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유년
엄마가 식당 일을 시작한 건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엄마 나이 32살이 되었을 즈음이다. 그전까지는 셔츠 좌판을 들고 우리 동네의 여러 아파트 단지를 돌며 셔츠를 팔았던 엄마였다. 엄마의 셔츠 좌판 위로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던 셔츠들이 생각난다. 하얀 바탕에 갈색 체크무늬가 인쇄되어 있던 셔츠와 아무 무늬도 없이 그저 파랗기만 하던 셔츠, 가슴 앞쪽에 겨우 담뱃갑 하나 들어갈 정도로 작은 주머니가 달려 있던 셔츠…… 반팔도 있고 긴팔도 있었다. 모두 네모난 모양으로 가지런히 접혀 비닐에 쌓인 상태로 엄마의 좌판 위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셔츠 가격은 꽤 저렴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날그날 운에 따라 아예 한 장도 못 파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몇 시간 만에 대여섯 장의 셔츠를 팔기도 했다.
가끔씩 엄마가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장사를 하는 날도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갈색 염색머리 위로 선 캡을 쓰고 둥그런 턱 선만을 드러낸 채로 좌판 앞 작은 간이 의자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이면,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엄마가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면서 괜히 좌판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엄마가 나를 부르면, 재빨리 달려가서 엄마가 앉아 있던 간이 의자 옆 바닥에 퍼질러 앉아 오늘은 셔츠를 몇 장을 팔았는지, 계속 앉아 있기에 덥지는 않은지, 집에는 언제 돌아올 건지 등을 물으며 노닥거리곤 했다. 그렇게 노닥거리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엄마는 나를 돌려보내기 위해 꼭 이렇게 말했다.
“얼른 들어가. 더워.”
그렇게 얼마간 아파트 단지를 돌며 셔츠 좌판을 열던 엄마는 판매가 영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모르는 새에 셔츠 판매 일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몇 주 후 우리 학교 근처에 있던 <신포우리만두>에서 식당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신포우리만두의 사장님 두 분은 부부였는데 당시 나와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의 부모님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가게에 들르면 남자 사장님은 늘 가게 한쪽 구석 테이블에 앉아 뒤통수가 뚱뚱한 모니터를 보며 온라인 고스톱 게임에 한참이었고, 여자 사장님은 우리 엄마나 가게의 다른 종업원과 수다를 떨거나 남자 사장님이 앉아 있는 테이블과는 조금 떨어진 다른 테이블에 앉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그 가게의 대표 메뉴인 만두를 빚고 있거나 했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거의 매일 같이 그 신포우리만두에 들려 시간을 보냈다. 남자 사장님은 게임에 몰두하느라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고 여자 사장님은 아들과 같은 반인 나를 항상 반겨주셨기에 눈치라고는 만두피 두께정도로만 겨우 길러두었던 때지만 그 정도의 눈치로도 나에게 '아무 때나 와도 괜찮다'는 무언의 허락이 내려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제집 드나들 듯 그 가게를 드나들었다.
가게에 들어서면 먼저 사장님 내외분께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가게를 가로질러 걸어가 안쪽에 있는 조리실로 향했다. 조리실에 들어서면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칼국수에 들어갈 바지락을 해감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마주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엄마의 옆에 똑같이 쪼그려 앉아서, 커다랗고 빨간 고무대야 안에 옹기종기 모여서는 높은 벽 때문에 구경도 못할 대야 밖 세상을 향해 물을 뿜어대는 바지락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소금물에 담긴 바지락이 하나씩 하나씩, 이놈 저놈 퓩- 하고 물을 뿜어대는데,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얼마 되지 않는 내 눈요깃거리 중 하나였다.
사실 그 가게에 그렇게 밥 먹듯이 드나들었던 데에는 엄마를 보러 가기 위함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언젠가 가게에 들렀을 때 여자 사장님께서 손님이 음식을 주문하면 그 음식과 함께 제공되는 서비스 장국을 맛 보여 준 적이 있는데, 약간 짭짤하면서도 혀를 감싸는 장국 국물의 그윽한 감칠맛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 국물을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 가게에 드나들던 것이다. 엄마가 셔츠 좌판을 열던 시절에 좌판 위 셔츠가 팔려나가던 정도처럼, 그날그날 가게의 바쁜 정도에 따라 장국을 아예 한 컵도 얻어먹지 못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운이 좋아 2~3컵을 얻어먹는 날도 있었다.
