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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치유자의 첫 시험

by 해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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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클리닉. 고요한 어둠을 간직한 그 공간에 급하게 문이 열렸다. 병원 특유의 살균 냄새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지만, 이곳은 분명 다른 병원과는 달랐다. 마치 세계와 차단된 듯한 고요함이 특징이었다.


"또 발생했어."


이준호가 헐떡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색 파일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차분함과는 달리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그를 맞이한 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레드벨벳 근처 뒷골목, 정확히 그 때와 같은 방식이야. 목에 이빨 자국... 하지만 이번엔 더 깊고 확실해."


이준호는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두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의 옷 깃은 거친 달음질로 인해 흐트러져 있었다.


"클랜 소속이 아닌 뱀파이어야. 타액에 포함된 DNA 구조가 완전히 달라. 아예 다른 혈통... 혹은 미친 자들인 거 같아."


태오의 눈매가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외부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어. 분열된 혈족 중 잊혀진 자들일지도..."


그 순간, 방 안의 조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질적인 기운이 감지된다는 듯, 공간이 스스로 긴장하는 듯했다. 창문 유리에 반사된 태오의 눈동자가 잠시 붉게 빛났다 사라졌다.


"증거는 충분한가?"

"오세영의 부하가 현장에 있었어. 그들도 혼란스러워 하더군. 그들의 분석 결과도 같아."


태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깊은 숲 속의 하늘은 별들로 가득했다. 그 별빛 너머에는 그가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하은 씨는?"

"지금 구재혁 박사와 있어. 혈액 분석을 시작한 것 같아."


태오는 이마를 짚었다. 이제 시간은 많지 않았다. 차오르는 달이 말해주고 있었다. 월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를 만나러 가야겠군. 이준호, 경계를 강화해. 새로운 변수가 생긴 것 같아."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오가 방을 나서기 직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태오... 혹시 당신이 기억하는... 그들 중 누군가가 아닐까?"


태오는 잠시 멈추었다. 그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어. 그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허나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



"역시 피의 구조가 특이하군요."


구재혁은 현미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는 하은이 앉아 있었고, 한쪽 벽에는 묘한 분위기의 여성이 팔짱을 낀 채 기대어 있었다. 짧은 보브컷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녀는 하은을 향해 계속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특이한가요?"


하은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저 칵테일을 만드는 조금은 유명한 바텐더였던 그녀는 이제 뱀파이어 세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일반 인간의 혈액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입자들이 있습니다. 빛의 파장을 흡수하는 성분이 미세하게 섞여 있어요. 이건... 햇빛 저항성과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구재혁은 흥분한 듯 안경을 올렸다. 그의 눈빛은 학자다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구재혁의 옆에서 조수 유채린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당신 피 때문에 어떤 뱀파이어들은 낮에도 활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죠. 그게 꼭 좋은 일일까요?"


하은은 당황하며 유채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날카롭고 차가웠다. 이 여자, 분명히 처음부터 자신을 좋게 보지 않았다.


"채린아."


구재혁이 제지하듯 조용히 불렀다. 유채린은 눈을 굴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하은이 조용히 말했다.


"저도 아직 제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니까요."


유채린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용기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주 미세한 존중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혈액이 햇빛 저항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게 확실한가?"


방 안으로 들어선 태오가 물었다. 구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설 단계지만,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어. 하은 씨가 동의만 한다면 말이지."


태오는 하은을 바라보았다. 하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해볼게요."


태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있어요. 좀 더 안정되면 함께 가봅시다."



***



그날 저녁, 짧은 휴식 시간. 태오는 하은을 달빛 클리닉의 옥상으로 데려갔다. 서울 근교인 듯한 이 숲 속의 밤하늘 아래,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은은 조심스레 물었다.


"몇 번 들은 적이 있어요. 장세훈이라는 이름… 그리고 클랜들. 지난 번에 너무 급하게 들어서요. 좀 자세히 알려줄 수 있어요?"


태오의 시선이 멀어졌다. 과거의 그림자를 꺼내듯 낮게 말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수백 년의 세월이 담겨 있었다.


"우리 세계는 오래전부터 세 개의 클랜으로 나뉘어 있어요. 우선 블루 클랜은 내가 속한 곳이죠. 과거와 현재의 균형을 중시하는 중립파입니다. 규율과 중도를 지향하죠."


