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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잡히지 않는 환상

by 해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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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하은의 눈이 떠졌다. 아니, 정확히는 서월의 눈이었다.

그녀는 조선시대 궁궐의 한적한 뜰에 서 있었다. 달빛이 하얗게 내려앉은 돌마당 위에는 붉은 피로 그려진 복잡한 문양들이 있었다. 하은은 서월의 몸 안에서 모든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차가운 밤공기, 손끝의 떨림, 그리고 가슴을 조여오는 두려움까지.


"의녀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하얀 도포를 입은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서월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을 때, 하은은 그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장세훈이었다. 인간이었을 때의 그는 지금과는 달리 온화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 깊숙한 곳에서는 이미 욕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월식이 시작됩니다. 이제 의식을 거행할 수 있어요."


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은은 서월의 마음을 그대로 느꼈다. 그녀는 이 의식이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역병을 막고,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라고.


"비수는 준비되었나요?"


서월의 목소리로 하은이 물었다. 장세훈이 비단에 싸인 두 개의 비수를 꺼내 보였다. 하나는 은빛으로 빛나는 치유의 비수, 다른 하나는 검은빛이 도는 지배의 비수였다.


"네, 의녀님. 하지만...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세훈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의 눈에서 인간다운 온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의식을 위해서는 특별한 희생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피 몇 방울로는 부족해요."


서월의 몸이 움찔했다. 하은은 그녀의 불안감을 고스란히 느꼈다.


"무슨... 무슨 뜻인가요?"

"의녀님의 모든 피가 필요합니다. 생명까지도."


그 순간, 서월은 깨달았다. 이것은 백성을 위한 의식이 아니었다. 장세훈 자신을 위한, 불멸의 힘을 얻기 위한 사악한 의식이었다.


"안 돼요...!"


서월이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도포를 입은 남자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그녀를 둘러쌌다.


"저항하지 마세요, 의녀님. 당신의 희생으로 저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이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을 거예요."


장세훈이 지배의 비수를 들어올렸다. 달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서월의 얼굴을 비췄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하은의 목소리가 서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순간, 환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은 씨! 하은 씨!"


태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은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는 달빛 클리닉의 침대에 누워 있었고,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괜찮아요?"


태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재혁도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서월... 서월을 봤어요."


하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300년 전 의식... 장세훈이 속였어요. 서월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게 아니었어요. 그는 그녀를 속여서..."


태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손이 주먹으로 움켜쥐어졌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네. 서월은 백성을 위한 의식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하지만 장세훈은 처음부터 자신의 불멸을 위해 그녀를 이용할 계획이었어요."


구재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최초의 의식 기록들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뜻이군. 장세훈이 역사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아."


태오는 창가로 걸어가 주먹으로 벽을 쳤다. 벽에 금이 갔다.


"300년 동안... 나는 서월이 자발적으로 희생했다고 믿었어. 그녀가 숭고한 뜻을 품고 의식에 참여했다고..."

"태오 씨..."


하은이 침대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라도 진실을 알게 된 거예요. 서월은 희생자였어요. 당신이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어요."


태오가 돌아서서 하은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300년 동안 쌓인 고통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당신의 능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어요. 이제는 과거의 진실까지 볼 수 있게 되었네요."

"무서워요."


하은이 솔직하게 말했다.


"계속 이런 환상을 봐야 하는 건가요? 서월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면서요?"


유채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마도 월식이 가까워질수록 더 자주, 더 강하게 경험하게 될 거예요. 그게 달의 표식이 가진 힘이거든요."


그때 구재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더니 표정이 심각해졌다.


"응... 알겠어. 즉시 보고하겠어."


전화를 끊은 구재혁이 모두를 바라봤다.


"이준호에게서 온 연락이야. 새벽의 칼 헌터들이 달빛 클리닉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고 해. 이미 이 일대를 포위했을 가능성이 높아."


태오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알 수 있나?"

"약 500미터 정도로 추정돼. 아직 공격하지는 않고 있지만, 시간문제인 것 같아."


하은이 갑자기 일어섰다.


"집에 가야 해요."

"뭐라고요?"


태오가 놀라며 물었다.


