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우깡PD Oct 30. 2022

1인분 여행

혼자 가는 여행의 낭만, 나는 이제 거부할래!

내가 혼자 해외여행을 떠난 건 딱 2번.


# 2016년, 영국

아마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영국 여행에 대한 로망을 꿈꿨으리라 생각한다. 빨간 2층 버스에 영국 특유의 강한 엑센트를 뽐내며 말을 거는 멋진 남자들, 그리고 화려한 찻잔에 따뜻한 홍차와 디저트를 즐기는 나른한 오후의 풍경까지. 나 역시도 그랬다. 왠지 런던 거리를 걷다 보면 운명적인 만남으로 한순간에 사랑에 빠져, 그 남자와 다정히 손을 잡고 런던 브리지를 걷는 모습을 상상했다. 


사실 방송일의 특성상 남들처럼 연초에 휴가 계획을 세우고, 미리 여행지 숙소를 예약하고 준비하는 등의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당장 다음 주에 내가 어떤 특집을 맡게 될지, 그리고 매주 정해진 방송일에 맞춰 프로그램 녹화나 촬영 중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과 몇 년 전까지 친구들과 휴가 날짜를 맞춰서 여행을 가는 건 내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영국으로 떠나던 그 해도 그랬다. 프로그램 종방이 10월이었는데 광주, 전남 지자체와 연계해서 진행하는 내용이어서 정확히 프로그램이 언제 끝날지, 아이템 하나조차 제작진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휴가 날짜를 조율하는데도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아 결국 나 홀로 영국으로 떠나게 됐다. 다른 친구들은 내가 일주일간의 영국 여행 후 스페인으로 넘어가면 합류할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의기양양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프로그램 종방이 다가올수록 매일 밤 퇴근하고 나는 영국 여행 계획 짜는데 몰두했다. 자유여행이고 혼자인 만큼 여행의 모든 걸 내 생각대로만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의 과정들 속에서 나란 사람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렸다. 나는 생각보다 혼자 결정해야 하는 상황들에 훨씬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물론 일할 때는 빼고. PD는 매일매일이 결정하는 게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는 촬영을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이동 동선은 어떻게 구성할지, 출연자는 누구로 할지 등등. 작가와 충분히 협의를 하긴 하지만 결국 최종 선택과 결정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PD의 몫이었다.  일상 속에서 너무나 시달렸던 탓일까. 여행 계획을 짜는 데 있어 나는 지극히 생각 많고 고민만 하는 소심쟁이가 되어있었다. 무튼 우여곡절 끝에 괜찮아 보이는 한인민박을 숙소로 정하고 혼자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10월 중순에 도착한 영국은 생각보다 많이 흐리고 추웠다. 원래 추위에 취약한 나인데 하루 종일 흐린 하늘과 꾸물꾸물 내리는 비는 여행의 힘듦을 가중시켰다. 히드로 공항에 내려서 민박집으로 찾아가는 여정부터 쉽지가 않았다. 도착시간이 늦은 밤이었고, 혼자 찾아가긴 힘든 위치여서 민박집 사장님의 픽업이 필요했다. 약속된 픽업 장소는 인도인이 운영하는 한 편의점이었는데 음침하고 어두운 골목길의 분위기가 나를 한층 더 움츠려 들게 했다. 그리고 민박집의 분위기 역시 상상한 것보다 편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다. 잠깐의 움직임에도 삐그덕 소리를 내는 2층 침대와 냉기로 가득 찬 도미토리 방에서 나는 불면에 시달렸다. 매일 같이 시차 때문에 새벽에 깨서 두세 시간을 말똥말똥 눈만 뜬 채로 누워있는 건 정말 지옥이었다. 


더 문제는 숙소를 빠져나와 아침 일찍부터 런던 거리를 돌아다녀도 결코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바람은 매섭고, 많은 인파 속에 혼자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외로움이 사무쳤다. 맛집을 찾아가 음식을 시켜도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내가 여길 혼자 왜 왔을까 하는 후회와 미련만이 가득했다. 나는 생각보다 혼자서 하는 여행이 맞지 않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후 감기몸살이 걸려 크게 아팠다. 영국에서 유명하다는 감기약을 통째로 들이켜 부어도 몸 상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오한에 몸은 떨리고 방은 춥고 2층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있자니 하염없이 눈물만 났다. 그렇게 꼬박 2박 3일을 아프고서야 나는 일어날 수 있었다. 예정된 스페인 비행기도 타지 못하고, 하루 늦게 영국을 떠났다.


스페인에 도착해서 한국에서 온 친구들과 만나던 순간, 나는 또 울고 말았다. 그냥 눈물이 계속 났다. 그리고 친구들을 보니 갑자기 기운이 솟고 식욕이 맴돌았다. 그날 새벽 1시에 바르셀로나 거리에 나가 먹었던 샹그리아와 빠에야의 맛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후 일주일 간 친구들과 아주 행복한 스페인 여행을 했다. 물론 그때도 고생을 하긴 했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비를 맞아도, 길을 잃어도 두려울 게 하나 없었다. 귀국 비행기를 타기 4시간 전까지 와인을 마시다가 숙소 문 앞에 토를 하고 공항으로 향했지만 그것조차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2주간의 유럽 여행은 끝이 났고, 나는 앞으로 절대 혼자 해외여행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또 혼자 해외여행을 결심했다. 



