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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Jul 26. 2024

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

어떤 소설

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 - 곽푸른하늘


이제 와서 내가 무엇을 더 바래요?

애꿎은 시간을 다 쏟아버렸는데


들려줄 이야기가 없는 걸 보니

두 눈만 꿈뻑이고 앉아 있던 내 탓이잖아요


다시 돌이켜보니 하고픈 일도 참 많았어요

부르고 싶은 것도 많았고요

그러나 난 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


사실은 나, 난 말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정말이지 난 말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이런 생각에 한동안 잠겨 있다가

이마저도 지겨워 덮어뒀다가


웃고 있어도 난 웃고 싶지가 않아

음 어딘가 잘못된 거야


그러다 조금씩 무뎌지고

아무도 모르게 다시 추스리고


텅 빈 가방을 움켜쥐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요

https://youtu.be/jdvs_moYB78?si=P9jCHQne2W0nraOi


 어떤 소설을 읽다가 중간에 덮었어요. 단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난해해서 읽히지가 않더군요. 이게 소설인지 시인지 불분명했거든요. 소설인지 노래인지,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겠더군요. 음악으로 치면 한 곡 안에서 몇 마디씩 변주를 끝없이 계속하는 셈이었죠. 음악도 듣기 위한 음악과 연주하기 위한 음악이 있듯 소설에도 읽기 위한 소설과 쓰기 위한 소설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었죠. 해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이내 긴장의 끈을 놓치고 말았어요. 읊조리는 듯한 시적 문장과 서사를 해체하는 형식은 실로 파격적이었습니다. 서사와 인물의 등장이 드문드문하기 때문에 대사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어요. 물론 사건도 자취를 감추었고요.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말 줄이기였어요. 수사가 넘쳐나는 시대의 한 복판에서 말 없음을 고민하며 작가의 말은 시작되었죠. 마치 질문만 던져놓고 해석과 결말은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듯 아리송한 화두만을 남겨 주었죠. 끝까지 완독해야, 아니 두 번 이상 읽어야만 무엇을 위해 차곡차곡 문장을 쌓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답니다. 서사와 이야기가 빠진 글을 읽는 데에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어요. 하긴 더이상 '소설가=이야기꾼'이란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죠. 새로울 것이 없는 진부한 이야기보다는 낯선 출격이 훨씬 매력적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문장이 유려하고 깊은 사유가 숨겨져 있더라도 읽히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하도 궁금해서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는데, 스스로도 자기 소설이 독자에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요. 이미 읽히기 위함이 아닌 다른 진로를 택한 것일 수도 있겠군요. 의도적으로 메타포를 담아 실험적인 글을 쓰는 것은 아니고, 기존의 고리타분한 방식을 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글이 나온 거라고 하더군요.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 매끄러운 문장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듯 자기가 잘 쓸 수 있는 글을 쓴 것일 뿐이라고 했어요. 그래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듯이 소설도 획일적일 필요는 없어요. 스토리텔링에서 오는 감정 교감을 중요시하는 저와 영 맞지 않는 소설은 어찌된 셈인지 신선한 충격을 남겼어요. 결국 나는 분석하지 않기로 했어요. 왜 그렇게 썼는지 의문을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쓴 소설처럼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그저 마지막 문장을 향했죠. 그러다 그만 잠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너의 글은 어느 쪽이냐. 낡고 밋밋하고 뻔한 삼류가 아니더냐." 놀랍게도 소설이 말을 걸어 왔어요. 소설이 내는 소리를 듣는 순간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깨지 않고 몽중의 괴상한 대화는 계속되었죠. "삼류는 빛이라도 보았지 너의 글은 아무것도 낳지 못하고 미숙한 문장만 나열하다가 사산되었다. 너의 글은 어린아이나 쓰는 단순한 방식에 메시지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 않느냐. 어려워서 읽히지 않는 소설과 유치해서 읽을 가치도 없는 소설 중 무엇이 더 비참한 신세일까. 그 조악한 글마저도 쓰지 못하고 쩔쩔매는 네 몰골을 보아라. 너는 네가 쓰는 것의 실체도 파악하지 못하며 무엇을 위해 쓰는지도 알지 못하지. 잔뜩 사놓고 읽지 않는 소설처럼 너의 작문도 유보되어 있는 다짐으로만 가득하지." 꿈결의 목소리는 모질고 독한 말을 적나라하게 들려주었는데, 마치 내면의 내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진실을 꿰뚫고 있었어요. 급기야 소설은 제가 2010년에 썼던 첫 단편소설의 도입부를 보여 주었어요.