하은은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그녀가 알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레드 클랜, 급진적이고 변화에 적극적인 자들이예요. 인간과의 공존을 원하고, 인간 사회에 개입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선호하죠. 이준호가 그 클랜의 핵심 인물입니다."


하은은 이준호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을 경계했지만, 어쩐지 그는 인간을 위협적으로 대하진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블랙 클랜.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순혈주의를 강조합니다."


하은이 살짝 몸을 긴장시켰다.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올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장세훈은 블랙 클랜의 수장이에요. 그의 철학은 단순합니다. 약한 존재는 피로 정화된다. 그는 '마지막 치유자'인 당신을 단순한 도구, 아니… 전략 병기로 보죠."

"왜요? 제 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길래…"

"치유는 단지 시작일 뿐이에요. 당신의 피는 유전적으로 변이된 어떤 특별한 요소를 갖고 있어요. 뱀파이어의 약점을 억제하거나, 반대로 증폭시키는 힘이죠. 햇빛 내성, 치유 속도, 심지어 피의 동화율까지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장세훈이 그걸 손에 넣는다면..."


태오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 보는 감정이었다.


"블랙 클랜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인간에겐... 더 이상 자유의 세계가 남지 않을 겁니다."

하은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자신의 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고통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태오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우리는 아직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균형은… 얇은 얼음 위의 침묵과도 같죠. 당신은 지금, 그 중심에 있어요."

"저… 그런 걸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처음부터 다 감당하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진실은 알아야 하니까."


태오가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곁에 있으면 이상하게도 안정감이 느껴졌다.


"당신은 치유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선택자이기도 해요. 우리의 운명이 당신의 손에 달려있어요."


그 말에 하은은 조용히 손목의 '달의 표식'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그 표식은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면, 이제는 맞설 차례였다.



***



며칠이 지났다. 하은은 달빛 클리닉의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구재혁의 실험에 참여했고, 그는 그녀의 혈액을 이용해 뱀파이어들의 햇빛 내성을 강화하는 약물 개발에 몰두했다. 유채린도 처음에 보이던 적대감을 조금씩 줄여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하은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요. 처음엔 당신을 의심했어요. 또 다른 서월이 나타나 태오를 망가뜨릴까 봐..."


하은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월... 제 조상말인가요?"


유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300년 전, 태오는 그녀를 보호하지 못했어요. 그 후로 계속 자기 자신을 책망했죠. 당신이 나타났을 때... 우린 두려웠어요. 태오가 과거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을까 봐."


하은은 가슴이 아파왔다. 태오가 지녔을 300년간의 슬픔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꼭 그것 뿐 만은 아니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다는 그 여인… 어떤 여인이었을까?


"하지만 이제 조금 안심해요. 당신은... 서월이 아니니까요. 당신만의 의지와 용기가 있어요."


유채린이 하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진실된 표정이었다.



***



달빛 클리닉 지하 치료실. 그곳에서 하은은 처음으로 진짜 '치유자'로서의 시련을 마주했다. 침대 위에 누운 이는 젊은 뱀파이어였다. 팔뚝과 어깨에 화상이 가득했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옆에선 다른 뱀파이어 간호사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피 공급은 충분했나?"


태오가 물었고,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반응이 없습니다. 회복이 전혀 안 됩니다. 은 화상이라 더욱 심각해요."


하은은 조심스레 환자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몸 안 어딘가에서 미세한 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기억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 집중하자, 그녀의 손끝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났다.


"...괜찮을까?"


이준호가 작게 물었고,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라면 할 수 있어."


하은은 환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듯 떨림이 전해졌다. 순간, 환자의 상처 위로 희미한 빛줄기가 내려앉았다. 살갗이 조금씩 재생되기 시작했다. 은 화상이 점점 옅어졌다.


"됐어...!"


간호사가 숨죽이며 속삭였다. 뱀파이어의 상처가, 고통이 가라앉고 있었다. 마치 태초의 안식처럼. 달의 은광이 내리는 듯한 기운이 환자의 온몸을 감쌌다. 하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감각은 처음이 아니었다. 언젠가 꿈속에서… 달 아래서 그녀는 이와 같은 행위를 했었다. 의식을 행하던 그 여인처럼. 환자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그는 하은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치유자...?"


