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덜터덜.
레드 벨벳으로 향하는 하은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달의 표식이 당신을 구하지는 못할 거예요.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어젯밤, 퇴근하는 내내 민서아가 남기고 간 경고만 귓가에 맴돌았다. 달의 표식. 그녀도 이걸 알고 있었다. 여전히 그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생각에 빠진 채 걷다 보니, 어느 새 클럽 앞에 도착했다. 하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신차려. 서하은. 일하자! 일!'
일에만 집중하자고 했는데, 자꾸만 클럽 입구를 쳐다보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은도 그런 자신이 이상했지만 시선이 자꾸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남자는 온다고 해놓고... 왜 안 오는 거지?'
하은은 계속 태오가 오지 않는 것을 신경쓰고 있었다. 그래, 그를 알게 된 지 이제 고작 3일이다. 알고 있다. 그가 약혼을 했던, 결혼을 했던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근데 도대체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지? 알 수가 없다.
"하은 씨, VIP 2번방 주문~"
동료의 말에 하은은 순간 정신이 들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일 할 땐 일에 집중해야지.
"어떤 거요?"
"샴페인 한 병이랑 시그니처 세 잔이요. 오늘도 강태오 씨 오셨네요. 후후~ 볼 때마다 안구정화가 된다니까요~"
'강태오가 왔다고? 언제 왔지?'
두근두근. 하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순간 민서아의 경고가 떠올랐지만, 일단 그를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알았어요. 이건 제가 직접 가져다드릴게요."
하은은 그 즉시, 바쁘게 손을 놀린다. 얼른 이 남자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블러드 문'을 만드는 손길이 분주해졌다. 빠르게 준비를 마친 하은은 트레이에 칵테일과 샴페인을 올리고 VIP룸으로 향했다. 왜 일까? 마음이 무거웠다.
VIP 2번방 앞에 도착한 하은은 멈칫했다. 노크를 하려 했는데,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태오의 목소리가 열린 문 틈새로 새어나왔다. 다시 노크를 하려던 하은의 손이 멈췄다.
"무조건...그녀의 안전이 최우선이야."
"장세훈이 이미 그녀의 흔적을 찾았어. 마지막 치유자의 혈통을 찾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
태오의 말에 다른 남자가 대답을 했다. 하은은 숨을 멈췄다.
'마지막 치유자'
그 날 새벽에 태오가 골목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남긴 일기장에서도 있었다.
"절대 이번에는 놓치지 않아. 반드시 그녀를 지킨다."
태오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굳은 의지가 담겨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월식의 비수를 장세훈에게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 말을 들은 하은은 큰 눈을 깜빡였다. '월식의 비수'. 이것도 일기장에 있었다. 그리고 지도도 있었다. 분명, 숨겨진 곳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걸 가지고 있는 거 같다. 하은은 점점 열린 문틈 사이에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물론, 엿듣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두 남자의 대화는 자신에 대한 내용 같았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고 민서아 조심해. 어제 그녀에게 접근했다고 보고가 올라왔어."
하은의 눈이 커졌다. 다른 남자가 바로 대답했다.
"민서아는 질투심이 강하지. 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아는 여자야. 선을 넘지는 않을 거야."
"글쎄. 장담할 수 있어? 장세훈은 그녀를 통해서도 움직일 수 있어. 그녀는 블랙클랜의 공주야. 그걸 잊어서는 안 돼."
다른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진짜 이번엔 다를 수 있을까... 300년 전처럼 또 실패할 수도 있어. 대비는 해둬야 해."
그의 말에 태오는 날 선 목소리로 반응했다.
"아냐. 이번엔 달라. 반드시 지킬 거야."
하은은 점점 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300년 전? 지킨다고? 실패해? 분명 자신에 대한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는 내용 투성이었다.
