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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300년의 기다림

by 해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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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세단이 서울의 외곽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규칙적으로 차 안을 비췄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점멸하는 빛 속에서 태오의 얼굴은 마치 오래된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

하은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한 채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방금 전 겪은 전투의 충격, 민서아가 뱉어낸 독설, 그리고 태오의 슬픈 눈동자. 모든 것이 뒤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1693년이었습니다.”


무거운 정적을 깨고 태오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여전히 앞만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지금 이 도로가 아닌 아주 먼 과거의 시간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숙종 19년, 나는 당시 의병들을 이끄는 무관이었습니다. 북쪽 국경 근처에서 출몰하던 도적 떼를 소탕하고 한양으로 복귀하던 길이었죠.”


태오가 잠시 말을 멈추고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깊은 숲 속이었습니다. 비릿한 혈향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고, 곧이어 거친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맨발로 산길을 달리는 한 여인… 그녀가 바로 서월이었습니다. 당신의 조상이자,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유일한 여인.”



[회상: 1693년, 조선]

달빛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울창한 침엽수림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그곳에서, 서월은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하얀 소복은 찢겨 나뭇가지에 걸레처럼 너덜거렸고, 하얀 버선은 이미 벗겨져 맨발이 흙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잡아라! 놓치면 우리 목이 달아난다!”


뒤에서 들려오는 사내들의 고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횃불의 불빛이 서월의 등 뒤를 핥듯이 쫓아왔다. 공포와 탈진으로 다리가 풀린 서월이 돌뿌리에 걸려 비탈길을 굴렀다.


“아윽...!”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그녀가 멈춘 곳은 흙바닥이 아닌, 누군가의 단단한 발치였다. 서월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달빛을 등지고 선 사내, 강태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 살려주세요... 그들이... 그 괴물이...”


서월은 태오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덜덜 떨었다. 곧이어 횃불을 든 추격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눈은 이성이 마비된 짐승의 그것과 같았다.


“비키시오. 그년은 우리 주인님의 것이다.”


태오는 말없이 칼을 뽑았다. 서슬 퍼런 검기가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날 밤, 태오는 추격자들을 단신으로 베어 넘겼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숲에서, 태오는 피투성이가 된 서월을 안아 들었다.


“이제 괜찮소.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오.”


태오의 은신처에서 몸을 추스른 서월은, 며칠이 지나서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당시 조정의 막후 실세이자 권세가였던 장희재, 훗날 장세훈이라 불리게 될 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늙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영원히 권력을 쥐고 세상을 발아래 두길 원했지요. 그래서 금기된 고서에 적힌 사악한 의식을 행했습니다.”


서월의 눈동자가 공포로 흔들렸다.


“저는 왕실 의녀로서, 태어날 때부터 ‘치유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했습니다. 그는 제 피가 의식의 열쇠라며 저를 납치했고... 강제로 피를 뽑아 그 끔찍한 잔에 담았습니다.”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 쥐었다. 마치 그때의 고통이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그가 제 피를 마시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눈이 아니었어요.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송곳니... 그는 그 자리에서 사람의 피를 탐하는 괴물, 최초의 불멸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세훈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불완전한 의식 탓에 그는 햇빛을 볼 수 없었고,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완전한 불멸의 존재, ‘밤의 제왕’이 되기 위해 서월을 다시 찾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피를 마셔 자신의 육체를 완성하기 위해서.


“제가 도망친 것은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 피가 그에게 들어가면... 이 나라는 영원한 어둠에 잠길 테니까요.”


서월의 결의에 찬 눈빛을 보며, 태오는 다짐했다. 이 여인을 지키는 것이 곧 세상을 지키는 길임을. 두 사람은 산속 깊은 암자에서 숨어 지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도피 생활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연정은 피어났다. 서월이 약초를 캐오면 태오가 장작을 패고, 밤이면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불안을 잠재웠다. 태오에게 서월은 지켜야 할 사명이자, 난세에 만난 유일한 안식처였다.


하지만,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월식이 시작되던 밤, 하늘의 달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찾았다, 내 영생의 열쇠여.”


암자의 사립문이 산산조각 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흙먼지 속에서 걸어 들어온 것은 장세훈이었다. 인간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창백한 피부와 붉은 눈을 한 괴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도망치시오, 서월!”


