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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질투의 여왕

by 해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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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장창!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거실 바닥으로 유리 파편이 비 오듯 쏟아졌다. 깨진 창문 틈으로 불어닥친 밤바람이 하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태오가 반사적으로 하은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등은 단단했지만, 미세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먼지 구름이 걷히자 검은 실루엣이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


"오랜만이다, 강태오."


소름 끼치도록 나긋나긋한 목소리. 민서아였다. 그녀의 뒤로 기척조차 없이 두 명의 사내가 따라 들어왔다. 창백한 피부에 초점 없는 눈동자, 하지만 그들이 내뿜는 살기는 명백히 이쪽을 향해 있었다. 블랙 클랜의 수하들이었다.


"민서아…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태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민서아는 그런 태오의 변화를 즐기듯 붉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너무 경계하지 마. 난 그저 우리 장세훈 님의 전언을 가지고 왔을 뿐이니까."


그녀의 시선이 태오의 등 뒤에 숨은 하은에게로 옮겨갔다.


"그 계집을 넘겨. 장세훈 님이 대화하고 싶어 하셔."

"그럴 일은 없다. 돌아가."


태오의 단호한 거절에 민서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거실 한가운데로 걸어왔다. 엉망이 된 집안 꼴을 훑어보던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여전하네, 강태오.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놈의 '지킨다'는 타령은. 그래서 결국 뭘 지켰지? 그 여자도 죽었고, 너도 괴물이 됐잖아."

"닥쳐."

"서하은, 그거 알아?"


민서아는 태오의 경고를 무시한 채 고개를 빼꼼 내밀어 하은을 응시했다.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 내용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이 남자, 내 약혼자였어."


하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난번 클럽에서도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이렇게 태오 앞에서 직접 듣는 것은 충격의 무게가 달랐다.


"정확히는 50년 전이었지. 우린 블랙 클랜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어. 그런데 결혼식 직전에 날 차버리더군. 이유가 뭐였는지 알아? 자신의 저주스러운 삶에 나를 끌어들이기 싫다나?"


민서아의 눈에 서린 것은 명백한 애증이었다. 사랑했던 만큼 증오하고, 증오하는 만큼 집착하는 붉은 광기.


"위선자. 네가 전쟁 통에 죽인 인간이 몇 명이나 되지? 한국전쟁 때, 피 냄새에 미쳐서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건 기억해?"


하은은 숨을 멈췄다. 태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아니야… 그건…"


태오가 쉰 목소리로 부정하려 했지만, 민서아는 틈을 주지 않았다.


"서하은, 잘 들어. 이 남자는 영웅이 아니야. 피에 굶주린 살인귀지. 300년 동안 죄책감에 절어 사는 척하지만, 결국 본능 앞에서는 짐승일 뿐이라고. 그런 자가 당신을 지켜? 웃기지 말라고 해."


민서아의 말은 독처럼 하은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태오가 학살자라고? 마을 하나를? 하은은 떨리는 눈으로 태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항상 자신을 지켜주던 듬직한 등이었다. 차갑지만 다정했던 손길, 슬픔이 고여 있던 눈동자.


'믿어야 해.'


하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월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태오는 서월을 위해 목숨을 걸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태오 역시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지금 하은의 눈앞에 있는 강태오는 그녀를 지키려는 사람이다.


"상관없어요."


하은이 태오의 옷자락을 꽉 쥐며 외쳤다.


"과거가 어쨌든, 지금 제 곁에 있는 건 태오 씨예요. 당신 말은 믿지 않아요."


하은의 대답에 태오가 놀란 듯 뒤를 돌아보았다. 하은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 시선에 태오의 눈동자가 잠시 일렁였다.

반면, 민서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질투. 그것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멍청한 계집이… 감히 내 앞에서 그를 선택해?"


민서아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죽여. 계집만 남기고, 태오는 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데려간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뒤에 있던 두 뱀파이어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하은 씨, 피해요!"


태오가 하은을 밀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콰앙! 태오의 주먹이 선두에 있던 뱀파이어의 가슴팍에 꽂혔다. 놈이 뒤로 튕겨 나갔지만, 곧바로 다시 일어났다. 통각이 없는 듯했다. 나머지 한 놈이 태오의 사각지대를 노리고 발톱을 휘둘렀다. 태오가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코트 자락이 찢겨 나갔다.


