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유년
“슬아야~ 노올자~!”
내 동생 희민이는 틈만 나면 집을 나가 옆집 현관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외쳤다. 몇 번을 두드리며 외치다가 집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들려오지 않으면, 몸을 한껏 숙여 현관문 하단의 동그란 우유 투입구 문에 입을 대고 다시 한번 더 “슬아아~ 노올자~!”를 반복했다. 지금 시대라면 아무리 어린아이가 하는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불법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행위를, 당시 우리 이웃집의 어른들은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다.
복도식 아파트인 우리 아파트에는 층마다 8개의 집이 있었다. 각각의 집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다 알지는 못했으나 오다가다 우리와 같은 층에 거주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대충이라도 아는 척을 했다. 우리 층 사람들 모두와 친하게 지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 집 왼쪽의 501호 가족과 오른쪽의 503호 가족과는 나중에 양쪽 집이 차례로 이사를 나가기 전까진 늘 사이좋게 지냈다.
501호에 사는 가족은 내 동생 희민이와 같은 나이인 슬아의 가족이었다. 이모(엄마는 이웃에 사는 웬만한 여자 어른을 다 이모라고 부르도록 했다), 이모부, 슬아, 슬아의 동생이 가족 구성원이었고 내 동생 희민이와 슬아의 나이가 같아 가족끼리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나, 내 동생 희수와 희민, 옆집 슬아는 나이도 비슷하고 사는 아파트도 같아서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며 등교도 함께 하곤 했다.
503호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와 오빠들이 살았다. 501호 슬아네 엄마도 옆집에 사는 이모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왜인지 우리는 503호에 사는 이모를 특정해서 ‘옆집 이모’라고 불렀다. 옆집 이모네 집에는 이모부와 중학생인 언니 한 명과 오빠 한 명, 제일 큰 오빠인 고등학생 오빠 한 명이 살았다. 당시 나와 내 동생들은 모두 초등학생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중학생, 고등학생인 언니 오빠들과 잘 지내는 듯하면서도 내심 약간의 거리감 같은 것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한 번씩 503호에 놀러 가기를 즐겨했는데, 거기 가면 언니 오빠의 방과 책상 위에서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의 책상 책꽂이에 붙어 있던 차태현 씨의 사진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내가 그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 속 남자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차태현이라는 사람이고, 가수야!”라고 대답해 주던 언니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때는 언니가 이름을 알려줘도 그게 누군지 몰랐지만 그렇듯 이름을 알진 못해도 유명하다는 어떤 사람의 사진이나 우리 집과 학교에서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물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던 언니 오빠 책상 위의 책 제목 등을 통해 나는 언니 오빠가 속한 청소년이라는 세계를 미리 엿보고는 나중에 내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체를 하며 어른 된 흉내를 냈다.
내가 503호 언니 오빠네 집에 놀러 가곤 할 때 내 동생 희민이는 501호로 찾아가곤 했다. 동갑내기 친구가 옆집에 사니 그게 마냥 좋았던지 늘 함께 놀려고 했다. 그런데 옆집의 슬아는 희민이와 같은 나이여도 다른 성별에서 오는 차이점이 꽤 의식되었던 모양이다. 가끔은 희민이와 놀고 싶지 않은 때가 있었고 그래서 희민이가 놀자고 현관문을 두드리면 대부분은 같이 놀았지만 한 번씩은 일부러 조용히 소리를 내지 않고 집에 없는 척을 했다고 한다. 지금의 나라면 그런 슬아의 마음을 헤아려 동생의 행동을 만류했을 테지만 그때는 나도 어린아이였으니……. 지금이라도 어른이 된 슬아에게 내 동생이 눈치 없게 행동했던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고 그런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동생과 재미있게 놀아주었던 것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
우리 세 가족은 부모님들끼리도 친해서 종종 반찬이나 다른 먹을거리를 나누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의 심부름꾼을 자처한 건 우리 자녀들이었다. 나는 양 옆집으로 우리 외갓집에서 담가서 보내주신 김치나 직접 재배해서 보내주신 쌀, 엄마가 만든 반찬 등을 들고 나르곤 했다. 그러면 옆집에서는 슬아네 이모부가 근무하시는 보해양조의 매실주,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시던 옆집 이모가 팔고 남은 아이스크림 등을 품에 안겨주시곤 했다.
우리 세 이웃 사이에서는 <계란 빌리기>라는 재미있는 대여 제도가 있었다. 엄마가 요리를 하다가 계란이 하나 부족해지면 꼭 우리 셋 중 한 명에게 옆집에 가서 계란 하나만 빌려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셋 중 한 명이 현관문을 열고 어느 옆집으로든 달려가 “이모~ 계란 한 개만 빌려주세요!”라고 하면서 계란을 빌려온다. 501호에 먼저 가서 계란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마침 다 써서 없다고 하면 바로 503호에 가서 빌려달라고 한다. 그렇게 빌려 쓴 계란은 이후 우리 엄마가 장을 보면서 계란을 한 판 사 오시면 바로 갚는다. 계란을 갚으러 가는 일도 우리 몫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식용유 조금, 양파 1개, 감자 1개 등을 빌린 적도 있지만 주 대여 품목은 계란이었다.
언제나 늘, 꼭! 계란이 한 개씩 모자랐다.
언젠가는 우리 아빠가 퇴근길에 통닭을 여러 마리 사 와 옆집 가족들을 불러서 함께 먹은 적이 있다. 선선한 초여름 밤에 이웃끼리 삼삼오오 모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단지의 작은 공원을 향해 내려갔다. 공원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다 함께 둘러앉아서, 통닭을 포장한 각대 봉투를 넓게 찢어 통닭을 부위별로 먹기 좋게 발라서는 하나씩 손에 들고 깨소금에 찍어 먹었다. 부모님들은 캔맥주에 수다를 곁들이며 한참을 웃고 떠들었고, 우리는 누가 하나 더 먹을세라 양손 가득 통닭을 들고 뜯기에 바빴던 것 같다. 사소하지만 즐거웠던, 우리 이웃 간 추억이다.
501호와 503호 가족은 이후 차례대로 이사를 나갔다. 우리 가족은 여전히 502호에 남아있다. 친하게 지내던 501호와 503호 가족이 이사를 나간 후 그 자리에 다른 가족들이 이사를 오고 갔지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친밀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지금은 우리 집 양쪽으로 누가 사는지조차 잘 모른다. 가끔 마주칠 때가 있지만 딱히 인사를 하지도 않는다. 요리를 하다가 계란이 떨어지면 이제는 그냥 부족한 대로 쓴다. 식용유도, 양파도, 감자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뭔가가 부족해지면 집별로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시대인 것 같다.
바뀐 방식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아주 가끔은 이웃끼리 모여 선선한 밤바람을 쐬면서 포장해 온 통닭을 함께 뜯어먹던 일이 그립게 느껴진다. 아무렇지 않게 계란 하나를 빌려오고 빌려주던 일이 종종 그립다. 사는 동안, 내가 옆집에 사는 작은 아이로부터 ‘이모!’라는 말을 들어볼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 아이가 우리 집에 계란을 빌리러 올 확률은? 확률이 높진 않아도 아예 0%는 아니면 좋겠다. 그래도 아직은 이웃과 이웃 사이에 0%는 넘는 어떤 것이 남아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