# 2018년 괌

2017년 하반기 신종플루가 대한민국을 덮쳤다. 회사에서도 신종플루에 걸린 사람들이 급증했고, 일주일간 격리 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업무에도 많은 차질이 생겼었다. 원래 잔병치레로 골골대던 나인데 잘 버티는 가 싶더니 결국 신종플루에 감염돼 입원까지 하게 됐다. 당시 병원 입원병동도 부족해서 아는 사람을 통해 겨우 아동병원의 1인 병실을 구했고, 일주일간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 대학 동기랑 미국 서부 일주를 하자며 비행기 티켓 예매를 하고 여행 계획을 짜던 중이었다. 퇴원을 하고 비행기를 탈 수는 있었지만 내 몸이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미 바닥난 체력과 약해진 면역력 탓에 시차도 다른 곳에서 또 아플 것만 같았다. 결국 내가 전체 취소 수수료를 지불하고 친구에게 양해를 구해 여행을 포기했다. 


한 달 후 우리나라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올림픽과 월드컵을 참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방송국 직원들이 유일하게 자유로운 휴가(?)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방송 편성의 대부분이 경기 생중계로 채워지기 때문에 우리가 기존에 만들던 프로그램들은 휴방을 하게 된다. 얼마나 달콤한 휴식의 시간인가. 그래서 큰 국제적 경기가 있을 때만큼은 선배 PD나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휴가를 낼 수가 있다.


신종플루도 완전히 낫고, 동계올림픽 때문에 시간적 여유도 생기다 보니 여행에 대한 욕망이 또 꿈틀대기 시작했다. 미국 서부를 못 갔으니 아쉬운 대로 미국 땅은 밟아보고 싶고, 따뜻한 날씨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결정한 게 바로 괌! 나는 망설임 없이 비행기 티켓을 사고 숙소를 예약했다. 주위에서는 다들 말렸다. 남들은 신혼여행으로 가거나 가족여행으로 가는 휴양지를 왜 굳이, 혼자 가냐고! 그때 나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해변의 선베드에 누워 느긋하게 바다를 바라보며 쉬고 싶다는 생각뿐. 나 때문에 미국 서부 여행을 취소했던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캐리어에 가득 담고 괌으로 떠났다.


괌의 바다는 생각보다 정말 좋았다. 에메랄드 빛에 티 없이 맑고, 해변의 모래는 극세사 담요를 만지는 느낌처럼 한없이 부드러웠다. 내 몸에 남아있던 나쁜 바이러스와 세균들이 모조리 자외선에 소독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극한의 외로움과 심심함이 찾아왔다. 괌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새우 요리점과 햄버거 맛집을 갔는데 맛에 대한 표현과 소감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슬퍼지기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해변에서 열심히 패들보드를 탔는데, 망망대해에 두둥실 떠 있는 내 모습이 신이 나다가도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의 끝처럼 내 여행의 끝을 상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것! 괌의 여행객 대부분은 가족 아님 커플. 여행 내내 내가 나눈 대화는 호텔과 식당 직원들, 비치 안전요원 정도... 하루 종일 세 마디를 한 게 전부일 때도 있었다. 그래도 씩씩하게 돌핀 투어까지 신청해 혼자서 바다낚시도 해보고, 돌고래도 만나 기념사진도 찍었다. 투어 담당자가 혼자 왔다는 말에 토끼눈이 되어 놀란 것 빼고는.. 다 괜찮았다. 


괌 여행의 마지막 날, 밤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쇼핑도 할 만큼 했고, 수영도 원 없이 했다. 밤 10시까지 일정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마사지를 예약했다. 그것도 3시간짜리 풀코스로. 얼굴과 바디 마사지에 전신 스크럽까지 받았다. 한국에서는 결코 누리기 힘든 사치였지만, 그날만큼은 내게 꼭 필요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고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만약 누군가 내게 혼자 괌 여행을 다녀온 거에 대해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고 대답할 거다. 하지만 혼자 괌 여행을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할 거다. 괌은 꼭 누군가와 함께 가시라. 그래야만 한다.


홀로 떠난 두 번의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다행히 지금까지는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없다. 하지만 조만간 혼자 여행을 떠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고민이 된다. 나 혼자서도 여행 잘할 수 있을까? 아직도 나는 나 자신을 정말 모르겠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형태의 여행을 좋아하는지, 내가 견딜 수 있는 외로움의 끝은 어디인지. 답을 알고 싶다면 결국은 혼자 또 떠나야겠지만, 부디 나의 쓸데없는 호기심이 나를 홀로 비행기에 데려다주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전 09화 직장 내 괴롭힘의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