그 때,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깜짝 놀란 하은은 뒷걸음질 쳤다. 들고 있던 트레이가 휘청거렸다. 블러드 문 한 잔이 흔들거리면서 쏟아질 뻔 했다. 문 앞에는 태오가 아닌 다른 남자, 이준호가 서 있었다. 언뜻봐도 180cm가 넘는 키에 완벽하게 조각된 거 같은 이목구비, 역시나 새하얀 피부. 태오만큼 매력적이고 멋진 남자였다. 그의 짙은 밤색 머리카락은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새까만 눈동자는 하은을 날카롭게 관찰했다.
"들어오시죠."
냉랭하고 경계하는 듯한 이준호의 목소리는 하은이 대화를 엿들었다는 것을 아는 듯이 들렸다. 하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착하려 애쓰며 말했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하은은 트레이를 들고 VIP룸 안으로 들어섰다. 안 쪽 벽에 기대어 있는 태오가 보였다. 그 날 바에서 봤을 때처럼 어두운 컬러의 슈트를 입은 그는 마치 화보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하은 씨."
태오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게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 참 좋았다. 룸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 살포시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나가야했다. 하지만 하은은 그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알아야 했고, 알고 싶었다.
"엿들어서 죄송해요... 그치만, 저에 대한 이야기였죠? 지난 번부터 강태오씨가 말씀하신 '마지막 치유자', 이게 대체 뭐죠?"
서로 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태오와 이준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일단, 앉으세요."
침묵을 깬 태오가 말했다. 하은은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여전히 이준호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을 다 말씀해드릴 순 없어요. 자칫 당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태오가 그녀 앞에 있는 테이블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하지만 하은은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고 계시는 거 같지만, 민서아라는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그녀는 제 흉터를 보고 '달의 표식'이라고 했어요. 근데 그 단어는 할머니가 남긴 일기장에도 있었어요."
순간, 태오의 눈이 커졌다.
"지금 일기장이라고 했습니까?"
"네. 집에서 찾았어요. 아주 오래된 거 같은데, 의녀라고 씌여있었어요. 말씀하고 계셨던 '월식의 비수'와 '마지막 치유자'에 대한 내용도 있었어요."
그 때,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준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일기장 지금 어디있나요? 갖고 있나요?"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 탈의실에요. 가방에 있어요."
하은의 대답에 태오와 이준호는 동시에 표정이 바뀌었다. 무언가 놀랍고 흥분된 표정 속에는 두려움도 보이는 것 같았다. 태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하은을 결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당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이제 아실 것입니다."
"네, 그리고 뱀파이어가 실존한다는 것도 알고 있죠."
태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생각보다 받아들이시는 것이 빠르시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날 있었던 일은 꿈이 아니니까요. 아무튼, 그 '마지막 치유자'는 뭐고, 왜 제가 그거라는 거죠? 또 장세훈은 누구예요? 왜 저를 찾는 거죠? 죄송해요. 이것도 아까 들었어요."
하은의 숨가쁜 질문에 태오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하은 씨. 당신은 특별한 혈통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는... 뱀파이어에게 아주 특별합니다."
"제 피가 왜요? 어떤데요?"
태오는 잠시 고개를 들어 이준호를 바라보았다. 이준호는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이었지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직접 보시는 것이 낫겠군요."
그는 슈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은색의 단검은 조명빛에 반짝거렸다. 태오는 그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피가 흘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하은은 놀래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태오는 침착하게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뱀파이어는 다쳐도 금방 낫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은으로 생긴 상처는 회복이 더뎌요."
하은은 상처를 바라보았다. 아주 서서히 상처가 아무는 거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골목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십니까? 당신은 제 팔에 난 상처를 순식간에 낫게 했죠. 물론, 그건 단순한 상처였지만, 이렇게 은으로 입은 상처는 다릅니다."
그래, 분명 그녀를 구하다가 상처를 입었었다. 그리고 자신의 흉터에서 이상한 빛이 나왔고, 그 빛은 그의 상처로 흘러들어 갔다. 그리고 상처는 없어졌다. 생각에 잠긴 하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며 태오가 다시 말했다.
