾸 Sep 13. 2022

만족의 기준은 저한테서 찾아요.

인터뷰어 지연 / 포토 은영



* 성균관대학교 재학생 박지혜님과의 인터뷰입니다.


 교내 프로그램에서 지혜님을 만났을 때, 꼭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만의 색깔을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는 지혜님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완벽한 사람’의 영향이 남아있나요?

 

 남아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 꿈이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면 공감을 많이들 해줘요. 그러고 왜 지금은 아니냐고 물어요.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게 뭐가 어때서?

 제가 생각하는 ‘완벽’이라는 건 멀리서 봤을 땐 아무것도 없는데, 가까이서 보면 촘촘한 그물 같은 거예요. 완벽을 위해 제시되는 기준들은 양립 불가능하고 모호해요. 예를 들어 착하면서 성취하기를  요구하는 거요. 성취를 한다는 건 어쨌든 다른 사람이 못하는 걸 이룬다는 건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리고 모두에게 ‘착해야지, 성격이 좋아야지,’라고 해도, 성격이 좋은 것이 어떤 건지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아요. 기준이 모호해요. 그런데 기준들은 의도적으로 양립 불가능하고 모호한 것들끼리 모아놓은 거예요. 사람을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

 현대 사회도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대부분 비슷하잖아요? 돈, 명예, 많은 친구, 맛있는 음식, 멋있는 몸매 같은 것들. 그리고 이런 가치들을 추구하는 방식도 대게 획일화돼 있어요.

 다만, 현 사회가 지능적인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체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너무 악마적이잖아요. 어떤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서 이런 모습으로 편향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완벽에 대한 기준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 같고.

 제가 학원에서 강의를 할 때 식이장애가 있어서 고생을 했었어요. 원장 선생님께 진짜 용기를 내서 “저 식이장애가 있어요,”라고 말씀드렸는데, 원장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어쩐지 선생님은 너무 완벽하더라.” 그 말이 소름 돋게 다가왔어요. 그러면서 알았죠, 내가 저 말도 안 되는 단어 하나에 매여 살아왔구나. 이전에는 완벽이라는 배지를 얻을 수 있으면 내가 스스로 고민해서 찾지 않아도 내 인생에 의미가 부여되고, 나는 항상 행복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어요. 나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완벽이라는 걸 위해서 애써왔구나. 완벽은 얻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한 번 얻었다고 해서 계속 달고 다닐 수 있는 배지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결점에 대해


 제가 모쏠이거든요? 사람들은 제가 연애를 안 해봤다고 하면 “왜요, 예쁜데?”라는 반응을 해요. 보통 '왜?'는 비일상적이고 내 생각과 다를 때 하는 상황에서 하는 질문이에요.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 것이 일상적이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연애를 하지 않는 내 상황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서 하는 질문이라는 거예요. “예쁜데” 왜 안 하냐는 것도, 연애라는 건 여자의 선택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얼마나 예쁘냐에 따라 간택을 당하는 수동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쁘니까 당연히 연애를 해야지,’라 이야기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둘씩 질문하다 보니까, 내가 진짜 원한다고 느끼거나 옳다고 느꼈던 것들이 내 사고나 판단에 의해서 나온 건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학습한 건지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성욕을 만족시키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것도 생각해봤고. 제일 처음엔 돈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는 돈이 많이 없어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있었어요.

 돈 고민을 나름대로 치열하게 했는데, 제가 생각이 많은 스타일이라서 길 걷다가도 어떤 생각이 들면 벤치에 앉아서, 그 생각을 하다가 꽂혀서 잘 울어요. 저는 슬프면 우는 게 아니라 감정이 북받치면 울거든요. 누워서 구름 흘러가는 거 보면서 울 때도 있고. 거미가 집을 짓고 있으면 저게 도대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지어지는 건지 몇 시간 동안 보고 있어요. 그렇게 철없이 주변의 작은 것들에 감동하면서 사는 삶이라면, 좋은 옷 안 입고 맛있는 거 안 먹고살아도 괜찮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돈이라는 도구를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내 모습들이 있잖아요. 돈이라는 도구가 있으면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돈을 위해 내가 버려야 할 것들하고 돈이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저울질해봤더니 답이 나왔어요. 그래서 돈에 대한 고민은 이제 안 하는 거 같아요.


 또 결점에 대해서도 생각이 바뀌었는데, 특성은 문맥 위에서 가치 판단이 되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 누가 엄청 똑똑해요. 그런데 그 사람을 석기시대에 데려다 놓으면 그 좋은 머리로 뭘 할 거야. 똑똑하다는 건 지식이 많고 상황판단이 빠르다는 건데, 내 눈앞에 호랑이가 있으면 무용지물이잖아요. 또, Weakness는 나쁘다가 아니라 약하다는 거예요. 정교하고 세밀한 작업을 할 때면 손아귀 힘이 센 사람은 작품을 다 부러뜨리잖아요. 해당 문맥에서는 약하다는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는 거죠. 문맥을 제거하면 단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걸 알게 될 텐데, 자꾸만 그 문맥은 빼고 그 단점만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결점이라는 것을 나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만뒀어요.