태오는 서월을 뒤로 밀치고 칼을 뽑아 들었다. 조선 제일의 검이라 불리던 태오였다. 그의 검이 유성처럼 장세훈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챙- 하는 금속음과 함께 태오의 검이 허무하게 부러졌다. 장세훈은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 인간의 쇠붙이로 나를 벨 수 있을 것 같으냐.”


장세훈의 손짓 한 번에 태오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태오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그녀에게... 손대지 마라!”


태오는 부러진 칼자루를 쥐고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장세훈은 태오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호기롭구나. 네놈의 그 뜨거운 피가 내 갈증을 돋우는구나.”

“태오 님! 안 돼요!”


서월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갔지만, 장세훈의 수하들이 그녀를 결박했다. 장세훈은 태오의 목덜미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너도 나와 같은 불멸의 세상을 걷게 해주마.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피에 굶주려 사랑하는 이를 탐하게 되는 저주를 내려주지.”


장세훈의 송곳니가 태오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뜨겁고 사악한 독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이 덮쳤다. 태오의 비명이 산을 울렸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서월은 품속에 숨겨두었던 것을 꺼냈다. 의식에 쓰였던 두 개의 비수 중 하나, ‘치유의 비수’였다. 장세훈이 가장 탐내던,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


“이것만은... 절대 네놈에게 넘기지 않아!”


서월은 장세훈을 향해 소리치며, 절벽 쪽으로 몸을 날렸다.


“안 돼!”


장세훈이 태오를 내팽개치고 서월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늦었다. 서월은 절벽 아래 까마득한 계곡으로 비수를 던져버렸다. 은색 비수가 달빛을 받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계집이...!”


분노한 장세훈의 손이 서월의 가슴을 꿰뚫었다. 바닥에 쓰러진 태오의 시야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생명이 꺼지고, 뱀파이어로서의 본능이 깨어나는 찰나였다. 그는 차갑게 식어가는 서월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서월아... 서월아...”


그녀의 눈에 맺힌 마지막 눈물이 태오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것이 300년의 지옥 같은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현재]

태오의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차는 어느새 어둠에 잠긴 달빛 클리닉 주차장에 멈춰 서 있었다. 엔진 소리가 잦아들었지만, 차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하은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순한 전설이나 옛날이야기가 아니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가 온몸으로 겪어낸 처절한 역사였다. 그가 짊어진 죄책감의 무게가 하은의 가슴을 짓눌렀다.

태오가 핸들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하은을 바라보았다. 300년의 세월을 건너온 그의 눈빛은 깊고 슬펐지만, 동시에 단단했다.


“그 후로 300년... 나는 그 비수를 되찾고, 서월이 남긴 혈통을 찾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장세훈이 다시 움직여 세상을 어지럽히기 전에 그를 막기 위해서.”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하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차가운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을 지키는 것이, 곧 300년 전의 약속을 지키는 길이니까요.”


하은은 태오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뜨거웠다. 그녀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이 남자에게 끌렸는지, 왜 이 위험한 세계에서 도망치지 못했는지.


“태오 씨.”


하은은 결심한 듯 숨을 고르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까 민서아가 집을 들이닥쳤을 때, 가방은 빼앗겼지만 다행히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작은 물건이 있었다.


“이거... 보시겠어요?”


하은이 내민 손바닥 위에 낡고 작은 은색 열쇠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의 유품 상자 가장 깊은 곳, 이중 바닥 아래 숨겨져 있던 것이었다. 초승달 모양의 장식이 정교하게 조각된, 앤티크하지만 기묘한 기운을 풍기는 열쇠였다.

태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열쇠를 집어 들었다.


“이건...”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월식의 비수를 보관한 함의 열쇠입니다. 서월이 비수는 던져버렸지만, 열쇠만은 남겨두었군요. 이것이 비수의 짝입니다.”


“그럼 비수를 찾을 수 있는 건가요?”

“이 열쇠가 있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수는 주인을 부르고, 열쇠는 그 부름에 응답하니까요. 서월이 당신에게 남긴 마지막 유산입니다.”


