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맛에 여행 다니는 걸까!
여행은 낯선 곳에 나를 놓아보는 것. 그러다 보면 예상 밖의 어려움을 만나기도 한다. 시작이 순탄치 않은 날이었다. 하지만 귀인들을 하나 둘 만나며 점차 날이 개던 날이었다.
한 달 살기를 계획하며 쿠알라룸푸르 근교 여행을 찾아봤다. 하지만 최근 아이가 멀미로 고생해서 차를 오래 타는 여행은 배제해야 했다. 다행히 전철로 갈 수 있는 곳이 하나 있었다. 근교 도시인 푸트라자야에 위치한 푸트라 모스크. 핑크빛의 영롱한 모습 때문에 핑크 모스크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전철 라인 중 하나인 MRT를 타러 숙소에서 15분쯤 걸어갔다. 30도가 넘는 날씨에 아이 이마에는 금세 땀방울이 맺혀 빛나고 있었다. 다행히 전철역은 무척 시원하고 쾌적했다. 핑크색으로 표시한 여성 전용 칸 앞에 아이와 손을 잡고 섰을 때 왠지 모를 안정감을 느꼈다.
출근 시간이 지난 후여서인지 열차 안은 거의 비어있었고, 우리는 마음에 드는 자리에 편안히 착석했다. 몇 정거장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전철은 지상으로 나왔다. 창밖 이국적인 풍경에 마음을 뺏겼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빌딩보다 초록 나무들이 많이 보였다. 아이와 단 둘이 처음으로 가장 멀리 떠나보는 길이었지만 평화로운 분위기에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갈 것 같았다. 그런데 전철이 멈췄다.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말레이시아어였다. 다른 승객들은 일상인 듯 동요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으레 있는 일이겠거니 생각했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무전기를 들고 서성였고, 무전기 너머로는 알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의 작은 얼굴에 두려움이 응축되었다.
"별 일 아닐 거야. 다른 사람들도 다들 침착하게 있고, 보니까 저기 직원분도 있네. 걱정하지 마~"
합리화하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아니면 사고라도 날 건 아닌지...' 나 역시 티 내지 못할 두려움에 휩싸였다.
전철 문이 열리고 다른 직원이 들어오더니 알 수 없는 말을 외쳤다. 승객들이 일제히 밖으로 나갔다. 우리도 재빨리 그들을 따라 나갔다. 다행히 멈춘 곳이 역 승강장이어서 내렸을 때 오히려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승객을 쏟아낸 전철은 홀로 유유히 철길을 달려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다음 열차를 기다렸고, 우리도 그들을 따랐다. 하지만 다음 열차 역시 모든 승객들을 내리게 한 뒤 홀로 떠났다.
'아, 다음 역에 뭔가 일이 있구나!' 생각했다. 이대로 다시 발길을 돌리고 싶진 않았다. 구글맵을 켜니 아직 16km를 더 가야 했다. 그랩을 불러서 갈까 고민했지만, 이 역시 생각지 못한 일이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아이는 무서워하며 내 한쪽 팔을 내내 놓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을 붙들고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다음 열차가 왔다. 함께 기다리던 승객들이 우르르 타는 모습에 뭔가 해결되었구나 싶었다. 우리도 놓칠세라 얼른 열차 안에 몸을 실었다. 스르륵 출발하던 열차는 속도를 줄이더니 다시 멈췄다. 그리고 뒤로 가기 시작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타지 말걸, 무모한 움직임이었다고 자책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열차는 다시 정상 방향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목적지인 푸트라자야 센트럴 역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더 이상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 열차는 무사히 우리를 목적지에 내려주었다. '내가 참 겁도 없이 멀리 왔구나' 하고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해제되지 않은 두려움 속에서 그랩을 호출했다. 목적지인 모스크까지 10분 정도 택시 이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랩을 기다리면서도 '내가 맞는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기사님과 잘 만날 수 있을까?' 긴장감에 마음이 분주했다.
첫 번째 귀인. 그는 다름 아닌 그랩 기사님이다. 제때 제 곳에 도착해 주었고, 밝은 인사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다른 기사님들과 달리 이것저것 물으며 대화를 유도해 주었다.
