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스몰 토크의 기쁨
나는 스몰 토크에 강한 편이 못된다. 아는 사이에서도 그렇고, 모르는 사이에서는 더더욱. 그래서인지 여행 중 자유로이 스몰 토크를 건네는 외국인을 만나면 그 자연스러움에 감탄하고 반한다.
지난 주말 아이와 쿠알라룸푸르 버드 파크에 갔을 때의 일이다. 공원 관람을 마치고 출구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 화장실에서 줄을 서 있는데 강렬한 레드 카디건을 입은 한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인도계 중년 여성으로 보였고, 특유의 억양이지만 유창한 영어였다.
그녀 : 여기 새공원에 가봤나요? 아니면 가려던 참인가요?
나 : 아, 방금 다녀왔어요.
그녀 : 어땠어요? 전 아직 가보기 전이거든요.
나 : 공원이 아주 넓고 새도 정말 많았어요.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그녀 : 어떤 새들이 있었나요?
당황했다. Bird 그 이상의 구체적인 새 이름이라니! 사실 여기까지 대화를 이어오면서도 내 머리는 자주 버퍼링이 걸렸다. 첫 질문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 어떤 의도인지 알아채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어떤 새가 있었더라… 분명 수많은 새들을 보고 즐거워했는데, 그 새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영어로는 더더욱. 공작새… 공작새가 정말 아름다웠는데 이걸 어떻게 말한담!
나 : 어… 이름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주 많은 새들이 있었어요.
그녀 : Peacock 도 있었나요?
아, 맞다. 공작이 피코크였지!
나 : 오, 맞아요. 공작새가 정말 많았어요. 새공원은 정말 멋진 곳이었어요. 입장료가 제법 비싸다는 것만 빼고는요.
그녀 : 내 말이 그거예요! 저도 비싼 입장료 때문에 고민했어요.
생각의 공통분모를 발견한 우리는 맞장구를 치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화장실 줄이 짧아져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스몰 토크였다. 이곳에 와서 처음 나눈, 기습 영어 스몰 토크.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기분 좋은 당황이었다. 이런 걸 반가움이라고 부르는 걸까? 나에게 말을 걸어준 그녀의 용기가 고마웠다. 내 입장에서는 용기인데,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용기라기보다는 자연스러움이고 일상인 듯 보였다. 그 정도로 그녀에게는 몸에 밴 행동인 듯 처음부터 끝까지 쏘 내추럴했다.
외국에 와서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나눠보는 경험. 단순히 식당이나 카페에서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조차도 요새는 QR 코드 주문이 많아져 기회가 줄었다)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대화! 말과 생각 그리고 표정이 살아 움직이는 그 주고받음이 너무 즐거웠다. 이걸 영어로 해본다는 뿌듯함에 더욱 행복했다.
선물 같은 그 기회는 어제도 찾아와 주었다. 아이를 어학원에 보내고 혼자 KLCC 공원에 앉아 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수 너머 트윈 타워의 사진을 이미 찍을 대로 찍은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풍경을 찍는 모습을 풍경과 함께 바라보았다. 눈앞의 그 역시 그러한 관광객 중 하나였다. 내게 말을 걸기 전 까지는. 등을 보이며 트윈타워를 찍던 그가 문득 뒤돌아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그 : 혹시 제가 방해되나요?
나 : 오, 아니에요. 저는 그냥 앉아있는 거예요.
그 : 이곳 도시 풍경이 정말 멋져요. 당신은 여기를 여행 중인가요?
나 : 네, 여행 중이에요. 당신도요?
그 : 네, 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왔어요. 당신은요?
나 : 한국에서 왔어요.
그 :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왔나요?
나 : 서울 근처예요. 작년 5월에 LA에 출장으로 가본 적이 있어요.
그 : 교통 체증이 어마어마한 곳이죠.
나 : 하지만 정말 멋진 곳이었어요. 게티센터! 그 미술관을 가장 좋아했어요~
이후 그는 쿠알라룸푸르에서 3일간 여행한 뒤 태국 치앙마이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치앙마이는 이곳과는 비교도 안되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나도 언젠가 꼭 한번 가봐야 한다고 권했다. 그러고는 이곳 야시장에 가봤냐고, 사람은 너무 많지만 진짜 재미있는 곳이니 당장 오늘 저녁에라도 가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쾌활하게 대화를 이끌고 주변 사진을 몇 장 더 찍은 뒤 그는 손을 흔들며 떠났다.
이 역시 기습 스몰 토크였다. 처음 보는, 이름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그런 사전 정보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여행자의 입장에서 즐겁게 생각과 경험을 나눌 수 있다니. 그것도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이번에도 역시 나는 당황스럽고도 반갑게 당했고, 버벅대긴 했지만 이 대화의 시간을 즐겼다. 그리고 어김없이 뿌듯했다. 영어로 말해본다는 뿌듯함과 더불어 여행자로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 괜스레 기뻤다.
이번에는 헤어지는 그에게 놓치지 않고 이 말을 건넸다. 마치 교과서 영어처럼 아득한 과거에 준비해 둔 그런 말. 혹은 대사. 하지만 마음만큼은 이보다 더 진심일 수 없는 말.
“It was nice talking to you.”
앞으로도 이런 즐거운 스몰 토크의 기회가 와주면 좋겠다. 그럼 나는 점점 더 팔 벌려 환영해야지. 이건 나의 여행을, 한 달 살기 속 혼자만의 시간을 더욱 생생하게 살려주는 일. 누군가와 짧은 대화로 서로의 표정과 목소리를 남기는 일. 여행지의 그 어떤 풍경 못지않게 내 안에 오래도록 진하게 남을 장면.
문득 드는 생각! 나도 시작해 볼 수 있을까? 스몰 토크를 건네는 일.
(이 글을 다 쓰고 카페에서 일어나던 순간, 카페 종업원이 말을 건넸다. 당신 작가냐고, 혹시 영어로 된 글도 쓰냐고. 반짝이고 다정한 눈빛의 앳된 얼굴. 그녀도 글을 사랑하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