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야경이 발아래 깔린 강남의 초고층 펜트하우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붉고 푸른 네온사인이 혈관처럼 얽혀 박동하고 있었다.
장세훈은 크리스털 잔에 담긴 붉은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 와인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점도가 높고, 비릿하며, 매혹적인 철분 향을 풍기는 것.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원탁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일렁였다. 블랙 클랜의 장로들이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들이었지만, 장세훈 앞에서는 그저 숨죽인 짐승에 불과했다.
"마지막 치유자를 찾았습니다."
장세훈의 낮은 목소리가 펜트하우스의 적막을 갈랐다. 장로들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그녀의 피는 단순히 병을 고치는 수준이 아닙니다. 330년 전, 내가 가졌어야 할 완전한 힘. 그리고 우리를 어둠 속에 가둬둔 저주를 풀 열쇠가 그녀에게 있습니다."
장세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에 비친 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제 곧 태양 아래서 걷게 될 것입니다. 인간을 먹이로 삼는 밤의 제왕이 아니라, 낮과 밤을 모두 지배하는 신이 되는 겁니다. 월식이 오기 전, 그녀를 내 앞에 데려다 놓으십시오."
잔에 담긴 피를 단숨에 들이킨 장세훈이 입가에 흐른 붉은 자국을 닦아내며 웃었다. 송곳니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
"틀렸어요. 다시."
유채린의 목소리는 매정할 정도로 단호했다.
달빛 클리닉 지하 3층에 마련된 특수 훈련실.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차가운 공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아... 하아..."
손끝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제멋대로 날뛰는 느낌이었다. 마치 몸속에 갇혀 있던 뜨거운 용암이 출구를 찾아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피의 흐름을 느끼는 건 감각적인 영역이에요. 머리로 계산하려고 하지 마요."
채린은 팔짱을 낀 채,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하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칵테일 만들 때 레시피를 달달 외워서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쉐이커 안의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 술이 섞이는 무게감... 그런 걸 느끼죠? 이것도 똑같아요."
"하지만... 너무 뜨거워요. 제 몸이 타버릴 것 같아요."
하은이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피를 제어하려고 할 때마다 명치끝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가 감당하기 힘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에너지였다.
"당연하죠. 당신 피는 우리에겐 태양 그 자체니까. 그 힘을 밖으로 끄집어내려면 혈관이 비명을 지르는 건 감수해야죠."
채린이 하은의 눈앞으로 다가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집중해요. 그 고통을 리듬으로 바꿔요. 당신이 가장 잘하는 거잖아."
하은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눈을 감았다.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쿵쿵 울렸다. 쿵, 쿵, 쿵.
그녀는 자신의 피가 뜨겁게 순환하는 감각에 집중했다. 공포, 혼란, 그리고 태오를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 그 모든 감정이 붉은 액체에 녹아들었다.
'리듬... 그래, 쉐이커를 흔들 때처럼...'
제멋대로 날뛰던 열기가 조금씩 정돈되기 시작했다. 하은은 손바닥을 천천히 펼쳤다. 손끝의 감각이 예민해지며 공기의 흐름조차 느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하은의 손바닥 위로 작은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은은하지만 분명한, 달빛을 닮은 은색 입자들이 춤을 추듯 회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라지지 않았다.
"좋아요! 바로 그거예요."
채린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피는 뱀파이어에게는 마약이자 독이에요. 치유할 수도 있지만, 의지에 따라서는 놈들의 세포를 태워버릴 수도 있죠. 그 '태우는 감각'을 절대 잊으면 안 돼요. 민서아 같은 미친 여자랑 또 마주치면, 유리 조각 따위가 없어도 스스로를 지켜야 하니까."
하은은 떨리는 손을 주먹 쥐며 빛을 거두었다. 자신의 피가 누군가를 해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끔찍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힘없는 선의는 무능일 뿐이라는 것을.
끼익-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태오가 들어왔다. 그는 땀에 젖어 창백해진 하은을 보자마자 미간을 좁혔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아요. 쉴 시간 없잖아요."
