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유년
벌써 해가 뉘엿뉘엿하다. 아쉽다. 오늘은 친구들이 늦게 모인 탓에 반나절도 같이 놀지 못했는데. 그렇지만 우리는 내일도 모레도 또 모여서 같이 놀 테니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주황빛 지는 해를 맞으며 우리 아파트 단지로 돌아간다.
“내일은 어디에서 놀까?”
“어~ 내일은 쩌쪽 그린아파트 놀이터!”
“그래! 그럼 어린이집 갔다가 앞에 놀이터로 모여라!”
“응!”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일은 또 어디에서 놀지 일찌감치 모의하는 우리다.
동네 친구들이 있다. 몇 살 때부터 같이 어울리기 시작했는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친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항상 비슷한 친구들 대, 여섯 명과 함께 어울려 놀고 있었고 노는 장소도 꼭 놀이터였다.
501동 미영이는 나와 같은 유치원 같은 반에 다니는 친구고 504동의 영지는 내 동생 희수의 친구다. 506동의 유희 언니는 초등학생인데 엄마들끼리 서로 아는 사이라서 친해졌다. 소정이는 우리 동 1층에 사는 친구고, 슬아는 내 동생 희민이와 동갑 친구다. 이 친구들 말고도 가끔씩 같이 어울려 노는 또 다른 동네 친구들도 있다.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친구들로 매일매일 놀이터에 모여 놀곤 한다. 모이는 방식은 따로 없다. 한 번씩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친구들끼리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고 만날 때도 있지만 그건 정말 가끔이고, 대부분은 그냥 만난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얼른 가방만 벗고 놀이터로 나가 보면 항상 친구들이 거기에 있다. 설령 아무도 없을지라도 괜찮다. 그네를 타면서 조금만 기다려 보면, 나처럼 어린이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친구들이 하나, 둘 놀이터로 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엔 우리 단지에 있는 놀이터에서만 같이 놀았다. 작은 단지여도 놀이터가 3개나 되기 때문에 번갈아 가면서 노는 재미가 있었다. 단지 내 놀이터는 위치에 따라 앞에 놀이터, 뒤에 놀이터, 옆에 놀이터라고 불렸는데, 놀이터마다 놀이기구의 종류와 특색이 조금씩 달라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단지 놀이터에서 노는 일이 익숙해짐에 따라 차츰 단지 내 놀이터가 시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다른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로 우리의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5단지 아이들로 구성된 놀이터 원정대가 결성된 것이다.
우선은 다 같이 우리 단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옆 단지 놀이터부터 방문해 보았다. 바로 옆에 있는 단지라서 우리 아파트 너머로 늘 보아왔던 곳이라 큰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길을 건너고, 나지막한 계단을 몇 개 올라갔다가 내려갔더니 옆 단지 놀이터였다. 처음으로 방문한 옆 단지 놀이터에는 우리 단지 놀이터에는 없는 뺑뺑이, 구름사다리가 있어서 새로운 놀이기구를 조우한 마음이 기대감과 설렘으로 잔뜩 부풀어 올랐다. 그날, 반나절 사이에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 일부러 길을 따라 찾아온 보람을 느꼈다.
그 이후로는 옆 단지보다는 멀지만 거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4단지 놀이터, 우리 단지 뒤편으로 작은 언덕을 하나 넘어야지만 갈 수 있는 그린아파트 놀이터 등을 찾아다니며 놀고 있다. 오직 ‘놀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건너고, 동네를 빙 돌고, 언덕을 하나 넘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도착한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원 없이 재미있게 놀고 나면, 지는 해를 쬐면서 다음에는 또 어떤 놀이터에 가볼지 미리 의논하며 다 함께 우리 동네로 돌아온다. 매일매일,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은 어린이의 즐거운 하루하루다.
가끔 우리가 길을 건너고 언덕을 넘어 다른 단지 놀이터에 도착하면 때마침 그 단지에 사는 친구들이 놀이터를 선점하여 놀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군말 없이 뒤 돌아 나와 다른 곳으로 향한다. 이건 우리 어린이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인데, 그 단지의 놀이터는 기본적으로 그 단지 친구들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 친구들에게 먼저 자기 단지의 놀이터를 누릴 권리가 있다. 우리는 걔들이 놀지 않을 때, 놀이터가 비워져 있을 때만 거기서 놀 수 있다. 어린이들도 상도덕이라는 걸 안다.
