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나의 첫 연애는
첫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처음이 수반하는 서투름을, 곧 익숙함의 권태와 함정을 이겨내기란 늘 나의 미숙함이 아쉬웠다.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상대에 대한 그리움과 그 시절의 나에 대한 회고 섞인 미련과 함께 첫사랑의 기억도 오래 남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환승연애 프로그램은 어쩌면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나의 다시 보고 싶은 첫사랑을 현재의 나와 다시 만나 또다른 결말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첫사랑의 법칙을 거스르고 싶은 염원을 느꼈다.
헤어진 남녀가 함께 생활하며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도, 새로운 인연을 찾아가기도 하는 사랑과 이별의 과정에서 각자의 자연스럽지만 날 것의 감정과 생각들이 튀어나올 때 나의 지난 연애와 이별의 경험도 함께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처럼 기억되는 순간들이 어김없이 그를 떠올린다.
전 연인은 더이상 어떤 의미일까.
각자의 연애사와 필연적인 이별의 터널을 지나는 외롭고 퀴퀴했던 시간 속 '그'의 의미는 계속 달라져 왔겠지만 그게 무엇이든 달라진 그 무엇들은 야속하고, 아프다. 4년을 함께했던 나연과 희두를 보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은 몇 번의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했고, 서로의 다름과 닿지 않는 마음에 투닥거리지만 계속해서 흔들리고, 사랑하고 싶어한다. 새로운 인연인 지연 앞에 망설이며, 전 연인에게 흔들리는 희두를 보며 지연은 답답함과 서운함을 토로한다. 그리고 희두는 지연에게 이렇게 답한다. “너 4년 연애 해봤어?”
그렇다.
나의 첫 연애도 자그마치 4년 연애였다.
나 역시 대학생 때 그를 만나 졸업까지 함께하며, 변치 않을 사랑의 약속들을 했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그를 보며 느꼈던 벅참과 비로소 나도 그를 벅차게 사랑한다고 느꼈던 순간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온 치명적인 권태의 시간들까지도 모두 떠올랐다. 세월이 빚는 '그'의 의미가 크다는 걸 그래서 때때로 그가 그립다는 것을 희두의 말을 빌려 정당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에 나를 사랑하기는 했냐는 상대의 마지막 말은 비수로 꽂혔다. 그 때의 나는, 왜 너를 많이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못했을까. 그저 자존심만 내세우던, 못난 내 모습만이 남아 나를 괴롭게 했다. 감정적이고, 어리숙해서 그저 사랑을 갈구하던 지난 나의 모습들이 떠올라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느새 뒤틀려버린 나의 사랑을, 내 모습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그는
항상 내가 등을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던 그는 내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내 사랑의 증거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생각하고, 읽고, 물었다. 하지만 이미 돌아선 마음에 지난 사랑을 호소하는 마음도, 말도 그리고 내 존재도 더는 의미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차가운 표정, 눈빛, 말투를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끝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비로소 후회했다.
홀로 남겨진 나는
그가 사랑했던 그때의 내 모습과 멀어진 지금의 내가 너무 초라하고, 못나서 울었다. 나조차도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이별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다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불쑥 떠오르는 그와 함께 무너지는 나를 견뎌야 하는 후회의 시간들이었다.
그때의 난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 라는 말을 싫어했다.
시간의 힘에 기대어 그 사람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점차 내 삶의 우선순위에서 그가 밀리길 기다리는 그 시간이 사실 무서웠다. 하지만 그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 이별을 고한 그의 뜻을 존중하는 것뿐이었기에 만남을 유예하듯 시간의 힘을 빌렸다. 때로 잊으려는 노력은 기억하려는 노력보다 힘들었고, 언뜻 이 둘은 비슷해보이기도 했다. 잊으려할수록 나는 어김없이 그 때로 돌아가 하여금 바라만 보았다. 이 글조차도 무의식 속 내가 그를 기억하려는 행동일까 하여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였으나 이 글 한 편도 이미 수십번 참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첫 이별이었다.
사랑이 시작되고, 안정해지다 못해 권태로워지는 그 순간에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이별의 시간이 처음인 나에게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나의 성숙과 성장을 염원하며 견뎌온 이별의 시간에 나는 이별을 경험한 나를 얻었다. 때때로 상대에게 우리가 왜 헤어지냐고, 나는 너를 아직도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을 때마다 그가 아닌, 글과 영상을 찾았다. 미련과 후회가 섞인 감정과 생각이 나를 집어삼킬 때마다 수련을 하듯 보고, 읽고, 썼다.
그것만이 위로였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애쓰지 않아도, 최은영)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한다.
이별의 순간을 떠올리면 애쓸수록 멀어진 그였기에
나의 첫 사랑은 이제 삶의 흐름에 맡겨보기로 다짐한다.
그 다짐이 무색하게
지우지 못한 그의 흔적들과 기억들이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한다. 그리고 이별의 순간에 한없이 냉정했던 그의 모습이 생생해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커지기도 했다. 하지만 타인을 너무 미워하다 보면 제일 싫어지는 것은 곧 나였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행복했기에 더이상 내 인연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은 내 머릿속의 성역이야
결심했으니까 당신은 건들지 않기로.
잘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보내줄 거고,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 거고
인간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라고.
당신이 미워질 것 같으면 얼른 속으로 빌었어.
감기 한번 걸리지 않기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기를."
(나의 해방일지, 박해영)
그럼에도 지난 사랑을 같이 매듭지을 수 있는 환승연애의 그들이 부럽다. 적어도 이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들의 상황이 내 이별에 대한 아쉬움과 겹쳐졌다. 그렇게 다시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려는 마음이 들 때면 다짐해본다. 그가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도록 먼 곳에서 가장 가깝게 응원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