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나의 연결고리
감각은 벼르고 벼르는 것이다.
감각의 종류는 다양하다.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감각을 기르는 일에 눈을 뜨고 있다. 전보다는 더 폭넓고, 밀도높은 시각을 갖게 되면서 몸소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는 내 자신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지금 내가 속한 환경이 디자인에서의 시각적인 눈을 키울 수는 있지만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한정적인 상황에 있기에 또 다른 감각을 키우는 방향성을 잡았다.
바로 언어과 글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사유를 하기 시작하면서, 벼르고 있는 감각은 바로 언어와 글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누군가의 사유가 담긴 글을 읽으면서 글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혼자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을 즐기게 되었다.
왜 이 단어는 이렇게 생긴 것일까. 왜 이 단어는 이런 상황에서 쓰이게 되었을까. 이 단어의 본뜻은 이렇지만, 왜 이런 뉘앙스를 갖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 단어를 어떤 단어와 조합해서 내 생각을 담아낼 수 있을까?
누군가는 쉽게 던지는 말일지라도 그 형태와 의미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이 단어가 쓰이는 상황과 맥락을 관찰하다보면, 어느샌가 나가 이 단어를 본 적이 있나…? 이 단어의 의미가 이게 맞나…? 애초에 이런 단어가 존재했었나…? 하는 미시 속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 미시의 세계 속으로 이동하면, 그 단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어의 의미는 무한히 확장된다.
‘낙화’이란는 단어의 속으로 들어가보자.
떨어진 꽃. 또는 꽃이 떨어짐.-[네이버 국어사전]
굉장히 닫힌 의미이다. 생명을 다한 잎이 물리적으로 중력에 의해 지면으로 떨어지는 형상을 낙화라는 하나의 틀에 담아낸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를 다른 단어, 다른 문장들과 조합하면 어떨까.
낙화_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쌓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내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자연’스러운 의미만을 담아냈던 하나의 단어에
슬픔, 결별, 이별이라는 새로운 감정의 형태들을 담아내고
아름다움, 섬세함, 계절이라는 뜻다른 의미들을 담아낸다.
누군가와 이별한 사람에게는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이 보일 것이고
나이가 들어가는 누군가에게는 찬란하고 영광스러웠던 자신의 청춘의 기억이 피어날 것이며
인생을 고뇌하는 자에게는 떨어지고 다시 피어나는 숲 속 생명의 순환을 떠올릴 것이다.
인생을 살아오며 색다른, 다양한 감정들을 새겨온 사람들은 ‘낙화’라는 단 2글자에서 수많은 장면과, 감정과, 기억과 스스로의 빛을 떠올릴 것이다.
이렇듯
단어를 사용하는 감각을 벼르는 것은 누군가 만들어낸 그릇에 새로운 의미를 담는 것이며,
단어를 음미하는 감각을 벼르는 것은 그릇에 담긴 음식의 재료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오며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그저 이미 만들어진 단어의 ‘형태’에 담아낼 뿐이다.
형태는 빌려오지만 그 재료만은 내가 창조한다.
누군가 본인의 감정을 담기 위해 만든 그릇에
내 생각을 창조하여 또 다른 나만의 재료를 넣는 것이다.
똑같은 그릇에 담겼지만 그 맛은 그 무엇과도 같을 수 없다.
오로지 혼자만의 세상을 담아냈기에 그 누구도 따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낸 음식이 또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낼 음식의 새로운 재료가 되는 길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단어를 음미하고 나만의 뜻을 만들어내어 이 단어 안에 또 다른 의미를 축척해나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유가 많아질수록, 의미는 쌓이고 쌓여 무한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단어를 음미한다는 것, 단어를 음미한다는 것은
무(無)의 존재로 태어난 하나의 세계 속 보이드를 거닐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존재들과 나 사이의 연결고리를 탐구하고 그 관계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오늘도 단어를 읽고, 쓰고, 맛보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