            행복의 기준을 감정에서 찾으시나요?

 

 저는 행복하게'만' 살고 싶지 않아요. 옛날에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아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저는 감동적인 삶을 살고 싶어요.”라고 대답했어요. 행복은 안정적이고, 즐거운 상태, 감정의 좁은 스펙트럼이라고 생각하는데, 평생 같은 감정만 느끼고 경험하고 싶지는 않아요. 절망할 거면 절망만 엄청 해 보고, 화가 날 거면 너무 화가 나서 이성적으로는 하지 않았을 결정을 해보고, 결정에 대한 책임도 지고 싶어요. 삶이 제게 제공하는 모든 스펙트럼을 깊게 느껴보는 게 저에겐 중요해요. 그래서 그런 대답을 했던 것 같아요. 무언가를 깊이 느껴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상태를 감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행복은 저한테 그렇게 중요한 가치가 아니에요.



         다양한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신기해요.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우울증이 심해져서 2년 정도 휴학도 했었어요. 우울증 같은 거 안 겪어봐도 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우울증 때문에 죽을 뻔한 제가 좋아요. 저는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데, 우울증을 앓지 않은 지혜는 지금의 나랑은 분명히 다른 사람일 거잖아요. 지금의 나와 다른 나는 상상할 수가 없어서, 살면서 제가 한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그래서 다시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도 안 하고 살아요. 우울해지면 우울함을 느끼면 되지, 너무 힘들면 또 휴학하면 돼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 지금 외로운 거 같다, 슬픈 것 같다, 작은 사람 같다.’ 이렇게 느껴져서 너무 힘들 때는 속으로 100초를 세면서 그 감정을 느껴보려고 해요. 감정에 논리를 붙이거나 생각하지 말고, 느껴야 돼요, 그때는. ‘이게 어떤 느낌이지? 내 몸에 어떤 영향을 일으키지?’ 그렇게 하면 슬픔이 별 게 아니거든요. 슬픔이 무서운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돼요.

 그런 압도적인 감정 때문에 내가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을 관리하는 것은 트라우마에 관한 책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트라우마성 환자는 특정한 큐(단서)가 있으면 본인한테 트라우마를 줬던 환경을 머릿속에서 재생해요. 환자가 갇혀 있는 그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힘들어하거든요? 그런데 100초를 세보면, 5분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감정이 변해요. 강도가 변한다든가 색이 변한다든가. 초를 세면서 스스로에게 그 변화를 강제적으로 보게 하는 거죠. 스스로 한테 말해줘요, '아픔은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니야, 100초 만에도 변하잖아.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질 거야.'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을 익혔어요.



          타인과 지혜님


 전에는 사람 대하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렵지 않은 것은, 사람이 어렵지 않아서 그런 건데, 내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상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사람을 쉽게 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첫사랑을 좀 울퉁불퉁하게 겪었는데, 그 덕에 저한테 중요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편하게 대할 수 있었던 거라는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싶은 것만큼만 보고, 이 사람이 내 말에 어떤 영향을 받을지 고려하지 않으니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쉬운 거예요.

 원래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안 썼어요. 자유라는 건 그런 거잖아요, 얽매이는 게 없는 거. ‘세상에 어떤 시선이 존재하고, 그 시선은 나를 이렇게 평가할 거다.’라는 걸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울 수 있어요. 어느 순간 그 시선을 의식하게 되면 자의식이 생기고, 머릿속에 심판관이 한 명 살게 되면서 자유롭게 행동하거나 사고하기 힘들어져요. 그래도 나를 재단할 기준과, 나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나한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결정을 하면, 찝찝하긴 하지만 자유는 남아요.



 버릇처럼 행복을 찾는 누군가에게,

지혜님은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고 우울해질 수 있고, 문득 행복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 고집스럽게 행복하냐고 물을 때,
지혜님은 그저 지금은 어떠냐고 묻는다. 혹은, 뭐 어떠냐고.

의심 없이 밟고 지나치는 수많은 발자국에 단단해져만 가는 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지반을 과감히 들어 올리는 지혜님.

그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자신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아닐까.



인터뷰어 지연 / 포토그래퍼 은영

2019.02.27 만족의 기준은 저한테서 찾아요. (Edited by 인터뷰어 아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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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 of skku]
휴스꾸(Humans of skku)는 2013년부터 성균관대학교의 교수, 직원, 학생과 근처 상권까지 인터뷰 대상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장문의 인터뷰 본문, 깊이 있는 사진과 휴스꾸를 꾸려나가는 운영진의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휴스꾸의 모습을 담아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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