 

 광장을 지나는 하나의 뒷모습이 있다. 가을의 밤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뒤태이다. 가을은 꽤나 청량한 숨을 내쉬지만 그 수명이 짧으며 색상도 쓸쓸하기 짝이 없다. 봄의 색이 초록이고 여름은 빨강이라면 가을과 남자에게는 회색이 어울릴 것 같다. 무언가가 다 타고 남은 재의 빛깔이 남자에게 제격이다. 남자는 손님 하나 없는 간판 가게를 망부석처럼 지키다가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문을 닫고 겨우 퇴근을 한다. 노숙자들은 한때 만남을 상징했던 광장을 흉물스러운 아지트로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 해진 옷처럼 남루한 남자의 걸음걸이는 노숙자의 그것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힘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바짓단에서 권태가 한 움큼씩 떨어져 내린다. 보는 이로 하여금 한숨을 자아내게 하는 남자의 걸음걸이는 전쟁이 일어나면 적군이 보는 티브이에 방영되어 사기를 떨어뜨리는 신식 무기로 사용될지도 모른다. 광장을 점령한 절망 더미 속에 금세 어우러진 남자에게 구걸하기 위해 노숙자들이 하나둘 들러붙는다. 노숙자는 역겨운 냄새를 동반한 한숨으로 인생이란 얼마나 고독한 행사인지를 말해주려는 것만 같다. 그들은 영혼을 겁탈당한 듯 모두 똑같은 눈을 하고 남자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남자의 걸음이 빨라진다. 노숙자들이 몰린 전장으로 자신도 징용될까 두려운 남자는 차마 고개를 돌리기가 두려워 주차되어 있는 차의 백미러를 통해 좀비와 같이 달려드는 추격자를 확인한다. 백미러 하단에 작은 글씨가 보인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음.' 남자는 사물이란 단어 대신 불행이란 단어를 넣고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불행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에 있음."


 소설은 낯간지럽게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문장을 복원하고 말았아요.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을 만큼 민망한 수준이어서 기억에서 지워버린 줄 알았는데 그걸 복구하다니요. 당시에 제가 소설 쓰기 강좌에서 발표한 소설은 혹평으로 난도질 당했거든요. 심지어 끝까지 완성도 못 시키고 합평에 올렸으니 비난거리가 되어도 싸죠. '소설이 될 만한 지점이 없다.' '주제 의식도 없이 뜬구름 잡는 얘기.' 실속 없이 겉멋만 부리다가 끝난 중2병.' 예리한 칼로 난자를 당한 것처럼 독설은 폐부를 찔렀지만 부정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는 글을 쓰지 않았죠. 사람들이 제 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거두자 거짓말처럼 의지가 꺾여버렸거든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책으로 전락한 셈이었죠. 소설과의 요상한 대화를 뒤로하고 당시 제가 썼던 글을 찾아 읽었어요. 처참하게도 건질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더군요. 그토록 갈망하던 것의 실체, 자아의 본질을 실현하고자 하는 동기의 본체는 겨우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에 불과했어요. 제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의 제목은 '모스 부호'였어요. 간판을 만드는 일은 하는 주인공은 매일 깜빡이는 전구의 빛으로 모스부호를 만들어 세상에 송출합니다. 점과 선을 배합해 만든 문자 신호를 누군가는 알아봐 주길 바라면서요. 과거에 썼던 문장과 쓰지 못했던 문장을 더듬더듬 만져 봅니다. 쓸 수도 없고 쓰지 않을 수도 없는 글을, 왜 써야 하는지 무엇을 써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그런 불량한 글을 결국 계속 쓰기로 했습니다. 자기 연민으로 만들어진 소설도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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