그럼 그런 식으로 규칙이며 상도덕 따위를 따져가면서 이 단지, 저 단지를 돌아다니며 대체 뭘 하고 노느냐고? 우선은 놀이터에 도착하면 놀이터마다 다르게 있는 놀이기구를 좀 즐긴 다음에 그다음으로는 늘 소꿉놀이를 한다. 소꿉놀이를 한다고 하면 어른들은 우리가 ‘겨우’ 놀이터 바닥의 모래나 만지작거리면서 엄마와 아빠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던데, 우리는 그것보다는 훨씬 고차원적으로 논다!
먼저 환경설정부터 한다. 미끄럼틀이 달린 가장 큰 놀이기구를 구획 별로 거실, 주방, 아기방 등으로 설정해 놓고 그다음에 친구들과 단지마다 어딘가에는 꼭 하나씩 있는 헌 옷수거함을 찾아내어 거기서 이불이며 옷 등을 몇 개 들고 온다. 그리고 그걸 활용해 우리가 미리 설정해 놓은 대로 놀이기구를 집처럼 꾸민다. 그렇게 꾸며진 집 같은 놀이기구 위에서 그날 각자가 맡은 역할에 따라 소꿉놀이를 하는 거다.
우리들의 소꿉놀이에는 어떤 때는 엄마와 아빠 역할이 있지만 어떤 때는 없다. 집마다 엄마랑 아빠가 꼭 있어야 한다고 누가 그래? 우리 친구 소정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사는데 말이다.
헌 옷수거함에서 옷이며 이불을 들고 나를 때는 경비아저씨께 소리를 듣는 일이 일상다반사다. 우리의 그런 행위를, 나중에 정리만 잘해놓으면 된다며 너그럽게 눈감아주시는 경비아저씨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은 경비아저씨가 훨씬 더 많아서 놀이기구를 집처럼 꾸미는 과정은 소리소문 없이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그 과정조차도 우리에겐 재미다. 다른 단지 아이들인 우리가 그 단지 주민들의 헌 옷수거함을 건드리다니! 좀 다르긴 하지만 TV에 나오는 괴도라도 된 마냥, 들떠 오르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일을 완수하기 위해 온 감각을 기울인다. 소꿉놀이를 마치고 나서 우리가 놀이에 가져다 쓴 물건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실컷 어지럽혀 놓은 놀이터를 정리하고 집에 갈 채비를 할 즈음에 집에서도 엄마나 할머니가 저녁밥을 요리하신다고 분주하다. 친구들과 우리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작별 인사를 하고 각자 사는 동으로 헤어지면 나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층 우리 집으로 올라간다. 현관문 앞에 도착하면 엄마가 살짝 열어 놓은 문틈으로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흘러나올 때가 많다. 어떤 날은 김치찌개 냄새가, 어떤 날은 생선 굽는 냄새가 흘러나오기도 하지만 된장찌개 냄새가 제일 자주 난다.
집 안에 들어서면 엄마가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찌개를 끓이고 계시는데, 가끔씩 찌개에 넣을 두부를 깜박하고 사 오지 않았다며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신다. 그럼 나는 돈을 받아 들고 우리 단지 앞 상가에 있는 슈퍼에 다녀오거나 종종 우리 아파트에 방문하는 다양한 부식품을 파는 트럭에 가서 두부를 사 오거나 한다. 나는 그 트럭에서 파는 두부를 좋아하는데, 맛도 맛이지만 커다란 두부 한모가 천 원을 넘지 않아서 그렇다.
평소에는 이렇게 엄마의 두부 심부름을 다녀올 수 있지만 수요일과 목요일만큼은 절대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요일과 목요일 6시에는 TV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드캡터 체리』를 해주기 때문이다. 『카드캡터 체리』는 우리 어린이집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아주 많아서 꼭 봐야 한다. 그런 날에 하필 두부가 떨어진다면? 그날은 두부 없는 된장찌개를 먹는 날이다!
『카드캡터 체리』를 보고, 두부 없는 된장찌개를 먹고, 몸을 씻고,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를 맞이한 다음 밤 9시가 되면 잔다. 내 키가 이렇게 큰 건 다 지금까지 늘 9시에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아침에 일어나서 어린이집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또 동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 것이다.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리 이야기한 대로 내일은 그린아파트 놀이터에서 놀아야지. 아! 그린아파트까지 가는 김에 조금 더 걸어서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수호아파트 놀이터까지 가보자고 해볼까? 거기까지 가면 우리 아파트 근처 놀이터는 다 가보는 건데! 생각하니 꽤 욕심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