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유년
자칭&타칭 베스트 드라이버였던 우리 아빠! 엄마가 운전면허를 따기 전까지 아빠는 우리 집 공인 운전기사로서 차 뒷좌석에 우리 삼 남매를 나란히 태우고는 가깝게는 차로 15분 거리의 까르푸로, 멀게는 5시간 거리의 엄마의 친정으로 운전하곤 했다.
아빠는 거의 모든 차량을 자유자재로 운전할 수 있었는데, 우리 집 패밀리카의 역사인 스펙트라와 티코, 카니발과 K5를, 차를 구매해 처음으로 운전하는 그 순간부터 아무 거리낌도 없이 잘 운전했다. 그런 일쯤이야 남들도 다 하는 수준이라고 반박당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어른이 되어서 운전을 해보니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크기도 모양도 사양도 모두가 다 다른 ‘아무 차’를 처음부터 잘 운전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더라.
그런데 우리 아빠는 그런 ‘아무 차’를 처음부터 잘 몰았고 심지어 나중에는 한동안이었지만, 큰 대형트럭을 운전하기도 했다. 그러니 나로서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아빠의 운전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아빠의 운전 실력만큼은 인정한다. 우리 아빠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에 있어선 정말로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어디까지나 자동차 엔진음이 들리는 영역에서만 일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던 모습이었지, 다른 영역에서의 우리 아빠는 썩 베스트하지 않았다.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요약하는 단어를 고르라면 편파, 편향, 독단, 독선 따위를 골라야겠다. 아빠는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편견을 가득 가진 사람이었다. 고지식했고, 도저히 양보라는 것을 몰랐으며 어떨 때는 지나치게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는데, 아무도 자기를 무시하지 않았음에도 자기 혼자 무시당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지금에서야 아빠의 그런 모습이 높은 자존심과 낮은 자존감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았을까 추측이라도 할 수 있지, 그때는 그게 마냥 이상하게만 보였다.
아빠가 인생을 살아간 방식을 차를 몰고 장거리를 운전해서 가는 것과 비교해서 이야기해 보면 도무지 서행운전이나 양보운전, 방어운전이라는 것을 할 줄 몰랐다. 아빠는 항상 뭔가 급했고 늘 막무가내였으며 자주 주변에 피해를 끼쳤다. 당시 엄마가 썼던 표현을 빌리자면 ‘무대뽀’ 그 자체였다. 곁에서 함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로서는 그러한 행보에 발맞추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빠와 함께한 우리 가족의 일상은 늘 조마조마했다.
어렸을 때만큼은 앞과 뒤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빠의 모습을 조금은 좋아했다. 아빠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양 과거 시절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곤 했는데, 어린 내가 듣기에는 그게 꽤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선도부였던 시절 겁도 없이 선도부인 자신의 동생(우리 고모)을 괴롭히던 녀석을 혼내줬던 일, 동네 아이들과 1대 몇으로 싸움이 붙었다가 졌는데 이후에 혼자 짱돌을 하나 들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대갚음해 줬던 일 등등……. 과거로부터 줄곧 이어져 온, 호탕함을 넘어서 호전적이기까지 한 아빠의 성격과 태도에 어린 나는 도리어 안전하게 보호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빠의 존재감 아래서, 특정할 수 없는 내·외부의 어느 적들로부터.
아빠는 본인의 경험에서 얻은 삶에 대한 나름의 팁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내일 일이 있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제시간에 눈이 떠질지 걱정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 내 말에 아빠는 “일찍 일어나려면 자려고 누웠을 때 머릿속으로 내일 일어나야만 하는 시간을 3번 되뇌어. 6시에 일어나야 하면 ‘6시, 6시, 6시!’ 이렇게. 그러면 다음 날 그 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져.”라고 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아빠가 이야기한 그대로 해보았다. 그랬더니 다음날 진짜로 내가 자기 전 열심히 되뇌었던 그 시간에 눈이 떠지는 것이었다(애석하게도 직장인이 된 이후로는 이 방법이 듣질 않는다). 그 일을 겪기 전까지는 아빠가 알고 있다고 으스대는 것들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는데, 그 일 이후로는 아빠 안에 있는, 아빠만의 삶의 지혜란 것들을 조금은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고질적인 성격과 나쁜 습관으로 인해 살면서 잦은 위기를 자초하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극복해 나갔다(온전히 스스로의 역량과 자원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닐지라도). 살아가기 위해 자기 인생 안에서 나름대로의 방식을 만들어오고 익혀온 우리 아빠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모습을 조금은 좋아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야말로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만 하는 다 큰 어른이라면 보여야 할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하면서, 나는 아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빠를 좋아하던 마음은 점차로 가셔갔다. 아빠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자주 했고 행동의 수위는 갈수록 나빠졌다. 우리 가족의 안전과 생계는 자주 위협을 받았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여러 개의 상처가 새겨졌다. 어렸을 때는 내게 안전함을 느끼게 해 줬던 아빠의 모습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특정할 수 없는 어느 적들로부터 두려움을 느낄 일이 아니었다. 적은 우리 집 안에 있었고 그게 바로 우리 아빠였다. 어느 시점부터 내 모든 두려움, 분노, 염려, 근심은 아빠로부터, 아빠에 의해서 생겨났다. 어린 나는 그 모든 감정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무엇으로 승화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원체 부정적인 감정들이다 보니 내 안에 담고 있는 일 그 자체가 버겁고 힘들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감정들이 나 자신과 남을 향하지 않도록, 꾸준히 아빠만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아빠 때문에 그 모든 감정을 가지게 되었으니 아빠가 지탄받아야 마땅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참 잘되지 않더라. 어찌 되었든 우리 아빠라서 인지, 마냥 원망만 하고 싶은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잘되지 않았다.
나는 아빠라는 사람을 내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정말로 알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그렇게 아빠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아빠와의 세월을 보내다가, 내가 다른 지역에 있는 회사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집과 가족을 떠나 혼자 생활하게 된 것이다. 아빠와 나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벌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되고 나서야 나는 아빠를 전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은 이제 같이 살지 않아도 되니까 아빠에 대한 감정을 무시하고 외면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스스로 돈을 벌고 생활을 책임지게 되면서 노동이라는 것에 대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실감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빠라는 사람에 대한 고민은 내 노동의 고됨에서 시작되었다. 여태 보이지 않았던 아빠의 고된 노동과 책임감이, 가정을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마음속엔 여전히 아빠가 잘못된 모습으로 나와 우리 가족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 아빠를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정하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다만 어쩌면 내가 아빠의 일부만 보고 전부를 곡해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저 이해의 첫 단추 정도만 꿰어보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겨우 마음을 먹었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다.
남겨진 것은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격동이었다.
나는 졸지에 아빠에 대한 비밀들을 혼자서 해독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빠의 도움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