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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아의 서랍 Feb 16. 2023

#5 베스트 드라이버, 아빠 (2)

가장 보통의 유년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소식은 어느 평범했던 날, 평소와 다름없이 직장에 출근하여 한참 일을 하고 있던 나에게 분별없이 날아들었다. 회사 화장실에서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통해 아빠의 사망 소식을 들었고, 이야기를 듣자마자 입에서는 저절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안돼!”     


 아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직후의 느낌은 뭐라고 형언할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이 멍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눈앞이 흐릿한 게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눌러앉아 있던 큰 덩어리가, 아빠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그 마음이 아빠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소식에 미친 듯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할 거냐고, 나를 대체 어떻게 풀어갈 거냐고……         


 멍하면서도 복잡해진 마음을 가지고 눈물범벅이 된 채로 화장실에서 나와 동료들에게 이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바로 차를 타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경찰서로 말이다.     






 경찰서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내내 울면서도 핸드폰으로 이제 막 공군기본군사훈련단에 입소해 훈련과정을 밟고 있는 막내 희민이에게 어떻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다급하게 알아보았다.


 당시는 희민이가 훈련단에 입소한 지 2주나 3주쯤 되었을 시점인데, 그때까지 겨우 한 통의 ‘효 전화’를 받아본 게 다였고, 그 밖에 동생에 관한 소식은 다음 공군 카페에 간간이 올라오는 종교활동 사진을 통해서나 알 수 있던 상황이었다. 지금처럼 훈련소 내에서 교육생의 핸드폰 사용을 시범 운영하는 시기도 아니었다.


 이 같은 상황에 어쩌면 동생에게 아빠의 사망 소식을 제때 전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피어났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정보를 얻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어떻게든 쳐다보며 훈련단 홈페이지와 공군 카페에 올라와 있는 관련 글을 샅샅이 뒤졌다. 마땅한 정보를 찾지 못해 카페 ‘가족 게시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문의하는 글을 썼고, 마침내 어떤 가족분께서 내가 쓴 글에 즉각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답변을 남겨주셔서 이를 통해 희민이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경찰서에 도착해서는 바로 엄마를 찾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 엄마는 ‘사건’에 대한 진술을 거의 다 마친 상태였다. 엄마의 진술이 완전히 끝날 때쯤에는 동생 희수도 도착했고 우리는 곧 다 함께 경찰서에서 나와 아빠가 계신 근처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앞에서는 큰아빠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큰아빠는 퉁퉁 부은 얼굴로 우리를 말없이 끌어안아주시고는 이내 아빠를 보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떨리는 마음으로 큰아빠를 따라 병원 지하로 향했다.      

 

 아빠는 영안실 침대 위에 단정하게 누워있었다. 누워있는 아빠의 몸을 만졌다. 분명 내가 아이였을 때부터 곧잘 만져오던 아빠의 얼굴과 피부였는데, 너무나 다른 느낌이 났다. 그냥 아무 느낌도 안 났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몸을 어루만지는 내 손끝으로 아무런 느낌도 전달되지 않았다. 손에 느껴지는 그 생소한 감각과 꼭 닫혀서는 앞으로 절대 열릴 일이 없어 보이던 눈꺼풀, 그리고 다소 고통스러워 보이던 반쯤 벌려진 입매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아빠의 죽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다 함께 말 그대로 기절할 듯이, 정말 기절할 듯이 울었다.     