"이제 당신의 흉터가 있는 손을 여기, 제 상처에 대볼래요?"
하은은 주저했다. 그런데 또 다시 그녀의 손목 달 모양 흉터가 화끈거린다. 마치 태오의 상처에 이끌리듯이 말이다. 아주 천천히 그녀는 자신의 손을 뻗어 피가 묻은 태오의 손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 때 보았던 그 빛이 다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한 번 경험을 했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빛은 그 때처럼 태오의 상처에 흘러들어갔고, 없어지지 않고 있던 상처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건... 대체..."
하은은 놀라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피와 치유 능력은 뱀파이어에게 매우 특별합니다."
태오는 다정한 눈으로 하은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예상하겠지만 우리 뱀파이어는 불멸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치유력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은이나 또 어떤 나무에는 취약하죠. 하지만, 당신은 우리의 그런 약한 부분을 도와줍니다. 또, 우리의 저주를 잠시 완화시킬 수도 있지요."
하... 그래 이건 현실이야. 하은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으로 하은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알 건 다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장세훈이란 사람이 저를 찾고 있는 건가요?"
이준호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보였다.
"당신의 피로 자신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드려는 거죠. 블랙 클랜의 족장인 그는 모든 클랜을 자신의 손아귀 안에 넣기를 원하고 있어요."
"음... 클랜이요?"
태오가 설명을 이어갔다.
"쉽게 설명을 하면 우리 뱀파이어 세계는 세 개의 부족 같은 걸로 되어 있어요. 그것을 '클랜'이라 합니다. 블랙 클랜은 가장 오래 되었고, 또 가장 보수적이죠. 자신들의 전통, 순수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을... 얕보기도 하지요. 그리고 블루 클랜이 있습니다. 중도를 지키고 있다고 보면 되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들은 학문의 발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제가 소속되어 있었던 곳이죠. 마지막 레드 클랜은 인간과 함께 어우러지기를 원하는 진보적인 집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때, 이준호가 끼어들었다.
"서하은 씨는 몰랐겠지만, 여기 '레드 벨벳'은 완전한 중립 지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당신이 이 클럽에서 안전할 수 있었고요.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갑자기 자신의 세상에 들이닥친 뱀파이어라는 존재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이어져 쏟아지는 정보들로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말은 안 되지만 믿을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세계가 분명 펼쳐지고 있었다.
"그럼 그 여자, 민서아는요? 그녀도 뱀파이어인거죠?"
태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민서아는 블랙 클랜의 주요 인물입니다. 그리고... 저와 오랜 인연이 있기도 하죠."
'약.혼.자'
이 단어가 하은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일단,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럼... 이제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시다시피 전 그냥 바텐더예요."
하은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목소리가 떨려왔다.
"제가 당신을 보호합니다. 반드시. 약속드립니다."
-—————————-
그 순간, VIP룸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지민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태오 님! 이준호 님! 클럽에 이상한 사람들이 들이닥쳤어요!"
하은은 얼어붙었다. 갑자기 클럽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새벽의 칼..."
이준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요?"
하은가 물었다.
"뱀파이어 헌터들이에요."
태오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차분했던 눈빛이 위험한 날카로움을 띠었다.
"하은 씨를 보호해."
그가 이준호에게 명령했다. 이준호는 즉시 하은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이곳을 찾은 거지?"
태오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은은 그 변화를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여기 있으세요."
이준호가 하은의 팔을 잡았다. 그의 손길도 태오처럼 차가웠다.
태오가 문을 향해 움직이려는 순간, 문이 다시 열렸다. 검은 코트를 입은 세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특별한 디자인의 무기—은으로 만든 듯한 단검—가 들려 있었다.
"강태오."
앞장선 남자가 말했다. 그는 40대 중반으로 보였고,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회색빛 머리카락이 특징적이었다.
"오세영."