하은은 그에게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이 순간, 공포나 혼란보다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재혁은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놀랍군요... 은 화상까지 치유할 수 있다니. 혹시 이런 능력을 다른 방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햇빛 내성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치료제 같은..."


태오가 구재혁을 제지했다.


"하나씩 해보자고. 하은 씨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주지 마."


하은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해보고 싶어요."


그녀의 결심이 섰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가진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그것을 활용할 것이다. 그날 밤, 그녀는 네 번째 환자를 치유하고 있었다. 몸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들의 고통을 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은 씨, 이제 그만해요."


태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하은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 명 남았어요."


그는 심하게 다친 뱀파이어였다. 새벽의 칼과의 충돌에서 생긴 상처라고 했다. 목과 가슴에 은 단검 자국이 깊게 패어 있었다.


"너무 위험해요. 당신 체력이 다 소진되었어요."


하은은 태오의 걱정을 무시하고 다가갔다. 마지막 환자에게 손을 얹는 순간이었다. 온몸에서 퍼지는 열기, 그리고… 갑작스레 퍼지는 서늘한 기운. 마치 얼음장 같은 한기가 그녀의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어...?"


그녀의 눈이, 은빛으로 빛났다. 달빛이 직접 눈동자에 깃든 듯이 반짝였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영혼이 그녀의 몸에 들어온 것 같은 감각이었다. 하은은 그대로 무너져 쓰러졌다.


"하은 씨!!"


태오가 다급히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의 품 안에서 작은 하은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숨은 깊고 무거웠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힘겹게 들썩였다.


"구재혁! 어서!"


구재혁이 재빨리 다가와 하은의 상태를 살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하지만... 이건..."


그의 말이 끊겼다. 하은의 눈동자가 완전히 은빛으로 변했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고, 다른 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월식의 비수... 운명의 칼... 피의 의식..."


그 순간, 하은의 의식은 검은 공간에 잠겼다.



***



환상 속.

하은은 다시 '그 곳'에 서 있었다. 보름달이 피처럼 붉게 물들고, 제단 위엔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그녀는 손에 은빛 비수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선명했다. 그녀는 이곳이 조선시대의 산골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숲에 둘러싸인 비밀 제단이었다.


"치유자의 피를 바치십시오."

수많은 목소리, 그 소리는 그녀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비수를 들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강태오가 있었다. 지금의 모습보다 젊고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였다.


"서월아... 하지 마. 넌 그의 도구가 아니야."


젊은 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은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서월인가? 아니면 하은인가?


"하은아... 넌 지금도 날 죽이려는 거야?"


갑자기 제단 위의 태오가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피로 물든 달빛 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운명을 거스르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그의 눈은 앞을 볼 수 없는 듯했지만, 그의 시선은 하은을 꿰뚫고 있었다.


"마지막 치유자여... 그대는 선택해야 한다. 피를 바칠 것인가, 저주를 풀 것인가."


하은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남자는 미소 지었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자 날카로운, 너무도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지배자."


그 말과 함께, 환상이 산산이 부서졌다.



***



현실로 돌아왔을 땐, 그녀는 태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태오, 구재혁, 이준호, 그리고 유채린까지 모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당신은... 해냈어요."


태오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하은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감싸쥐었다. 흉터 위로 또렷한 달 모양의 빛이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그 흉터는 이제 전보다 더 선명해 보였다.


"저... 봤어요. 300년 전... 의식, 비수, 태오 씨가... 제단 위에 있었어요. 지난 번에도 본 거 같아요. 이번엔 더 선명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지만, 분명해졌다.


"이번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어요. 그가 저한테 선택하라고... 피를 바칠지, 저주를 풀지..."


태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장세훈..."


이준호가 놀라 물었다.


"그가 이미 그녀의 꿈에 침입했다고?"


태오는 주먹을 쥐었다.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은 거 같다. 그는 이미 움직이고 있어."


하은은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결연함도 함께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저는... 준비되어 있어요."


태오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우선은 충분히 쉬어야 해요. 환상이 더 자주, 더 강하게 찾아올 거예요. 그걸 통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치유자의 운명은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녀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환상들이 그 비밀을 풀어줄 열쇠가 될 것이라는 것도.


"이제 좀 쉬세요, 하은 씨."


태오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해요."


그의 눈에는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지만, 하은은 너무 지쳐 있어 그것을 놓쳤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고, 깊은 잠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의 꿈속에서, 달은 다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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