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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y 10. 2024

어버이날 꽃 한 송이 못 받았습니다만

어버이날 전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과 친정을 다녀왔다. 맛집을 찾아 식사를 하고, 꽃바구니와 용돈을 드렸다. 부모님은 우리가 올 때를 맞춰 만들어 두신 각종 김치와 밑반찬, 손수 키운 채소들을 바리바리 싸 주셨다. 부모님이 어린이날이라고 아이들한테 용돈을 주셨다. 우리가 드린 용돈 보다 돈을 더 많이 쓰셔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버이날에 장을 보러 나갔다가 꽃바구니를 들고 가는 교복 입은 아이 한 명과 꽃가게 앞에서 진지하게 꽃바구니를 고르는 아이 한 명을 봤다. 어린이날이라고 시댁과 친정에서 용돈을 두둑이 받은 고3 아들과 고1 딸을 생각하며, 내심 기대를 했다.


나는 작년까지는 꽃이 예쁜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누가 꽃을 선물로 주면, 며칠 못 가 시들어버릴 꽃보다는 차라리 먹을 걸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봄 들어 나이 탓인지, 길가에 핀 꽃들이 너무 예뻐 보여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대다가, 결국 화분 몇 개를 집안에 들여놓기에 이르렀다. 이번 어버이날에는 아이들이 예쁜 카네이션 바구니 하나 사다 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오후 다섯 시쯤, 딸이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빈손이었다.

"너 왜 빈손이야?"

"돈이 없어."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용돈 받았잖아."

"옷이랑 신발 샀어. 미안, 헤헤."

"꽃 한 송이 살 돈도 없었어?"

"엄마 꽃 별로 안 좋아하잖아. 엄마, 사랑해."

"엄마 이제 꽃 좋아하는데..."

돈이 필요하거나 상황이 불리할 때만 나오는 딸의 필살기, 눈웃음 애교에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잠시 후에 아들이 학원 가기 전에 잠깐 들렀다며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나를 한 번 안아주고 나갔다.


아이들이 어버이날이라고 평소 듣기 힘든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해주니 고맙긴 한데 마음이 허전하다. 집안이 너무 칙칙해 보여서 내 손으로 꽃바구니라도 하나 사들고 올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으로 부모님이 싸주신 밑반찬을 넣고 김밥을 만들어 먹으며, 김밥이 마치 꽃 같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부모님이 싸주신 밑반찬을 넣고 꽃 같은 김밥을 만들었다


열한 시쯤 아들이 학원에서 돌아왔다. 자려고 누웠는데 쓱 들어와 남편과 내게 각각 편지와 초콜릿을 주고 나간다. 한밤중의 깜짝 이벤트에 놀라 편지를 열어보니, 건강하게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사랑한다 말 백 번도 모자랄 만큼 사랑한다고 적혀있다. 너무 좋아서 입은 웃는데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자기 거 줘 봐. 뭐라고 썼나 좀 보자."

평소 혼내기만 하는 아빠한테는 형식적으로 몇 마디 썼을 거라고 생각하며 남편의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항상 가족을 위해 애쓰는 아빠를 자랑스러워하고 자신 또한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겠다, 감사한다, 사랑한다... 나한테 쓴 것보다 무려 두 줄이나 더 썼다!!


"뭐야? 왜 자기한테 더 길게 쓴 거야! 글씨도 더 정성껏 썼잖아!"

감동의 눈물은 쏙 들어가고 질투심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 기분 뭐지? 아들이 나보다 아빠를 더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배신감이 느껴진다!


어버이날 밤에 아들이 준 편지와 초콜릿


"초콜릿이나 먹어."

남편이 초콜릿 하나를 까서 내 앞에 내밀었다.

"아, 잘 밤에 초콜릿을 왜 먹어?"

잘못은 없지만 얄미운 남편에게 괜히 성질을 내고는, 초콜릿을 받아 입안에 넣고 씹었다. 달콤한 초콜릿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으며 질투심도 녹아버렸다.


오래전, 아이들이 글자를 익히기 시작할 무렵 써줬던 수많은 러브레터들이 생각났다. 또박또박 정성스러운 글씨체로 써서 건넨 아름다운 말들, '엄마 사랑해요. 고마워요.' 나를 그린 그림은 백설공주, 신데렐라 뺨치는 예쁜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내게 보내 준 러브레터


그때 이미 넘치게 받았다. 어린아이들은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부모를 사랑한다. 아이들은 내가 그 누구한테도 받아본 적 없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내게 주었고, 건강하게 이만큼 자라 제 삶을 열심히 살고 있으니 아이들은 이미 평생 해야 할 효도를 다 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이들한테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다음 날 퇴근길에 작은 카네이션 바구니와 편지지를 샀다. 카네이션은 감사와 사랑의 뜻이 있으니, 가족 모두에게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다면 누가 산들 어떠랴 싶었다.


내돈내산 카네이션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려고 편지지를 놓고 앉았는데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청소년 아이들이 부모에게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검색했다. '네가 엄마의 아들(딸)이라서 행복해, 잘 커줘서 고맙다,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실수해도 괜찮아...' 검색한 문장들을 읽다 보니, 나는 요즘 정반대의 말만을 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편지는 어느새 반성문이 되고 말았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키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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