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세단이 서울의 밤거리를 가르며 질주한다. 군데군데 깜빡이는 가로등이 차 안을 순간적으로 비추었다 사라진다. 뒷좌석에 앉은 하은의 얼굴이 밝았다 어두워지길 반복한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다.
"괜찮으십니까?"
태오가 조용히 물었다. 하은은 무언가에 놀란 듯 움찔했다.
"네... 괜찮아요. 그냥..."
말을 마치지 못한 하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전석에 앉은 태오의 기사는 백미러로 뒤를 살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우리 쫓기고 있나요?"
백미러로 운전기사의 표정을 본 하은이 급하게 물었다. 태오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하기 전, 기사가 날카롭게 외쳤다.
"검은 SUV, 두 대. 접근 중입니다."
태오의 눈이 순간 붉게 번쩍였다.
"속도를 높이세요."
차가 급하게 속도를 더욱 올렸다. 하은은 좌석에 더 깊이 붙었다. 붉은 신호등에도 세단은 멈추지 않고 교차로를 통과했다. 클랙슨 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진정해요. 숨을 깊게 쉬세요,"
태오가 하은의 손을 잡았다. 차갑지만 이상하게 안정감을 주는 그의 손길에 하은의 심장박동이 약간 느려졌다.
"저 차들은... 누구죠?"
"새벽의 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세영이 이미 그의 부하들을 부른 모양이군요."
차량이 급커브를 돌자 하은은 문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뒤에서 추격하던 SUV 한 대가 빠르게 접근해 세단의 뒷범퍼를 들이받았다. 충격으로 하은은 앞으로 튕겨나갔다가 안전벨트에 붙잡혔다.
"준비하세요, 이 길을 벗어나야 합니다."
기사가 외쳤다. 태오가 하은을 강하게 붙잡았다. 세단이 갑자기 좁은 골목길로 꺾어 들어갔다. 속도를 급격히 줄인 차는 좁은 골목을 간신히 통과했다. 뒤쫓던 SUV 한 대가 골목 입구에서 멈춰섰고, 다른 한 대는 다른 길로 돌아가려는 듯 멀어져갔다.
"따돌렸나요?"
하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오는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뒤를 살폈다.
"잠깐은요. 새벽의 칼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도시 전체에 감시망을 가지고 있어요."
"저 때문에 이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한 거 같아요."
하은이 미안해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오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당신이 선택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깃들었다.
"내가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반드시."
차는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뒤따르는 차는 없어 보였지만, 긴장감은 여전히 차 안을 채우고 있었다.
숲으로 이어지는 외딴 도로를 한참 달린 후, 세단은 숲 속에 숨겨진 듯한 현대적인 건물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 '달빛 클리닉'이라는 간판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변은 완전히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여긴 진짜 병원인가요?"
하은이 물었다. 태오가 주변을 경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일반 개인 병원처럼 운영됩니다. 실제로는 블루 클랜에서 운영하는 특수 시설이죠."
하은이 창밖으로 어두운 숲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정말로 안전한 곳이 맞나요? 너무... 숲 속인 것 같은데."
"그것이 장점이죠. 외부인의 접근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기사가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다. 그의 움직임은 날카롭고 경계심이 가득했다. 태오는 하은에게 손짓했다.
"서둘러요. 아직 완전히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은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갑자기 숲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가 즉시 그쪽을 향해 방어 자세를 취했고, 태오는 하은을 자신의 몸 뒤로 숨겼다.
"누구냐!"
기사가 외쳤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40대로 보이는 그 남자는 단정한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고, 지친 듯한 눈에도 불구하고 예리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진정해, 미노야. 나다."
그가 손을 들며 말했다. 태오의 긴장이 약간 풀렸다.
"구재혁. 기다리고 있었군."
구재혁이라 불린 의사는 하은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의 시선이 하은의 손목에 고정되었다.
"그럼 이분이..."
태오가 하은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서하은 씨야. 내가 말했던 그 사람이지."