 저녁 즈음에 공군훈련단으로부터 일시적인 외박 허가를 받은 막내 희민이가 우리가 아빠의 장례를 치르려고 준비 중이던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훈련소에서 막 나온 터라 군복 차림이었던 그 애가 막내인 주제에 말없이 누나들을 품에 꼭 안아주는데, 그 품이 어찌나 단단하던지……. 아직 취업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나와 바로 얼마 전에 공군 입대한 희민이, 대학교 졸업을 1년 앞둔 희수. 이제부터는 우리 셋이서 엄마랑 같이 살아나가야 해. 장례식장 건물 앞에 선 채로 동생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매 순간마다(심지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도) 눈물이 수시로 터져 나왔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제대로 끝마쳤다. 처음 맞는 가족의 장례였던지라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 없이 그저 최소한의 구색만 갖추며 진행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후에는 한시름 덜 여유도 없이 곧바로 아빠의 부재로 인한 엄청난 뒷감당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빠 생전에도 아빠 앞으로 빚이 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도 학생이었고 아빠와 엄마가 어떻게든 수습을 하고 계시는 모양새였던 터라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빚이라는 건 내가 일시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하여 영영 그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빠의 사망으로 인해 우리는 아빠의 상속인이라는 신분이 되었고 갑자기 잘 알지도 못하던 빚을 상속받을 상황에 처했다. 빚 말고 다른 재산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었다. 그나마 있던 것들도 모두 빚 때문에 저당 잡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상속에 관한 온갖 정보를 검색해 보고 동시에 알만한 사람들에게 어찌어찌 물어가면서 우리가 상속받을 예정인 빚을 어떻게 해결하면 될지에 대해 온 궁리를 다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린 ‘상속한정승인’이라는 것을 청구하기로 했다. 사회초년생인 내가 법에 대해 알 턱이 있나,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거나 지인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변호사 사무소와 법무사 사무소를 각각 찾아가 상담을 받았고, 각 상담에서 주고받은 내용을 종합하여 우리 같은 경우엔 상속한정승인 심판을 청구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법무사 사무소와 함께 바로 그 상속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상속한정승인을 청구하기 위한 과정은 첫걸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우리 아빠 또한 나처럼 법에 대해 알 턱이 없어서였던지, 아빠는 누구한테 들킬세라 본인의 부채에 관한 사항을 단 한 점도 남겨놓지 않았다. 심지어 아빠 명의로 된 통장 하나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덕분에 눈앞이 깜깜했다. 나와 우리 가족의 어깨 위로 아빠의 빚이라는 큰 짐이 얹혀있는 것을 아는데, 막상 그 실체를 확인할 수는 없다니!


 절망했지만 절망할 틈이 없었다. 상속 절차의 기한이 1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또다시 미친 듯이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검색했고 다행스럽게도 ‘사망자 금융거래조회’라는 것을 알게 되어 바로 신청을 했다. 신청일 기준으로 15일가량이 지난 후, 아빠 명의로 된 예금과 대출, 보증 등에 관한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조회 결과가 표시된 모니터 화면 속 ‘대출’이라는 소제목 아래로 빼곡하게 적혀 있던 대부업체들의 상호를 보며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아빠의 부채목록을 확인한 이후에는 쉬는 날마다 아빠와 거래한 대부업체들에 유선으로 연락하거나 직접 찾아가며 심판 청구에 필요한 자료와 문서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자료를 우리 담당 법무사에게 전달하였고 이후로도 법무사 사무실에서 청구에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것들이 있으면 하나하나 차례로 해결해 건넸다. 몇 개월동안 고생한 끝에 모든 요건이 갖추어져서 드디어 상속한정승인 심판을 청구할 수 있었고 이후에 이를 승인하는 판결문도 받게 되었다.      

 

 판결문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끝은 아니었다. 채권시효가 완전히 만료되려면 긴 기간이 필요해서, 상속과 관련된 문제는 지금까지도 때때로 우리를 찾아온다. ‘오로지’ 상속한정승인 판결과 관련된 것만 마무리하는데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1년 동안 우리가 거쳐온 모든 과정은 하나하나가 다 생소한 것이었다. 뭐가 뭔지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우리 가족이 무사하려면 그걸 어떻게든 공부하고 알아내서 해결해내야만 했다. 종래에는 해결했지만 그 해결이란 걸 하려고 버둥거린 1년간 내가 거의 지옥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막 사회로 나온 내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일들이었다.      

  





 온통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빛에 의지해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1년 동안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아빠의 죽음 이전부터 이후까지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취하고 있던 모호한 입장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부터도 나는 아빠라는 사람을 내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이 내내 어지러웠다. 그런 상태로 가족과 고향 집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직장 생활이 거듭되면서 아빠에 대해 기존보다는 누그러진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아빠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앞으로는 아빠와 전보다 더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아빠라는  사람에 대해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 그런 생각을 했을 즈음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이다.      