태오가 그를 알아보는 듯했다.
"오랜만이군. 아직도 그 무의미한 사냥을 계속하고 있나?"
오세영이라 불린 남자가 비웃었다.
"무의미하다고? 너희 같은 괴물들을 사냥하는 게?"
그의 시선이 하은에게 향했다.
"그리고 당신이 서하은 씨군요. 당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이 괴물들 사이에서?"
하은은 말없이 이준호의 뒤로 물러섰다. 그녀에겐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내 보호 아래 있다."
태오의 목소리가 낮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이곳은 중립 지대. 당신들의 방해는 협정 위반이야."
오세영이 웃었다.
"협정? 너희가 인간을 공격했을 때 이미 깨진 거 아닌가?"
"무슨 소리지?"
태오의 표정이 혼란스러워졌다.
"어젯밤, 한 여성이 피를 모두 빼앗긴 채 발견됐어. 레드 벨벳 뒷골목에서."
하은은 숨을 멈췄다. 클럽 화장실에서 쓰러졌던 그 여성이 떠올랐다.
태오가 놀란 듯이 이준호를 쳐다보았다. 이준호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우리의 소행이 아니야."
태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
오세영이 단검을 들어올렸다.
"이제 협상은 끝났어. 네 정체를 드러낼 시간이다, 괴물."
그가 갑자기 태오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태오는 놀라운 속도로 몸을 피했다. 단검은 그의 어깨를 스쳐 벽에 박혔다.
다음 순간, 태오의 모습이 완전히 변했다. 그의 눈은 완전히 붉게 변했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의 손톱은 길고 날카롭게 변했다.
하은은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이준호가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위험해요."
거실에서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태오의 움직임은 인간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방 안을 움직이며 헌터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헌터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은 듯했다. 태오의 공격을 예측하고 방어하며, 때로는 반격도 했다.
오세영이 갑자기 하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준호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태오는 나머지 두 명의 헌터와 싸우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우아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하은 씨!"
태오가 그녀를 부르며 외쳤다.
"도망치세요! 지금 당장!"
하은은 혼란스러워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 주변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이준호가 오세영에게 강하게 밀쳐졌다. 오세영은 순간적인 틈을 놓치지 않고, 단검을 꺼내 이준호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아니!"
하은이 소리쳤다. 이준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무릎을 꿇었다. 은빛 단검이 그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태오가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오세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놀라운 힘으로 오세영을 벽에 밀쳐붙였다. 오세영의 목을 움켜쥔 태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멈춰요!"
하은이 외쳤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준호에게 달려가 그의 상처를 살폈다. 단검은 생각보다 깊게 박혀 있었다.
"뽑으세요..."
이준호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은은 떨리는 손으로 단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뽑아냈다. 이준호가 신음을 내뱉었다.
"도와드릴게요."
하은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손을 이준호의 상처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목에 있는 달 모양 흉터가 다시 한번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이 이준호의 상처로 흘러들어갔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태오는 오세영을 바닥에 던지고 다른 두 헌터들도 제압했다. 그는 빠르게 하은과 이준호에게 달려왔다.
"괜찮아?"
태오가 이준호에게 물었다. 이준호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싫어하는 인간에게 구해지다니, 참 역설적이군."
이준호가 고통스럽게 웃었다.
하은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녀는 실제로 뱀파이어의 상처를 치유했다. 그것도 은빛 단검으로 인한 상처를.
"당신의 능력이 정말 놀랍군요."
태오가 경외감 어린 눈빛으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해하겠어요?"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왜 이렇게 중요한지, 왜 위험에 처해 있는지 이해했다. 그녀의 능력은 뱀파이어 세계에서 대단히 귀중한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여기를 떠나야 해요."
태오가 말했다. 그는 이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단지 그의 눈빛만이 여전히 위험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더 많은 헌터들이 올 거예요. 그리고 이 소란이 블랙 클랜에게도 알려질 테니까요."
