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독일계의 프랑스 의사, 사상가, 신학자, 음악가이면서 ‘밀림의 성자’로 추앙받는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인생의 시름을 달래주는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음악과 고양이다.
지난 몇 년간 단 한 장 분량의 글도 쓰지 못했다. 타이핑한 것이라곤 기껏해야 직장에서 가끔 작성하는 보고서 정도였는데, 형식이 뻔히 정해져 있는 간단한 문구조차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아 쩔쩔매곤 했다. 글을 쓰지 못했던 건 먼저는 치열하게 사유할 만큼의 에너지가 없어서였고, 그럴 이유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글은 누군가에게 읽힘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읽어줄 사람도 없을뿐더러, 마치 경쟁에서 뒤처진 수컷의 구애 같이 처절한 짓이라 더이상은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도 지쳐버렸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다. 당연히 읽거나 쓰지 못했고 90분짜리 영화 한 편도 끝까지 볼 집중력이 없어서 요약해서 정리해 주는 유튜브 영상을 1.5배속으로 보곤 했다. 왜, 언제부터 이런 무기력증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마음이 험해지고 흉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는 날이면 아기나 동물이 나오는 영상을 찾아보곤 했다.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가 풀려 조금은 정화되는 것 같았다. 특별히 고양이를 좋아해서 김포에 있는 고양이 카페도 자주 가고 각종 유튜브 영상도 즐겨보았다. 실제로 키울 엄두는 내지 못하고 보는 걸로 만족해 왔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충동적인 면이 있었는데, 밤 10시까지 일하고 돌아온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우리에게도 힐링이 필요해.
데려온 두 녀석의 이름은 ‘아옹다옹하다’에서 따와 아옹이와 다옹이로 지었다. 녀석들은 주로 잠을 자거나 후다닥후다닥 소리를 내며 티격태격하다 하루를 보냈다. 어떤 날은 우당탕 소리이기도 했고, 어느 날은 쨍그랑이기도 했다. 기상이 한참 이른 시간에도 요란스럽게 레슬링을 하며 잠을 깨웠지만 운이 좋으면 곁에 누워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그르렁그르렁 소리를 내기도 했다. 골골송을 할 때 마치 몸 전체를 이용해 소리를 내듯 고양이의 몸에서 작은 진동이 일어났다. 그 떨림은 고스란히 전달되어 나를 위로하는 데에 쓰였다. 고양이를 보면 인간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녀석들은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영역을 쉽게 허락하진 않았다. 문득 곁에 찾아와 앉기에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면 다시 거리를 두고 달아나기 일쑤였다. 고양이를 자유자재로 만지기 위해서는 녀석들이 성향을 파악해야만 했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다 알아야만 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했고, 곁에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한 상태를 유지시켜 줘야만 했다. 사람을 대할 때도 적당한 거리 유지는 늘 필요했다. 과거의 나는 꼭 이성이 아니더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면 쉽게 마음을 열고 관계 형성에 열성을 쏟았다. 먼저 마음을 다 주고 내게도 똑같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전전긍긍했다. 그것은 예쁜 마음이지만 세련된 방식은 아니어서 먼저 실망을 하거나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곤 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조급한 마음은 버리고 거리 두기를 잘해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양이가 어떤 위로와 영감을 주는지 아직 다 알 수 없지만 소소한 기쁨을 선사하는 것은 확연했다. 그 정도 위안과 즐거움이면 충분했다. 이제 한 장 가까이 글을 쓸 수 있으니. 아옹이와 다옹이에 대해 쓰기로 했다. 그건 어쩌면 녀석들을 통해 내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일 수도 있었다. 비록 처량한 몸부림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