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두 딸과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막내가 요즘 즐겨보는 만화에 나오는 칼을 만든다고 애쓰다가 생각대로 나오지 않자 울음을 터트렸는데, 얼마나 속상했는지 울음이 쉽게 그치질 않았다. 아이를 달래고 있는데 둘째가 '너 그러다 한 대 맞는다'라고 한다.
"얘가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리냐? 너도 맞아본 적 없으면서 동생한테 왜 그래?"
"엄마 기억 안 나?"
"뭐가? 엄마가 널 때리기라도 했다고?"
"정말 기억 안 나? 나는 맨날 그 생각나는데 엄마는 정말 잊어버렸어?"
"말해봐"
둘째가 말하지 않겠다고 하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왜 몇 년 전에 엄마가 술 먹고 들어왔을 때 우리가 계속 징징대니까 엄마가 내 머리 확 잡아당겼잖아."
아! 기억났다. 내가 정말 바보 같은 생각으로 살던 때의 이야기다.
"기억나... 엄마가 그때 미쳤었나 봐. 정말 미안해."
"엄마 그때 무슨 속상한 일 있었어?"
"엄마가 그때 화가 좀 많았지. 그래도 그러면 안 되었던 건데 정말 미안해."
"괜찮아"
"정말 맨날맨날 생각했어?"
"아니 가끔. 그런데 이제 괜찮아."
이제는 나보다 키도 크고 몸무게도 큰 둘째가 오랜만에 내 품에 와서 아기처럼 안겼다.
하, 내가 이 천사 같은 아이한테 무슨 짓을 했던 거지...
나는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내 삶에 대해 크게 만족하는 것도 아니었지만불만도 없었고, 열심히 살다 보면 더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가 이사를 했다. 전셋집 주인이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하자 시댁에서 집을 사 준 것이다. 친구 부부는 뚜렷한 직업이 없어 부족한 생활비를 시댁에서 받아다 쓰곤 했다. 친구를 만나 시댁과 남편에 대한 불만들을 듣고 나면 그래도 내가 낫다는 위안 같은 걸 받고는 했다. 친구의 새 집에 가 보니, 결혼 7년 만에 대출을 받아 사서 아직도 열심히 대출을 갚고 있는 우리 집 보다 넓고 좋았다. 사는 게 좀 허무하다 싶었다.
내가 술을 마시고 아이의 머리를 잡아당겨 버린 그날은 우리 빌라 아래층 살던 가족이 큰 집을 사서 이사를 간다고 하여 평소 친하게 지내던 그 집 아이 엄마와 술을 마신 날이었다. 그녀는 직장도 안 다니고 맨날 놀러만 다녔고, 내가 더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나는 왜 늘 같은 자리인 건지 속상했다. 친구 때도 그랬고, 아래층 아이 엄마한테도 그랬고 앞에서는 웃었지만 진심으로 축하하지는 못 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아파트를 샀어야 했는데... 남편이 전에 받았던 사업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아무리열심히 발버둥 치며 살아도 나는 아이들한테 물려줄 게 가난뿐일 것 같아...'
그렇게 지난날을 후회하고 비관하면서 나 자신을 미워하고 가족들을 원망했다. 둘째는 몇 년 전이라고 했지만 그건 작년 일이었고, 내가 정신을 차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엄마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뭔데?"
"엄마 사실은 지난 금요일에 회식이라 늦은 거 아니었어. 엄마 혼자 여행 다녀왔어."
"어디?"
"단양 가서 패러글라이딩 하고 왔어."
"정말? 사진 보여줘."
사진을 본 둘째와 막내의 반응이 다르다.
"엄마 혼자 갔다 오다니... 나빴어."
막내가 말했다.
"엄마 정말 멋지다. 나도 나중에 나이 들면 엄마처럼 살 거야."
둘째의 말에 가슴이 설렜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가 아닌 '엄마처럼살 거야'라니!
딸들은 엄마를 보고 자란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해도 비슷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둘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내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내 삶은 아이들의 미래 이기도 하다.
처음에 글을 쓸 때는 내가 보려고 썼다. 내가 어떻게 꿈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딸들이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살았으면 하는 삶을 살아가며 기록할것이다.마흔아홉이 된 딸들에게 엄마처럼 살아보지 않겠냐고 말할 수 있는멋진 삶을 살겠다는 꿈이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