하은이 애써 밝게 웃으며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태오는 한숨을 삼키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훈련용 목검과 은으로 도금된 단검이 들려 있었다.
"채린이가 피의 힘을 가르친다면, 나는 당신이 육체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칠 겁니다."
태오는 단검을 하은에게 건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눌렀다.
"뱀파이어의 약점은 심장과 목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빠르고 강하죠. 인간의 반사 신경으로 놈들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팟!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태오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눈 깜짝할 새에 하은의 등 뒤로 돌아간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가슴, 정확히 심장 부위에 단검 끝을 갖다 댔다.
"망설이지 말고 찌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은의 눈이 커졌다. 단검 끝으로 태오의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물론 뱀파이어인 그의 심장은 뛰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온기가 그녀를 전율하게 했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을 만큼.
"어떻게... 제가 태오 씨를..."
"나를 찌르라는 게 아닙니다. 나 같은 놈들이 당신을 위협할 때, 그게 누구든, 설령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망설이면 당신이 죽습니다."
태오의 갈색 눈동자는 슬프도록 진지했다.
"상대가 민서아든, 장세훈이든, 아니면... 이성을 잃은 나든."
하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오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고 있었다. 300년 전, 자신의 검으로 서월을 지키지 못했던 트라우마가 그를 이토록 가혹하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하은에게 살인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여서라도 살아남으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약속해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하은이 단검을 천천히 내리며 태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지킬게요. 태오 씨가 저를 지키는 것처럼, 저도 태오 씨가 괴물이 되지 않게 지킬 거예요. 제 피로... 당신을 다시 찾을 거예요."
태오의 굳어있던 표정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하은의 뺨을 감싸 쥐었다. 300년의 고독을 위로받은 듯한 눈빛이었다.
"당신은... 정말 강하군요."
—
같은 시각, 구재혁의 연구실.
모니터 화면에 복잡한 DNA 구조식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구재혁은 현미경에서 눈을 떼고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성공이야..."
시험관 속의 붉은 액체는 자외선 램프 아래서도 검게 타들어가거나 응고되지 않고, 오히려 영롱한 금빛을 띠며 빛나고 있었다. 하은의 혈액에서 추출한 특수 단백질을 합성해 만든 '솔라 세럼(Solar Serum)'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아주 잠깐이라도 우리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어. 태양 아래서 그녀를 지킬 수 있다고."
구재혁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인터폰을 눌렀다.
"태오, 지금 바로 연구실로 와줘. 보여줄 게 있어."
—
그날 밤, 훈련의 여파로 하은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피로가 몰려와 의식을 짓눌렀지만, 꿈속의 세상은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잔혹했다.
북소리가 들렸다. 둥- 둥- 둥-.
심장을 직접 타격하는 듯한 둔탁한 소리. 하은은 다시 300년 전의 조선, 서월의 몸속에 들어와 있었다.
이번에는 도망치는 숲속이 아니었다. 궁궐의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후원이었다.
차라리 칠흑 같은 어둠이라면 나았을까. 붉은 등을 켠 것처럼 기괴하게 물든 달빛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역한 피비린내와 향 냄새가 진동했다.
하얀 소복을 입은 서월은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두 개의 비수가 놓여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치유의 비수'와 검은 기운을 내뿜는 '지배의 비수'.
'시간이 없다... 그가 오고 있어.'
서월의 절박한 속마음이 하은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공포로 인해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여기서 끝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죽을 수는 없었다. 이 저주를 끊어낼 단서라도 남겨야 했다.
서월은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었다. 먹물이 아닌, 손가락을 깨물어 낸 붉은 선혈을 찍었다. 그리고 하얀 비단 위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달이 태양을 삼키는 날, 피는 주인을 찾아 흐를 것이니. 비수는 둘이되 하나이며, 하나이되 둘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300년 후,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아 태어날 후손, 바로 하은에게 보내는 피의 전언이었다. 글자 하나하나에 서월의 생명력이 깃들었다.
"찾았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얼음장보다 차갑고 뱀보다 끈적한 목소리였다. 장세훈이었다.