"할머니가 남긴 물건들이 더 있어요. 아까 환상에서 본 건데, 서월이 뭔가를 숨겨둔 것 같아요. 그걸 찾아야 해요."

"너무 위험해요. 새벽의 칼이 당신의 집도 감시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도 가야 해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단서가 거기 있을지도 몰라요."


하은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태오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혼자 가는 건 절대 안 돼요. 내가 함께 가겠어요."


구재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차라리 다른 방법을..."

"시간이 없어요."


하은이 단호하게 말했다.


"환상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요. 월식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해요."


유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은 씨 말이 맞아요. 우리도 시간에 쫓기고 있어요."


태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해요. 새벽의 칼에게 들키면 끝이에요."


한 시간 후, 태오와 하은은 조심스럽게 달빛 클리닉을 빠져나왔다. 구재혁이 마련해준 일반 승용차를 타고 서울 시내로 향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운전대를 잡은 태오가 물었다.


"아직 어지러운 것 같은데..."

"괜찮아요. 오히려 환상이 더 생생해지고 있어요. 서월의 기억들이 계속 떠올라요."


하은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의식에 참여했는지, 장세훈에게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는지... 모든 게 생생해요."

"힘들 거예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직접 경험한다는 건..."

"하지만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왜 서월이 비수를 둘로 나누었는지, 왜 이렇게 복잡한 저주를 만들어낸 건지..."


태오가 잠시 하은을 바라봤다.


"당신은 서월과 다른 사람이에요. 그녀의 기억에 휘둘리지 마세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의 의지를 이어받고 싶어요. 장세훈의 계획을 막는 것, 그게 서월이 진짜 원했던 일이에요."


차는 조용한 주택가로 들어섰다. 하은의 집이 있는 동네였다. 평소보다 한산해 보였다.


"뭔가 이상해요."


태오가 중얼거렸다.


"너무 조용해요. 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이 없을 리가..."


그들이 하은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태오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집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여러 차량들이 이상한 위치에 주차되어 있었다.


"감시받고 있는 것 같아요."


하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들어가야 해요."


태오가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뱀파이어적 감각이 위험을 탐지하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요. 15분 이상 머물면 안 될 것 같아요."


하은의 집 문을 열자마자, 두 사람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집 안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이미 다녀갔네요."


태오가 경계하며 말했다.

거실의 가구들은 모두 뒤져진 상태였고, 서랍들은 모두 열려 있었다. 하은의 할머니가 남긴 상자들도 흩어져 있었다.


"할머니의 방을 확인해봐야겠어요."


하은이 서둘러 안쪽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방은 더욱 심하게 뒤져져 있었다. 옷장은 열려 있었고, 침대 밑까지 모든 곳이 뒤엎어져 있었다.


"뭘 찾은 걸까요?"

"아니면 찾지 못해서 이렇게 된 것일 수도 있어요."


태오가 신중하게 말했다.

하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오래된 화장대로 향했다. 화장대의 거울은 깨져 있었지만, 서랍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이상해요. 여기만 안 뒤진 것 같아요."


하은이 화장대 서랍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서랍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맨 아래 서랍을 열었을 때, 그녀는 숨겨진 공간을 발견했다.


"여기 뭔가 있어요!"


서랍 바닥에 숨겨진 작은 칸에서 낡은 천에 싸인 물건이 나왔다. 하은이 조심스럽게 천을 풀어보니, 그 안에는 작은 은빛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목걸이의 펜던트는 달 모양이었고, 그 중앙에는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하은이 목걸이를 손에 대는 순간, 그녀의 손목 흉터가 반응했다.


"이건..."


갑자기 하은의 머릿속에 서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을 찾았구나. 이제 진짜 비밀을 알 수 있을 거야.'


"태오 씨, 이거 봐요!"


하은이 흥분해서 태오에게 목걸이를 보여주려던 순간이었다.


쾅!


갑자기 창문이 박살나며 검은 그림자가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태오가 반사적으로 하은 앞을 막아섰다.


"누구야!"


태오가 경계하며 외쳤다. 그의 눈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긴 검은 머리카락과 우아한 몸매, 그리고 아름답지만 차가운 얼굴. 그녀는 우아하게 먼지를 털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강태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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