"다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누구에게든 물으면 돼요.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친절해요.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이게 우리가 교육받아온 것이에요. 내가 나중에 서울에 여행 가도 그곳 사람들이 도와줄 거 아니에요~?"
프렌들리 한 그는 이밖에도 아이와 가볼 만한 장소를 추천해 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와의 대화가 무척 즐겁고 유익했다. 앞 선 긴장감을 푸는데도, 그리고 이곳을 이해하고 마음을 더 여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드디어 도착한 핑크 모스크는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영롱한 핑크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직접 와볼 가치가 있다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이국적인 아름다움에 이전의 긴장감이 스르르 벗겨졌다. 이슬람 사원인 만큼 여성은 머리카락을 가려야 하기에 나눠주는 로브를 받아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폭 뒤집어썼다. 신발도 벗어야 했다. 햇빛에 달궈진 뜨끈한 대리석 바닥을 안방 밟듯 다니는 게 어쩐지 한결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모스크 내부에 들어가 화려한 장식을 배경으로 연신 아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아이와 나란히 서서 눈에 가득 담았다. 천장의 돔에 핑크빛 문양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때 어떤 영어 목소리가 다가왔다.
"이곳이 마음에 드나요? 저는 이곳 가이드예요."
그렇게 두 번째 귀인이 찾아왔다. 아빠처럼 자상한 표정으로 그는 모스크 내부 장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 핑크빛은 칠한 게 아니라 자연의 화강암 본연의 색이라는 것, 저 스테인드 글라스는 독일에서 왔고, 저 부분은 모로코 양식이라는 것. 15000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만큼 큰 규모이고, 감사하게도 엘리베이터는 한국이 지어줬다는 것.
그의 설명으로 우리의 감상은 훨씬 넓어졌다. 눈으로만 볼 때와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토록 확연히 다른 것! 단순히 아름다운 외형 그 이상으로 이곳을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내부 관람을 마치고 다시 외부를 다니며 구경했다. 멋진 풍경 앞에 아이를 세워놓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었다. 출구로 나가기 직전까지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며 나의 사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우리 모스크 앞에서 마지막으로 셀카 한 번 찍고 가자."
사진에 별 욕심 없는 아이지만 군말 없이 엄마의 사심에 협조해 주었다. 그렇게 휴대폰 화면에 모스크와 우리 모습이 담기도록 요리조리 셀카를 찍고 있을 때, 이번에는 중국어 목소리가 성큼 다가왔다.
"솰라솰라 솰라솰?"
알아듣지 못해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세 번째 귀인이라는 것을. 나는 고맙다며 자연스레 휴대폰을 넘겼고, 그는 성심성의껏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곳은 얼굴이 어둡게 나오니 좀 더 빛이 있는 뒤로 가서 찍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말이다.
"정말 감사드려요."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요. 당신은요?"
"저는 중국에서 왔어요."
"저도 당신 친구분과 사진 찍어드릴까요?"
"우린 괜찮아요~"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고 떠났다. 순식간에 커다란 친절을 받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배경 앞에서 아이와 나란히 선 소중한 사진을 받았다.
도착하기까지 무척 힘든 곳이었다. 열차 이슈로 두려웠고, 괜히 욕심부려 여기까지 왔나 자책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3명의 귀인이 한 꺼풀 한 꺼풀 그 두려움을 벗겨내 주었다. 그 자리에 친절을 입었고, 마음은 기대하지 못한 행복감으로 차올랐다.
그랩 기사, 가이드, 중국인 여행자. 이 분들 덕분에 아이와 나는 두려움으로 기록될 뻔한 그 여행에 다른 것을 쓸 수 있었다. 그것은 감사였고 행운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타인이지만 도와주고 싶은 선한 마음이었다. 각자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하는 대화였지만 그 마음이 전해지기에는 무엇도 부족하지 않았다.
이 맛에 여행을 다니나 보다. 모험길 뒤에 만나는 선물 같은 시간을 만나기 위해. 우연으로 가장한 감사를 경험하기 위해. 낯선 곳, 낯선 사람들이지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며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나도 다음에는 누군가에게 친절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배우기 위해.
감사합니다. 이 날의 모든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