서월이 뒤를 돌아보았다. 궁궐의 담장을 넘어 검은 그림자가 덮쳐오고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 뒤로 일렁이는 것은 수천 마리의 악귀였다.
"내 영생의 제물이여."
장세훈의 붉은 눈이 번뜩이는 순간, 서월의 공포가 하은의 현실을 덮쳤다.
"안 돼!!!"
하은은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하은 씨! 하은 씨, 정신 차려요!"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태오가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하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태오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이 창백했다.
"봤어요... 서월이... 뭔가를 남겼어요. 붉은 비단 위에... 비수는 둘이되 하나라고..."
"진정해요. 천천히 말해도 됩니다."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요. 장세훈이... 꿈속에서 저를 보고 있었어요. 그가 웃고 있었어요.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하은의 말에 태오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다. 장세훈은 하은의 의식을 역추적해 위치를 파악한 것이 분명했다.
"이준호에게 연락해. 경계 태세 최상위로 격상한다."
태오는 하은을 일으켜 세우며 미리 준비해둔 비상 가방을 챙겼다. '플랜 B'를 가동할 때였다.
"달빛 클리닉도 이제 안전하지 않습니다. 구재혁이 준비한 약물을 챙겨서 이동해야 해요."
"어디로요?"
"아무도 모르는 곳.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블루 클랜의 옛 은신처로."
태오는 하은에게 두꺼운 코트를 입혀주며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내가 길을 열겠습니다. 내 뒤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십시오."
클리닉의 복도는 이미 붉은 비상등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고요했던 숲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
달빛 클리닉에서 약 1km 떨어진 숲속.
검은 밴 한 대가 라이트를 끈 채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승합차였지만, 내부는 최첨단 작전 지휘소였다. 수많은 모니터와 통신 장비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동 중이었다.
타닥, 타닥, 탁.
키보드를 두드리던 남자가 껌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방화벽 뚫렸습니다. 내부 CCTV 확보."
모니터 화면이 지직거리더니 이내 달빛 클리닉 내부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복도를 달리는 태오와 하은, 그리고 연구실에서 다급하게 자료를 챙기는 구재혁의 모습이 분할된 화면에 잡혔다.
"목표 확인. 마지막 치유자 발견."
남자는 헤드셋 마이크를 톡톡 치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블랙 클랜 놈들도 냄새를 맡고 오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먼저 도착하겠네요. 타이밍 좋고."
모니터 불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지적인 안경, 그리고 누가 봐도 호감형인 선한 인상.
하은이 대학 시절 그토록 따랐던, 그리고 조금 전까지도 그녀의 안부를 걱정하는 척했던 다정한 선배.
김도현이었다.
그는 옆자리에 놓인 은색 케이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특수 제작된 장총과 탄환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탄환 끝에는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탄피 안에는 액체형 질산은과 성수가 혼합된 독극물이 채워져 있었다.
'새벽의 칼'이 자랑하는 대 뱀파이어 결전 병기였다.
도현은 장갑을 끼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피 냄새가 진동하던 집. 찢겨 나간 여동생의 시신. 그리고 그 위에서 피를 핥고 있던 붉은 눈의 괴물.
그날 이후 도현의 세상에서 '선한 뱀파이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인간의 탈을 쓴 기생충, 박멸해야 할 해충일 뿐이었다.
"하은아... 넌 지금 속고 있는 거야."
도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놈들이 널 세뇌시킨 거지? 괜찮아. 내가 구해줄게. 그 괴물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고 나서 말이야."
그의 비틀린 정의감은 이미 광기에 가까웠다. 하은을 구한다는 명분 아래, 그는 그녀의 의지 따위는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도현이 장총을 어깨에 메며 무전기에 대고 명령했다.
"새벽의 칼, 진입한다. 뱀파이어는 전원 사살. 여자는 생포해. 저항하면... 다리를 쏴서라도 데려온다."
어둠 속에서 무장한 헌터들이 클리닉을 향해 그림자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은 구름 뒤로 숨어버렸고, 숲은 다가올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예고하듯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