그때, 주차장 쪽으로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구재혁이었다. 그는 평소의 냉철한 모습과는 달리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태오! 하은 씨! 빨리 들어와 봐. 놀라운 결과가 나왔어.”


세 사람은 서둘러 클리닉 지하 연구실로 향했다. 차가운 금속성과 소독약 냄새가 감도는 연구실 안에는 이준호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벽면 가득한 스크린에는 복잡한 유전자 배열과 수치들이 붉은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구재혁은 하은의 혈액 샘플이 담긴 시험관을 조명 아래 들어 보였다. 붉은 액체 속에서 미세한 금빛 입자가 반짝이는 듯했다.


“하은 씨의 혈액을 정밀 분석해본 결과,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고 특이한 성분이 검출됐어. 단순히 상처를 치유하는 수준이 아니야.”


구재혁이 키보드를 두드리자 모니터 화면이 바뀌며 시뮬레이션 영상이 재생됐다. 뱀파이어의 세포에 하은의 혈액 성분을 주입하자, 세포막이 강화되며 강렬한 자외선 공격에도 파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걸 봐. 이 혈액의 성분을 뱀파이어의 세포에 결합시켰더니, 태양광에 대한 세포 파괴 반응이 90% 이상 억제되었어. 즉, 하은 씨의 피를 마시면 뱀파이어도 일시적으로 햇빛을 견딜 수 있게 된다는 거야. 낮에도 걸어 다닐 수 있는 존재, ‘데이워커(Daywalker)’가 될 수 있어.”


“햇빛을.. 견딘다고요?”


하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태오와 이준호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것은 뱀파이어들에게 있어 수백 년간 갈망해온 기적이자, 동시에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재앙이었다.

침묵을 깨고 이준호가 천천히 하은에게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에는 평소의 장난기는 사라지고, 한 클랜을 이끄는 수장으로서의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하은 씨. 이제 당신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왜 장세훈이 미친 듯이 당신을 찾는지 아시겠습니까?”


이준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장세훈은 그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할 겁니다. 밤의 제왕에 만족하지 않고, 낮까지 지배하는 신이 되기 위해서요. 인간을 가축처럼 부리고, 영원한 어둠의 제국을 건설하겠죠.”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와 하은과 눈을 맞췄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레드 클랜은 인간과의 공존을 원합니다. 당신의 그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둠 속에 숨지 않고 인간 사회에 섞여들 수 있습니다. 당신의 피는 저주가 아니라, 두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하은은 혼란스러웠다. 치유, 햇빛 내성,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클랜들의 싸움. 그녀는 평범한 바텐더였을 뿐인데, 이제 그녀의 선택 하나에 세상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옆에 선 태오의 존재가 그녀를 붙잡았다. 300년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 했던 그의 노력, 그리고 자신을 위해 몸을 던졌던 그의 진심. 하은은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리고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하은의 목소리는 작지만 분명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제 능력이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해치는 데 쓰이지 않게 해주세요. 더 이상 무고한 사람들이, 그리고 태오 씨 같은 분들이 고통받지 않게요.”


태오가 하은의 어깨를 감싸 쥐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약속합니다. 당신의 능력이 악용되지 않도록, 제 남은 생명을 걸고 막겠습니다. 당신은.. 제가 지킵니다.”


연구실의 공기가 결연한 의지로 채워졌다. 하은, 태오, 이준호, 구재혁. 서로 다른 목적을 가졌던 이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뭉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결의를 지켜보는 차가운 시선이 어둠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달빛 클리닉 건너편, 짙은 어둠이 깔린 숲길. 엔진을 끈 채 정차해 있는 검은 세단 안에서 붉은 불빛이 깜빡였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고성능 망원경을 내리고,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을 톡 쳤다.

그의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붉고 탁했다.


“네, 확인했습니다.”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뱀파이어 특유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서하은은 분명 마지막 치유자입니다. 놈들이 방금 그녀의 피가 가진 ‘햇빛 내성’ 능력을 확인한 것 같습니다. 블루 클랜과 레드 클랜이 손을 잡으려 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위압적이었으며, 소름 끼치도록 차분했다. 남자는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어떻게 진행할까요, 장세훈 님?”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흔들었다. 마치 다가올 피바람을 예고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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