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탐구 이야기의 시작
새벽 5시 30분. 노트북을 열고 빈 화면에 글을 채웁니다. 오늘은 오래 몸 담고 있는 글쓰기 모임의 온라인 집필실이 열리는 날이어서 옆에 줌 화면도 띄워두고요. 모임 멤버들과 서로의 이름에 눈인사하며 각자의 글을 쓰는 시간입니다. 전업 작가냐고요? 전업은 아니지만 작가는 맞습니다. 각자의 본업이 따로 있는 우리들은 작가라는 부캐를 장착하고 이 시간 모여 글을 씁니다.
이 시간은 제게 없던 새벽 시간입니다. 그리고 글쓰기는 제게 없던 루틴입니다. 회사다니고 아이키우는게 전부이던 워킹맘이 작가라는 부캐를 키워내는 시간입니다. 이 루틴이 표면적으로 저와 얼마나 상관이 없는지 좀 더 들어가볼까요? 이제 날이 밝고 출근을 하면 저는 회사 PC로 전혀 다른 화면을 띄울 것입니다. 어제의 실험 데이터가 표와 그래프로 펼쳐지면, 저는 분석을 하고 보고서를 쓰겠지요. 그러다 실험실에 내려가 하얀 가운을 입고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보고요. 네, 저의 직업은 연구직 회사원입니다. 생명공학을 전공한, 단 한번도 문과의 꿈을 꿔본 적 없는 이과 출신입니다.
그런 제게 어느 날부터 조금씩 부캐가 생겨났습니다. 아무런 의도 없이 만들어진 그 부캐는 일상에서 감성의 순간을 포착하고 글을 씁니다. 시를 짓기도 합니다. 에세이 작가가 되려고 출판사에 부지런히 원고를 투고합니다.
마치 글쓰는 왼손과 실험하는 오른손이 서로 하는 일을 모르듯,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캐릭터를 장착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부캐가 생기니 가뜩이나 바쁘던 삶이 더 바빠졌습니다. 일하고 아이 키우며 집안일하는 시간 외에 나를 키우는 시간이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퇴근 후 짬나는 시간에 필사적으로 책을 읽습니다. 주말에도 틈틈이 작가의 시간을 만들어냅니다. 분명 삶은 더 복작복작 바빠졌지만 어쩐지 마음은 더 꽉차게 행복해졌습니다. 여가 시간에 드라마를 보고 인터넷 쇼핑을 하염없이 넘겨보며 스트레스를 풀곤 하던 과거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나를 키워내는 그 시간이 더 큰 행복감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캐의 존재가 커질수록 새로운 고뇌가 생겼습니다. 가뜩이나 에너지 레벨이 낮은 사람이 너무 여러곳에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있는건 아닌지, 이건 내 커리어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나는 커서(이미 컸지만, 앞으로 더 나이를 먹으며) 대체 무엇이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하고요. 그도 그럴듯이 연구원으로서의 본캐와 작가로서의 부캐는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업에서 파생된 부캐가 아니니까요. 업으로 만들려고 시작한 부캐 역시 아니니까요. 생각할수록 삶이 산만하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는 효율을 무척 중요시하는 삶을 살아왔거든요. 제가 만들고 고수하던 효율의 기준이 흔들림을 느꼈습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할 때가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발견이 차츰 스며듭니다. 따로 노는줄 알았던 본캐와 부캐가 나도 모르게 사이좋게 모여서 서로를 돕고 있는 모습을요. 그러다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래, 이들의 접점은 바로 나였어!’
아무런 접점이 없다고 느꼈던 일들 사이에 사실은 가장 중요한 ‘나’라는 존재가 있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이 본캐와 부캐가 서로 어떻게 돕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요. 그 정리를 위해 이 글을 시작합니다. 네, 이 글은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두 캐릭터 모두를 살리기 위한 글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데리고 더 잘 살아보려는 저의 몸부림입니다. 나아가 어쩌면 당신을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양 손에 쥔 두 캐릭터가 사이좋게 당신을 채워가길 바라는 저의 작은 씨앗입니다.
이제 시작해보겠습니다. 본캐와 부캐의 상부상조, 결국 내가 수혜자인 그 이야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