구재혁의 눈이 커졌다. 그의 표정에는 경외감, 두려움, 그리고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정말 믿을 수 없군... 실제로 찾았다니. 전설이 현실이 되었어."
클리닉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하은은 두 남자가 속삭이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그녀야?"
"...달의 표식이 반응했어..."
"...장세훈이 이미 알고 있다면..."
모든 대화가 하은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꼭 박물관의 희귀한 유물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여전히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달빛 클리닉 내부는 일반 병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유난히 조용했다. 하은은 흰색 검사복으로 갈아입고 진찰실에 들어갔다. 주변에는 최첨단 의료 장비들이 즐비했다. 구재혁이 조심스럽게 하은의 팔에서 혈액 샘플을 채취했다. 그 과정 내내 그는 놀라움과 경외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혈액 검사에 동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금 전 클럽에서 있었던 일로 많이 놀라셨을텐데…"
구재혁이 말했다.
"검사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하은은 태오를 바라보았다.
"구재혁 선생님은..."
"뱀파이어입니다."
구재혁이 직접 대답했다.
"블루 클랜의 일원이지만, 저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의학에만 집중하고 있죠. 특히 우리의 저주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저주요?"
구재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불멸을 동경하기도 하죠. 하지만 이건 선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주이기도 합니다. 불멸과 함께 오는 여러 제약들... 햇빛에 취약하고,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는 것 등이요."
태오가 끼어들었다.
"구재혁은 100년 넘게 우리의 상태를 치료하려는 연구를 해왔어요. 그는 내 오랜 친구이자 믿을 수 있는 동료죠."
얼마 후, 구재혁이 검사 결과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믿을 수 없군요."
그가 태오와 하은 앞에 검사 결과지를 펼쳐 보였다.
"서하은 씨의 혈액 샘플은... 330년 전 첫 번째 의식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특성을 보이고 있어요!"
하은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구재혁이 설명했다.
"우리는 최초의 뱀파이어 의식에 대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 의식에 사용된 특별한 혈액의 성분 분석이 보존되어 있었죠. 하은 씨의 혈액은 그것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건 서월의 피..."
태오가 중얼거렸다. 하은이 놀라서 태오를 쳐다보았다.
"지금 서월이라고 했어요? 할머니 일기장에 서월이라고 씌여있었어요!"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서월은 당신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첫 번째 의식에 참여했던 사람이었죠."
구재혁이 스크린에 몇 가지 데이터를 더 표시했다.
"하은 씨의 혈액에는 일반적인 인간에게는 없는 특수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뱀파이어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의 저주를 일부분 일시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구재혁이 검사 결과를 정리하고 자리를 비운 후, 태오는 하은과 단둘이 남았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밤하늘에는 거의 차오른 달이 걸려 있었다.
"많이 혼란스러울 거예요. 이해합니다."
태오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어요. 제가 특별한 혈통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게 왜 이렇게 중요한 건가요? 왜 사방에서 저를 찾고 있는 거죠?"
태오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의 선택이 뱀파이어 세계 전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선택이요?"
"곧 월식이 있을 겁니다. 그 때가 모든 것이 결정되는 순간이 될 거예요. 장세훈은 당신의 피를 이용해 모든 뱀파이어를 지배하려 할 것이고, 새벽의 칼은 당신의 피로 우리를 멸종시키려 할지도 모릅니다."
하은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건... 당신이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곁에서 도울 겁니다."
태오가 자신의 가방에서 긴 케이스를 꺼냈다. 그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하은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보여드릴게요. 아마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태오가 케이스를 열자, 그 안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우아한 단검이 있었다. 그 손잡이에는 달 모양 장식이 있었고, 날카로운 칼날에는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하은의 숨이 멈췄다.
"이건..."
"월식의 비수입니다. 정확히는 두 개 중 하나죠."
하은이 몸을 움찔했다.
"두 개요?"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월식의 비수는 두 개입니다. 하나는 치유의 비수, 다른 하나는 지배의 비수. 이것은 치유의 비수입니다. 다른 하나는... 장세훈이 가지고 있어요."
