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로드 Apr 02. 2024

봉은사 홍매화

클로드 감성시

도시가 깨어나는 시간

회색 빌딩숲을 뒤로하고 봉은사를 찾았다.

하나의 문을 통과하니 이내 펼쳐지는

자연의 돌바닥, 흙길, 나무 기둥, 그리고 꽃나무들


아침 공기 한 모금

새소리 소담히 담으며

설레는 한 걸음을 걷는다.

홍매화를 만나러


새벽의 푸르스름 걷히는 사이로

저 앞가지마다 선분홍 빛을 발산한다.

홍매화구나!

알아차리는 순간 향긋한 바람이 코 속으로 빨려든다.


조밀조밀 속삭이는 겹겹의 이야기

어제 보지 못한 깊은 분홍과

지난해 맡지 못한 짙은 달콤함에 홀려

매화나무 주변만 빙빙 돈다.


나무 아래 서서 손 가지가 펼쳐주는 세상을 본다.

저 앞의 기와에 선홍 손을 얹고

더 멀리 우뚝 솟은 빌딩에도 송이 손을 얹는다.

너는 이곳에서  품어내고 있었구나.

흙을 갈아엎어 뜨거운 아스팔트를 깔고

나무를 베어 회색 건물을 심는 모습을

새소리 걷어내고 차 경적소리 채워지는 이곳을

너는 다 품어내고 있었구나.


그렇게 우리를 부르고 있었구나.


도심 속 호젓한 자연을 뒤로 한채

봉은사를 빠져나오며 가장 아쉬운 건,

달콤한 그 향이 그리우면 어쩌나.

모든 감각에 향기의 기억을 채우면 마음에도 기억에도 가 닿을까.

도시의 바쁜 걸음들과 함께 모두 흩어졌지만

내 안의 언어는 여전히 홍매화를 수식하고 있을까.






주말 서울 삼성역 근처에서 일이 있었어요. 우연히 봉은사 홍매화가 아름답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일정이 시작되기 전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어요. 코엑스는 꽤 여러 번 갔지만 지하만 돌아다닐 뿐 근처 봉은사는 가 볼 생각을 한 번도 못했었죠.

처음으로 코엑스의 지상을 밟으며 길 건너 봉은사로 들어가 보았어요. 화려한 빌딩들과 수많은 차들을 수용하는 큰 도로를 뒤로하고 절 입구를 통과하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어요. 흙과 돌, 나무로 지어진 곳을 걷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연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었지요. 상쾌한 아침 공기 마시며 도심 속 호젓한 길을 걷는 기분이 무척 신비로웠답니다. 눈앞에 한 손에 꼽을 만큼의 사람만 보이는 그 한적함도 참 좋았고요.

그렇게 몇 걸음 길을 오르다 보니 저 앞에 선분홍 꽃나무가 드러났어요. 단번에 알아보았죠, '홍매화구나!' 깊은 밤 색의 나무가 옛 선인들의 붓길처럼 절도와 절제를 겸비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세세한 가지마다 조밀조밀 짙은 분홍 꽃송이가 가득했어요.

홍매화를 찾아간 건 그 특유의 아름다운 빛깔을 보고 싶어서였어요. 하지만 생각지 못한 놀라움은 따로 있었지요. 열 걸음 멀리서부터 은은하게 끌어당기는 달콤한 향기! 한 그루의 꽃나무가 발산하는 향의 힘은 정말 놀라웠어요. 다가갈수록 짙어지는 달콤함이 콧속에 들어와 온몸에 퍼지는 느낌! 자꾸 먹고 싶어 지는 맛있는 음식처럼 매화나무 옆에서 그 향을 계속 들이키고 싶었답니다.


홍매화에 취하며 아침 절 산책을 마친 뒤 일정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그렇게 하루 종일 학회장에 앉아 강연을 듣고 있었지요. 전 날부터 이어진 공부가 오후쯤 되니 집중도 확 떨어지고 앉아있는 게 좀이 쑤시더라고요. 문득, 정말 문득 떠올랐어요. 홍매화 향을 다시 맡고 싶다고. 앉아서 이리저리 고민하던 저는 오후 한차례 사람들이 빠져나오는 틈을 따라 길을 나섰답니다. 다시 봉은사를 향해서요.

주말 오후의 봉은사는 아침과 매우 달랐어요. 주차장 입구에 진입 조차 힘든 차들의 행렬만 봐도 그 인파를 짐작할 수 있었지요. 방금 와 본 곳이라고 익숙하게 홍매화를 향해 씩씩한 걸음을 옮겼어요. 이른 아침의 시원한 공기 대신 봄볕의 따사로움을 받으면서요. 매화나무 주변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거나 찍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는 여유롭게 꽃을 바라보며 주변에 머물렀답니다. 매화향 그 하나면 충분했으니까요. 다시 찾은 그 향기는 좀 전의 기억 속 그대로 담아가고픈 달콤함이었어요. 두 번이나 찾아가 맡았으니 이제 제 안에 보다 선명히 각인되어 있겠지요?


갖가지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봄. 이번 봄에는 그 생김새뿐 아니라 향도 감상해 보면 어떨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눈을 보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