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듣고 말하자, 나 자신아

영어 귀부터 열기

by 클로드

외국에서 영어로 주문을 하다 보면 나도 상대방도 재차 묻게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말레이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더운 날씨에 오래 걸어 지친 아이와 나는 밀크티 테이크아웃점에서 좋아하는 음료를 하나씩 사들고 가기로 했다. 마치 우리나라의 공차와 같은 곳이었지만 메뉴는 훨씬 다양했고, 찻잎 종류부터 해서 들어가는 토핑과 선택사항도 다채로웠다. 공차도 정신 바짝 차리고 주문해야 했는데, 여기는 메뉴도 익숙지 않고 더군다나 영어로 주문해야 하니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필요했다.

아이가 마실 망고 음료를 함께 고르고 빠르게 내가 마실 밀크티를 스캔했다. 아까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점원 앞에 서서 드디어 주문을 시작했다. 아이 음료의 주문은 순조롭게 넘어갔다. 그런데 내 밀크티 주문에서 점원의 질문이 시작됐다.


점원 : "No milk, right?"

밀크티에 노 밀크라니, 안 될 말이다. 내 말이 잘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 : "No, with milk, medium size."

그런데 점원은 계속 노 밀크를 언급했다. 나는 손까지 휘저어가며 처음부터 주문사항을 말했지만 둘의 대화는 점점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손사래와 함께 "아니 아니" 한국어까지 나와버렸다. 와... 밀크티 미디엄 사이즈, 블랙펄, 당도 25%, 얼음 적게... 이 주문이 이렇게 어려울 일이었던가! 말할수록 내 발목이 진흙에서 질척거리는 기분이었다. 마음은 급했고 얼굴은 상기되었다.


그러다 메뉴판의 글씨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Bubble Black Tea"

그랬다. 애초에 내가 말한 건 밀크티가 아닌 펄이 들어간 블랙티였던 것이다. 이런 메뉴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익숙했던 공차의 블랙 밀크티 위드 펄을 시키고 싶었던 것인데 "milk"가 빠진 메뉴인줄도 모르고 엉뚱한 이야기만 고집하고 있었다. 세상에...

너무 미안해서 그녀에게 얼른 사과부터 했다. 엉킨 실타래가 드디어 풀리고 주문이 들어갔다. 마스크로 반쯤 가린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 밀크티를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 후 그 가게 앞을 지날 때 멀리서 그녀의 얼굴을 스윽 본 적이 있다. 그날도 지친 얼굴이었다. 그냥 일해도 힘든데 나와 같은 손님들을 상대하다 보면... 다시금 미안해졌다.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했다.


해명을 하자면 그녀의 말도 완전한 문장은 아니었다. 이곳 영어는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의 나열일 때가 더 많았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슨 차이가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잘못이 컸다. 애초에 잘 못 주문했고, 바로잡아 주려는 그녀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아니, 안 들렸다. 내 의사를 표하기 급급해 귀는 점점 막혀버렸다. 귀 기울여 차분히 들었더라면 수렁에 그리 오래 빠져있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영어 앞에서는 늘 마음이 급했고 말이 앞섰다. 내가 해야 할 말을 생각하고 전달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보니 듣고 생각하는 걸 놓치기 일쑤였다. 어디 영어뿐이었을까!


이번 일을 계기로 '경청'에 무게를 싣기로 다짐해 본다. 일단 듣자고, 제발 끝까지 들어보고 생각하자고. 내 대답은 한 템포 천천히 나와도 되니 귀와 마음을 여는 것 먼저 해보자고 말이다.


"미안했어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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