하은은 일기장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그래서 일기장에 '월식의 비수가 운명을 가르리라'고 적혀 있었군요."
태오가 비수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 순간, 하은의 손목에 있는 달 모양 흉터가 다시 한번 빛나기 시작했다. 비수 역시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보세요."
태오가 경외감을 담아 말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달의 표식과 비수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은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비수에 가까이 가져갔다. 비수가 그녀의 손에 가까워질수록 더 밝게 빛났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 얽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태오가 진지하게 말했다.
태오가 비수를 케이스에 다시 넣고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실루엣이 달빛에 비쳐 더욱 선명해 보였다.
"하은 씨, 제가 지금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직은... 위험해요."
하은이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전 알아야 해요. 이건 제 인생이니까요."
태오가 천천히 돌아서서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300년의 세월이 담긴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300년 전, 저는 조선의 평범한 무관이었습니다. 어느 날 서월을 만났는데, 그녀는 장세훈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죠. 장세훈은 첫 번째 의식에서 서월의 피를 이용해 뱀파이어가 되었고, 더 많은 힘을 위해 그녀를 다시 찾고 있었습니다."
하은은 숨을 죽이며 듣고 있었다.
"저는 서월을 보호하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장세훈은 우리를 찾아냈고, 저는 그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서월은 희생되었고, 저는 장세훈에 의해 뱀파이어가 되었죠."
하은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제… 운명도…?"
태오가 급히 하은에게 다가왔다.
"아니요.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300년 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하은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단순한 약속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건너온 다짐이었다.
하은은 창밖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이제 완전히 높이 떠올랐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태오가 대답했다.
"당분간은 여기 머무는 게 좋겠습니다. 달빛 클리닉은 안전해요. 구재혁이 당신을 보호할 것이고, 나도 가능한 한 자주 들를게요."
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제 일상은요? 제 직장, 제 집..."
"지금은 위험합니다. 블랙 클랜도, 새벽의 칼도 당신을 찾고 있어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제가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 테니까요."
하은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언제까지 그냥 숨어만 있을 수는 없어요. 제 능력, 혈통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그리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돕고 싶어요."
태오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생전에 늘 '네 피는 특별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제 그 의미를 알게 됐으니, 그냥 숨어있을 수는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어요."
태오의 표정이 복잡했다. 걱정과 존경이 뒤섞여 있었다.
"좋습니다. 함께 방법을 찾아보죠. 하지만 약속해주세요.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
달빛 클리닉 외부,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건물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세영이었다. 그는 작은 망원경으로 클리닉의 창문을 살펴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몸을 숙였다. 손에 든 통신 장치로 누군가에게 보고를 했다.
"맞습니다. 그들이 여기 있습니다. 서하은과 강태오가 함께 있어요."
통신 장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켜보기만 해. 아직 행동하지 마."
오세영이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의 방법인지..."
"질문하지 마라. 지시대로만 해."
오세영이 통신을 끊고 다시 클리닉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차갑고 굳은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하은은 비어있는 방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태오는 구재혁과 함께 연구실로 향했다.
"더 자세한 검사가 필요해. 그녀의 혈액이 갖는 모든 특성을 알아야 해."
구재혁이 말했다.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 하지만 조심하게. 그녀는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니야."
구재혁이 태오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나?"
태오가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녀는... 내가 사랑했던 서월과는 다른 존재야. 하지만 그녀의 용기, 그녀의 결단력... 서월의 정신이 그녀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느껴."
"조심해, 태오. 과거의 그림자에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안 돼."
태오가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 300년이란 시간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어."
구재혁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새로운 법이지. 심지어 뱀파이어에게도."
태오가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지금 중요한 건 그녀를 지키는 일이야. 월식이 다가오고 있어. 그때 장세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해."
두 사람은 창밖으로 보이는 달을 바라보았다. 곧 다가올 월식과 그것이 가져올 운명의 변화를 예감하며.
하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서월… 마지막 치유자..."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목에 있는 달 모양 흉터가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