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양극성 장애 사용설명서'를 붙이기로 했다

by 해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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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은 말했다."약 꼬박꼬박 드시고요, 규칙적으로 주무셔야 합니다. 술은 절대 안 되고요."


진료를 보고 약국에 들러 2달치 씩 약을 받으면 두 손에 들린 하얀 약봉투가 묵직했다. 물론 안다. 약물 치료는 이 지긋지긋한 롤러코스터의 속도를 줄여주는 가장 강력한 브레이크라는 것을. 하지만 일상은 진료실 밖에서 이루어진다.


약이 뇌의 호르몬을 조절해 줄 수는 있어도, 새벽 두 시에 갑자기 솟구치는 '온 집안을 뒤집는 대청소를 하고 싶은 욕망'이나, 대낮에 갑자기 바닥으로 꺼지는 듯한 '존재론적 허무'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스트레스를 피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세요" 같은 조언은, 육아와 살림이라는 전쟁터에 사는 나에게는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만의 처방전을 만들기로 했다. 남들에겐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 어떤 명의의 처방보다 효과적인, '조울증 2형 엄마의 생존 전략'이다.




첫 번째 전략: '가짜 결제'의 미학

경조증이 찾아오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통장 잔고는 뻔한데,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천만 원짜리 사업이 대박이 났고, 우리 집은 잡지에 나올 법한 쇼룸으로 변해있다. 이럴 때 가장 위험한 적은 '인터넷 쇼핑몰'이다.


과거의 나는 밤새 "이건 투자야!"를 외치며 수십 개의 택배 상자를 불러들였고, 다음 달 카드 명세서를 보며 이불을 걷어찼다. 억지로 쇼핑 앱을 지워보기도 했지만, 금단 증상처럼 손이 떨렸다.

그래서 타협했다.'장바구니는 마음껏 채우되, 결제는 72시간 뒤에 한다.'


나는 종종 새벽에 눈이 번쩍 뜨이면 쇼핑몰을 켠다. 그리고 사고 싶은 것을 미친 듯이 담는다. 아이 옷, 내 옷, 가구, 그릇, 심지어 캠핑 장비까지. 장바구니에 담는 행위 그 자체에서 오는 도파민은 결제할 때의 쾌감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나는 결제 버튼 대신 '장바구니 저장'을 누르고 창을 닫는다.


"3일 뒤에도 사고 싶으면 그때 사자. 맹세코 그때 사줄게."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3일 뒤, 다시 그 장바구니를 열어보면 마법이 풀려있다.'내가 저 촌스러운 원피스를 왜 담았지?''이 텐트는 우리 집에 놓을 자리도 없는데?'대부분은 '삭제' 버튼을 누르며 사라진다. 나는 돈을 쓰지 않고도 쇼핑의 희열을 맛보았고, 후회의 늪에 빠지지도 않았다. 이 '가짜 결제' 놀이는 내 충동성을 달래주는 최고의 장난감이 되었다.


두 번째 전략: 아이의 침묵 빌려오기

말이 많아지는 것은 내 조증의 대표적인 신호다. 머릿속에 생각이 팝콘처럼 터지면, 입 밖으로 그 생각들을 쏟아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남편을 붙잡고 몇 시간이고 떠들거나, 친구들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낸다. 상대가 지쳐가는 게 눈에 보이지만 멈출 수가 없다.


그때 나를 멈춰 세우는 건, 역설적이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내 아들이다. 기관절개관을 하고 있는 아들은 소리 내어 울지도, "엄마"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아이는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온 몸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하거나 AAC 라는 '보완대체의사소통' 어플을 활용한다.


내 목소리가 톤이 높아지고 말이 빨라질 때, 나는 의식적으로 아이의 눈을 본다. 그 깊고 고요한 눈동자. 세상의 소란함과는 단절된 듯한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숨을 고른다.


'아들은 말 한마디 없이도 이렇게 많은 사랑을 전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을까.'


아이의 침묵을 흉내 내 본다. 입을 꾹 다물고 10분만 있어 본다. 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도 꿀꺽 삼킨다. 그러면 과열되었던 엔진이 조금씩 식는 게 느껴진다. 아이의 장애가, 그 아픈 침묵이, 역설적이게도 시끄러운 내 마음을 잠재우는 가장 강력한 진정제가 되어주는 것이다.


세 번째 전략: 감정의 이름표 바꿔 달기

우울기가 찾아오면 나는 침대와 한 몸이 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예전에는 그런 나를 자책했다. '나는 게을러', '나는 의지가 박약해', '나는 나쁜 엄마야'.이런 자책은 우울이라는 늪을 더 깊고 끈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상태 메시지를 바꾸기로 했다."나 지금 우울해"가 아니라 "나 지금 충전 중이야"라고.


휴대폰 배터리가 5% 남았을 때 우리는 휴대폰을 탓하지 않는다. 그저 충전기에 꽂아두고 기다릴 뿐이다. 내 상태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 마음의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다. 억지로 일어나려 애쓰는 대신, 나는 나를 충전기에 꽂아둔다.


남편에게도 말했다.


"여보, 나 지금 절전 모드야. 시스템 복구까지 시간이 좀 걸려."


그러면 남편은 묻지 않고 기다려준다. '게으름'이 아니라 '절전 모드'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죄책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휴식'이 들어온다. 바닥을 치고 있는 이 시간은 추락이 아니라, 다시 튀어 오르기 위해 잔뜩 움츠린 시간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네 번째 전략: 마음의 GPS 기록하기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들이 바로 그 전략이다. 나의 흑역사를, 나의 아픔을, 나의 부끄러운 실수들을 글로 적어 내려가는 것.

머릿속에서 휘몰아칠 때는 감정이 '태풍' 같아서 나를 집어삼킬 것 같지만, 그것을 문장으로 적어놓고 나면 그저 '종이 위의 글자'가 된다. 객관적인 사실이 되고,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아, 이때 내가 이랬구나. 이때는 정말 힘들었네."


마치 남의 일기를 보듯 내 감정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게 된다. 글쓰기는 내 마음의 GPS 경로를 기록하는 블랙박스다. 사고가 났다면 왜 났는지, 어디서 급커브를 틀었는지 분석할 수 있게 해 준다.


조울증은 완치라는 개념이 모호한 병이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평생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일 또다시 이유 모를 슬픔이 나를 덮칠 수도 있고, 어느 날 새벽 또 가구 배치를 바꾸겠다고 땀을 흘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나에게는 나만의 무기가 생겼으니까.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았다가 웃으며 삭제하는 여유, 아이의 눈을 보며 침묵을 배우는 지혜, 방전된 나를 기다려주는 인내,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하는 용기.


나는 이 병을 '극복'했다기보다는, 이 병과 '화해'하고 있는 중이다. 내 마음속에 사는,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툭하면 우는 이 변덕쟁이 아이를 내치지 않고 꼭 안아주기로 했다.


"그래, 오늘은 기분이 좀 그렇구나. 그럴 수 있어. 괜찮아."


오늘도 나는 흔들리는 롤러코스터 위에서, 꽉 잡은 안전바를 확인하며 소리친다. 이 스펙터클한 하루가, 그래도 나는 제법 마음에 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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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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