 아빠에 대해, 아빠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감정에 대해 이제 막 술잔이라도 기울이며 그래서 그때 도대체 왜 그랬던 건지, 털어놓게 해 볼 참이었는데 그 기회를 박탈당했다. 아빠 본인에게 진상에 대해 물어볼 수가 없게 됐다. 엄청난 박탈감과 답답함을 느꼈고 안 그래도 힘든 상황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이리저리 방황하다 결국 아빠에 대한 모든 생각과 감정을 회피하고 차단해 버리기로 결정했다.     


 언젠가는 해야 하지만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은 과제처럼 아빠에 대한 내 입장정리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세월은 마냥 흘러만 갔다. 흐르는 세월 동안 아빠가 나오는 꿈을 3번 정도 꿨는데 꿈에서 나마 나는 아빠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질문할 수 있었다. 흐르는 눈물과 함께 깨곤 했으나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살아갈 적엔 굳이 아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회피하며 모호한 입장을 유지한 채 살아갈 것만 같았는데, 어느 날 문득 아무 계기 없이 아빠를 모신 추모공원에 나 혼자 가보고 싶어졌다. 그전까지는 늘 가족이나 남자친구와 함께 방문했고 혼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문득 혼자 가보고 싶어 져서 그렇게 했다.      






 유리창 안으로 잘 모셔진 아빠의 유골함 앞으로 나지막한 간이 의자를 마주 두고 앉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빠의 유골함과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아빠에 대한 원망을 거두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줄곧 바라고 원하던 것이 아빠를 용서하는 일이었음을 비로소 인정했다.


 아빠는 분명히 나빴고 잘못된 행동을 했다. 언제나 그런 아빠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내가 아빠와의 그 무수한 과정 속에서 엇나가지 않고 무사히 한 사람 몫을 하는 어른이 된 것에 대해 고마워해야 한다. 내가 무사히 성인이 돼 혼자서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기에 어른으로 살아가는 것과 직장 생활을 해나가는 것, 아이를 키우는 일의 고단함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아이를 보육하는 직업에 종사 중이다.)      


 아빠는 또 고마워해야 한다. 아빠가 돌아가신 직후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그리고 그 모든 상속 과정을 얼추 마무리하고 나서야 내가 드디어 아빠의 상황에 대해 정상 참작을 해줄 만큼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게 된 것을. 그런 마음의 여유는 우리 가족과 지금은 내 남편이 된 남자친구, 내 친구들 덕분에 마련할 수 있었고 이들이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음에 아빠는 또 한 번 고마워해야 한다.     


 고지식하고, 도저히 양보라는 것을 모르고, 남녀에 대한 편견은 물론이요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편견을 가득 가지고 있던 아빠를 미워했다.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해 그 화살을 우리 가족에게까지 돌리던 아빠의 모습에 화가 났다. 술과 담배를 지나치게 즐기고 과음하면 늘 사고를 치던 아빠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내 기억상의 아빠는 최소한 자신의 그런 모습을 스스로 잘 인식하고 있었다. 어쩌면 고쳐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된 걸 수도 있다. 이제는 물어볼 아빠가 없어서 진실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그냥 그랬겠지 하고 생각하려고 한다. 아빠도 아빠의 허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바꿔보려고도 했지만 현실의 고단함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잘되지 않았던 거라고 말이다.

 진짜…… 내가 많이 봐준 거다.     


 이런 믿음을 가지기로 한 덕분에 나는 아빠보다는 나은 사람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빠 같은 사람은 절대 되고 싶지 않았던 내가 아빠와는 다른 사람이 되는 방법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겠다. 내가 만약 아빠가 내게 끼친 나쁜 영향에 더 집중하여 아빠라는 사람을 마냥 나쁘고 싫었던 사람으로만 기억하기로 결심한다면 나는 꼭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빠를 용서하기로 했다. 허물투성이의 우리 아빠를 용서하고 그 고생을 인정하기로 했다.

“아빠의 모든 허물을 용서합니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아빠의 유골함과 마주 보며 그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5년 만의 용서와 화해였고 그간 고생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5년 만에 아빠의 죽음을 완전히 인정했다. 내가 드디어 아빠에 대한 입장정리를 해낸 것이다. 추모공원을 나오면서 앞으로는 가닿지 않는 투정은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의 원망과 토로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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