"꺄악!"


하은은 구석으로 물러나며 비명을 질렀다. 거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태오는 강했지만, 두 명의 뱀파이어를 상대하며 하은까지 보호하는 것은 버거워 보였다. 게다가 민서아까지 뱀처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도와야 해. 뭐라도 해야 해.'


하은의 시선이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에 꽂혔다. 깨진 창문의 파편들이었다. 그때, 태오와 엉겨 붙어 싸우던 뱀파이어 하나가 튕겨 나와 하은 쪽으로 굴러왔다. 놈은 곧장 타겟을 바꿔 하은에게 달려들었다.


"크르르…"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태오는 다른 놈을 상대하느라 미처 손쓸 수 없는 거리였다. 하은은 본능적으로 바닥에 있는 뾰족한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이 베여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오지 마!"


하은은 피가 맺힌 유리 조각을 놈의 얼굴을 향해 내리꽂았다.


"키에엑!"


유리 조각이 놈의 뺨을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놈은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치이익. 하은의 피가 닿은 놈의 피부가 하얀 연기를 내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민서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 역시 하은의 피가 가진 위력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지금이야! 나가요!"


태오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뱀파이어들을 걷어차고 하은의 손목을 낚아챘다.


"잡아! 놓치지 마!"


민서아가 악을 썼다. 하지만 태오는 이미 하은을 안고 깨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몸을 날린 후였다. 두 사람은 어둠 속을 미친 듯이 달렸다. 미리 세워둔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할 때까지, 하은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끼이익-! 차가 급하게 출발하며 하은의 집이 멀어졌다. 백미러로 집을 쳐다보던 하은이 비명을 질렀다.


"내 가방! 가방을 두고 왔어요!"


아까 뱀파이어가 달려들 때 떨어뜨린 가방이었다. 그 안에는 할머니의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민서아와 그녀의 수하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민서아의 손에는 하은의 가방에서 꺼낸 듯한 낡은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젠장."


태오가 핸들을 거칠게 내리쳤다.

한참을 달려 안전한 도로에 접어들어서야 차 안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하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 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뱀파이어가 타들어가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내 피가 정말 무기가 되는구나.


"괜찮습니까?"


태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기장을… 뺏겼어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당신이 무사한 게 더 중요해요."


태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앞만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옆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의 표정에는 고뇌가 가득했다.


"아까… 민서아가 한 말…"


하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요? 전쟁 때 사람들을 죽였다는 거."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태오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태오의 대답은 짧고 묵직했다.


"300년을 사는 동안, 나는 제정신이 아닌 적이 많았습니다. 피에 굶주려 이성을 잃기도 했고, 인간들의 전쟁에 휘말려 살육을 저지르기도 했죠.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민서아와 파혼했습니다. 나 같은 괴물 곁에 있으면 그녀도 불행해질 테니까. 그런데... 그게 그녀를 더 독하게 만든 것 같군요."


하은은 태오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괴물이라 자책하는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있는 슬픔. 그것은 300년의 세월을 홀로 견뎌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독이었다.


"하지만 태오 씨."


하은이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옷감 너머로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아까 절 구해주셨잖아요. 그리고 지금까지 저를 해치지 않았어요. 저는 과거의 강태오가 아니라, 지금 제 옆에 있는 강태오를 믿어요."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은의 맹목적인 믿음이 그의 얼어붙은 심장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하은 씨."


태오가 차의 속도를 줄이며 갓길에 잠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하은을 응시했다.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겠군요."

"네?"

"당신이 보여준 믿음에 저도 보답해야겠습니다. 내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리고 서월과 내가 어떤 사이였는지.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전부 말해드리겠습니다."


태오의 손이 하은의 손을 덮었다.


"달빛 클리닉으로 가는 동안, 아주 긴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300년의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를요."


그의 눈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된 자의 눈빛이었다. 하은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다시 어둠을 뚫고 달빛 클리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은, 어느새 반쯤 차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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