그 당시 나의 방과 후 스케줄은 이랬다. 학교를 마치면 학교 교문에서부터 엄마가 일하는 가게까지 곧장 이어져 있는 길을 따라 쭉 걸어 내려온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우선 가게의 테이블이 비어있는 정도를 살핀다. 식사 중인 손님이 얼마 없음을 확인하면 곧바로 사장님 두 분과 종업원들의 얼굴을 살핀다. 표정에 즐거움이나 편안함과 같은 긍정적인 기운이 드리워져 있으면 우선 엄마를 보러 조리실 쪽으로 갔다가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나온다. 주변에 계신, 가게에 속한 어른 누구에게든 저 국물을 좀 먹어도 되겠냐고 묻는다. 허락이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가게 안쪽 서비스 테이블로 걸어가, 테이블 아래 서랍에 차곡히 뒤집혀서 쌓여있는 장국용 작은 공기를 집어든 후 업소용 중탕기에서 국물을 따른다. 그리고 맛있게 마신다!
만두피 두께만큼의 눈치였지만 맛있는 국물 한 번 먹어보자고 날로 눈치가 늘어가던 시절이었다.
가게의 어른들은 나에게 서비스로 나가는 장국이 그렇게 맛있냐고 물으며 연달아 2~3컵을 마시는 내 모습을 신기해했다. 물론 맛있었다. 그리고 따뜻했다. 업소용 중탕기 수도꼭지를 통해 막 따라낸 국물은 보온이 잘 되어 있어서 한 모금 마시면 식도부터 위까지 따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 손으로 공기 바닥을 받치고 국물을 한 모금 꿀꺽 삼킨 후 눈을 감고 그 느낌을 음미했다. 식도를 따라 따뜻하고 맑은 액체가 가슴 밑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기운이 명치쯤에 도착하면 그 이후에는 뱃속 전체에 훈훈한 온기가 퍼지고 몸도 마음도 흐물흐물해졌다. 그 느낌이 좋았다. 어른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속이 풀린다’는 게 뭔지, 그 뜻도 의미도 모를 나이였지만 나는 언제나 그와 비슷한 느낌을 갈구했던 것 같다. 속에 있는, 말로는 표현 못 할 어떤 응어리가 따뜻하게 풀려나가는 듯한, 그런 느낌이 필요했다.
그렇게 서비스 장국 2~3컵을 마시는 것으로 나만의 속풀이 의식을 마치고 나면 엄마와 가게 어른들께 바르게 인사를 하고 혼자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우리 엄마는 신포우리만두에서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해야 해서 같이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혼자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가게 문을 나서려고 할 때면, 한 번씩 익숙한 근질거림이 스멀스멀 내 입가로 찾아오곤 했다. 엄마에게 뭘 좀 물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대는 것이었는데, 그건 매주 금요일마다 여기로 제 오빠와 같이 돈가스 정식을 먹으러 오는 우리 반 송이처럼 나도 여기서 돈가스를 먹어도 되는지, 내가 여기서 돈가스를 먹으면 엄마가 돈을 내야 하는지, 그럼 사장님들이 싫어하실는지 따위의 질문이었다.
정말 물어볼 뻔한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결국 근질거림은 근질거림에서 멈췄다. 머릿속 질문은 늘 질문되지 못한 채 내 속에 그대로 남겨졌고 그게 나의 기본값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돈가스 정식을 먹어도 되냐고 묻지는 못했지만 서비스 장국을 먹어도 되는지는 물어봤으니까. 그렇게 얻어먹은 따뜻한 장국이 언제나 조그마한 내 속을 흐물흐물하게 풀어주었으니까. 덕분에 그 근질거림을 해소하는 일을 어른이 된 이후로 <유예>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되면 엄마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내가 사 먹으면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엄마를 뒤에 남겨두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