하은은 망설였다.
"하지만 클럽은요? 다른 손님들은?"
"이준호의 부하들이 알아서 할 거예요. 당신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태오가 하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길은 차가웠지만, 하은에게는 이상하게도 안전하게 느껴졌다.
"저를 믿으세요."
하은은 잠시 생각했다. 그녀의 평범했던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도망치거나, 이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하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태오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부터, 당신은 이미 저의 보호 아래 있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수백 년의 약속이 담겨 있었다. 하은은 그 무게를 느꼈다.
"내 차가 뒷문에 대기하고 있어요."
태오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이준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하은의 치유 능력 덕분에 그의 상처는 거의 다 아물어 있었다. 오세영과 다른 헌터들은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태오는 그들을 살펴보았다.
"죽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곧 깨어날 거예요."
하은은 클럽 안의 소음이 이상하게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태오가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설명했다.
"이준호의 부하들이 손님들을 잘 정리하고 있나 봅니다. 걱정말아요."
그는 하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요."
하은은 태오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그녀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평범한 바텐더로서의 삶을 뒤로하고, 전혀 다른 세계로 발을 내딛는 것이었다. 태오와 하은, 그리고 이준호는 VIP룸 뒤쪽에 있는 비상구를 통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 검은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내 개인 운전기사예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죠."
태오가 말했다. 이준호는 태오에게 작게 귓속말을 했다. 하은은 그 내용을 정확히 들을 수 없었지만, 이준호의 표정이 여전히 우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걱정 마. 내가 책임질게."
태오가 대답했다.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태오는 하은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하은이 막 타려는 순간, 태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하은 씨."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지금부터 당신이 마주하게 될 세계는 위험하고 복잡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드립니다."
태오의 눈빛이 깊어졌다.
"제가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은은 그의 말뜻을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그의 진심을 느꼈다.
"믿을게요."
그녀는 마침내 대답했다. 차에 오른 그들은 서울의 밤거리를 빠르게 통과했다. 하은은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녀의 세계는 단순했다. 칵테일을 만들고, 손님들을 응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앞에는 뱀파이어와 클랜, 마지막 치유자와 월식의 비수, 그리고 그녀의 피를 원하는 위험한 존재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300년을 살아온 뱀파이어 강태오가 있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죠?"
하은이 마침내 침묵을 깨고 물었다. 태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하은이 전에 본 적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보호하려는 마음, 그리고 더 깊은 무언가.
"달빛 클리닉이라는 곳이 있어요. 블루 클랜에서 운영하는 비밀 병원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을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거예요."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했다. 그녀의 과거, 그녀의 능력,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이 모든 비밀들.
차는 계속해서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지역으로 향했다. 하은은 창밖으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거의 보름달에 가까웠다. 일기장에 적혀 있던 내용이 생각났다. '보름달이 붉게 물드는 날, 월식의 비수가 운명을 가르리라...'
"달이 거의 차올랐네요."
하은이 중얼거렸다. 태오도 달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긴장되었다.
"그래요. 몇 주 후면 월식이 있을 거예요. 그때가 가장 위험할 겁니다."
하은은 갑자기 느껴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태오는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무슨 뜻이에요?"
태오의 눈에 깊은 슬픔이 스쳤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그저 당신이 안전하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차는 계속해서 어둠 속을 달렸다. 하은은 자신이 지금 어떤 운명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의 평범한 삶은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위험하고 신비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은은 자신의 손목에 있는 달 모양 흉터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그것이 단순한 선천적 흉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달의 표식'이었다. 그녀의 운명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마지막 치유자.
그녀는 이제 그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태오가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더 단단하게.
"함께할겁니다."
그의 말에 하은은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이 낯설고 위험한 세계에서 그는 그녀의 유일한 안내자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달빛이 차 안으로 비춰들었다. 그 빛 속에서 태오의 얼굴은 더욱 완벽하게 보였다. 300년의 세월이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지금 오직 하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