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외국에서 무슨 일을 할까

episode 10. 좀 친한 사이이고 싶다

by 정이안

previously on 주재원부인

https://brunch.co.kr/@jujaewonbuin/20




남편이 출장 간 곳의 현재를 잠시 보자면,

대통령의 추잡한 성스캔들을 덮을 겸 내 새끼 이스라엘 옆에 있는 말 안 듣는 나라에 전쟁을 일으키는,

나토고 유엔이고 국제협약이고 다 무시하는,

그로 인한 석유공급의 불안정으로 전 세계의 경제가 비상벨을 울리게 만든,

그래도 우리나라 신문에서 욕 한번 볼 수 없는,

세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나라다.

이 초강대국의 경제중심지인 뉴욕까지 가서 남편이 사 온 물건을 보자.



bathtowel.jpg 장르별로 골고루 다 사 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사람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관광을 한 것도 아니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간 것도 아니다.

생존을 위해 귀한 물품을 구하러 간 것이다.



밖에서 보면 참 흥미로운 주재원의 삶이지만 실제 그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도 다 사람 사는 일이다. 한국에서 일하건 미국에서 일하건 남미 오지에서 일하건간에 결국에는 밥을 먹고 씻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






처음에 온라인에 글을 쓰면서 갑자기 내가 이렇게 우리 상황을 밝혀도 되는지 잠깐 고민이 되었다. 혹시 남편이 나한테 말 안 한 블랙요원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회사를 위해 저렇게 몸 부서져라 일을 할까. 혹시 우리나라를 위한 불타오르는 애국심 때문일까. 왜 가족을 버렸냐는 부인의 질문에 십 년째 답을 못하고 어째서 저렇게 몸을 갈아서 일을 할까.



그는 정말 요원일까?

국정원 직원이란 절대 주변인에게 신분을 밝히지 않고 정 필요하면 명함에 꽃집 이름을 넣는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저 말은 요원이 된 대학 선배가 선후배들 앞에서 직접 해줬고 그 후에 요원이 된 동기도 학교에 와서 이야기했다. 자기들 직업은 절대 비밀이라고.

나 어릴 적 옆집 아저씨는 국정원 요원이라고 그래서 절대 직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옆집 아줌마가 우리 엄마에게 말해줬다. 우리 아파트 라인 아이들은 모두 자기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으나 비밀을 지키느라 아저씨에게 국정원 다니냐고 묻지 않았다.

딸이 요원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건 절대 비밀이라고 시고모님이 온 친척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야기했다. 그 결혼식에는 수많은 국정원 직원들이 축하를 하러 방문했고, 이 와중에 어떤 친척아저씨는 아는 요원을 우연히 만나 인사를 했다.



그러므로 내가 모르는 걸 보면 남편은 절대 요원이 아닌 것이다.

거기다가 진짜 요원이었다면 자랑쟁이 고모에게 우리 시어머님께서 사실은 우리 아들도 요원이라고 심지어 해외파견 요원이라고 하면서 그 자랑을 바로 분쇄하지 않으셨을 리가 없다. 어르신들의 자식자랑 배틀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두고두고 속에 천불이 나는 답답함을 주는 무서운 경쟁이고, 여기서 이길 방법이 있는데 참고 있을 어르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과연 외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예전에 한번 붙잡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안 그래도 일 생각하기 싫은데 묻지 말라고 했다. 이 대답은 직장인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10년이 넘게 같이 생활은 공유하지 못하지만 주소를 공유하고 살면서 몇 가지 알게 된 것으로 보면 스펙터클한 삶인 것은 분명하다. 인터내셔널 하고(각종 오지에서 일함), 범죄도 생기며(현지직원의 배임, 횡령, 그리고 도주), 생존의 위협도 받았다(건강악화). 어쩌다 그런 것도 아니고 지금도 여러 가지가 현재진행형이다라고 이해하고 있다. 최근에는 남편 근황을 뉴스를 통해 이해했다. 남편이 뉴스에 직접 나온 것은 아니고, 정치경제뉴스를 보고 유추해서 아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책을 내면 정말 흥미진진할 텐데(나부터 읽고 싶다) 아마 못 쓸 것이다. 바빠서.

문제는 은퇴하고 나서 쓰면 읽을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것이다.

수십 년 전 이야기가 젊은이들에게 재미있겠는가? 폰을 열면 실시간으로 도파민을 터트리는 사건들이 빵빵 올라오는데 굳이 라떼 이야기를 읽어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김우중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기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회고록류를 관심 있게 읽어볼 사람은 대부분 작가의 동시대인이 될 것이다. 후인들을 위한 책이라도 그들은 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같은 시대의 풍랑을 겪은 동년배들이 공감을 하며 읽게 될 것이다.



김종인의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가 생각난다. 김종인 씨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이 사람의 경험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 한줄기를 볼 수 있는, 분명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내가 주로 가는 인터넷 게시판들은 드라마나 소설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도 이 책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젊은 정치인이나 젊은 보좌관이 이러한 내용의 책을 낸다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꽤 회자되지 않았을까. (물론 지금도 선거전에 책 많이 내는데 그런 공수표 같은 책 말고 김종인 씨 정도의 실질적인 내용이 있는 책을 낸다면이라는 가정이다.)



시간이 남아돌지 않는 이상 직장인이 어떻게 글을 쓰냐...라는 말이 생기지 않도록, 워라밸이 보장되는 문화가 한국에 어서 정착했으면 좋겠다. 남편도 은퇴 전에 워라밸을 찾았으면 좋겠고.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