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 맑은 날들] 늦은 겨울
이제 봄이 오나 싶었지만 다시 기온이 떨어졌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강남 언덕의 넓은 인도를 걷던 두 사람은 챙겨 오지 못한 두꺼운 외투를 아쉬워했다.
"저기 들어갈까요?"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은채가 말했다.
"응, 뭐 하는 곳이죠?"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진우가 되물었다.
"글쎄요, 미술관 같기도 하고, 암튼 너무 춥잖아요?"
"네에, 좋아요."
추위를 피해 들어온 건물은 밖과는 다르게 소박한 화랑이었다.
서너 명의 작가 중심의 유화를 전시하고 팔고 있었다.
딱히 흥미로운 그림은 없었지만 은채와 진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봤다.
은채는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진우와 나란히 있는 게 어색했다.
진우는 그저 은채가 행동하는 대로 따르려는 눈치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동선은 따로 놀았다.
큐레이터가 은채에게 다가와서 은채가 보고 있는 그림의 작가를 알고 있냐고 물었다.
은채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답했다.
뭔가 자연스럽고 싶던 은채는 엉뚱하게 그림의 가격을 물었다.
큐레이터는 그림의 호당 평균 가격대를 말했다.
위층에 가면 같은 작가의 그림들이 많이 있으니 가보자 했다.
은채는 그냥 별 관심 없이 응하는 상황극처럼 그러자 했다.
진우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작은 조각상을 보고 있었다.
은채는 마치 구매 의사가 있는 사람처럼 큐레이터를 따랐다.
“혼자 오시면 어떡해요? 남자친구분이랑 같이 가야죠.” 큐레이터가 은채에게 말했다.
은채는 진우를 남자친구라 부른 것이 수줍고 이상했다.
진우는 큐레이터의 말에 은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은채 옆으로 가서 이층 화랑을 함께 보았다.
둘은 브로셔까지 받아 들고 화랑을 나왔다.
여전히 축축한 빗방울 같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자친구라네요.” 은채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보이나 보죠.” 진우도 웃으며 답했다.
“그림 팔려고 그렇게 말한 게 아닐까?”
“전 대표님이 진짜 사려고 하시는 줄 알았어요”
“내가 돈이 좀 있어 보이나 봐.”
"하하, 당연하죠. "
둘은 즉흥적으로 해산물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즉흥적이지 않은 척 모텔에 들어갔다.
은채는 오랫동안 호텔 이외에 이런 곳을 가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호텔 앱에서 일부러 근처에 있는 모텔 중 가장 크고 화려한 특실을 골라서 예약했다.
일반적인 호텔 하루 숙박비보다 비쌌다.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지만, 안 피던 담배도 피울 수 있고, 좀 더 더럽고 지저분할 수 있는 곳에 묵고 싶었다.
진우는 그 방 자체로 매우 고급스럽다고 느꼈다.
자다 깨다 자다 깨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큰 TV로 음악도 틀어 놓고 먹고 마시며 둘은 그렇게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아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물기가 가득한 눈이라 쌓이지는 않았지만 물러서지 않는 추위는 여전했다.
"음, 진우 씨 오늘 약속 있다 그러지 않았어요?"
"아 네, 조금 천천히 가도 돼요. 미령이 친구 집들이 약속인데 선물이 집으로 배송이 와서 집에 들렀다 가야 할 것 같아요."
"미령 씨 친구 집들이? 헤어진 여자 친구의 친구 집들이?"
"아, 그냥 다들 친하게 지내서 미령이랑 같이 가기로 전부터 약속한 거라요."
"미령 씨랑? 아메리칸 스타일 같은 건가? 아니면 아직 헤어진 게 아니었어요, 여자친구랑?"
"좋아하는 건 아닌데, 헤어지진 못했어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당신이 좋고 당신 생각 밖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날씨도 이런데 어디 가서 해장할까요?"
모텔 건물들이 가득한 이면 도로를 벗어나 횡단보도 건너에는 큰 5성급 호텔이 있었다.
은채와 진우는 커다란 로비 중앙 왼쪽 끝에 있는 고급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아직 영업 전이라 둘은 호텔 로비에서 약 10여 분을 기다려야 했다.
"비싸네요." 진우는 메뉴를 봤다.
"먹어요, 아무거나, 난 소주 한 병만 있으면 돼요."
여러 한정식 코스 요리를 구경하다 둘은 갈비탕 두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어제 계속 대표님이 사셔서, 이건 제가 내겠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아, 그래요." 은채가 답했다.
어느덧 잔을 주고받는 둘 옆에는 빈 소주병 세 병이 있었다.
"대표님, 애교가 엄청 많은 거 몰랐어요?"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전 아시겠지만 전혀 살갑지 않아요. 특히 직원들에겐"
"아녜요 엄청 많아요. 되게 차갑고 사무적이시려고 하는데 툭툭 나와요. “
은채는 진심으로 갸우뚱하며 물었다. "가령?"
"음... 가령, " 진우는 잠시 고심하다 한 손을 들고 손가락을 접으며 "어마맛!" 은채의 흉내를 냈다.
"내가? 내가 그런다고요?" 은채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표님, 모르세요 정말? 얼마나 자주 하는데요." 진우는 즐거운 듯 대답했다.
"진우 씨가 나한테 예쁜 짓 하려는 거 같은데?" 은채는 부끄러우면서도 진우가 사랑스러웠다.
반면 진우는 표정에 그늘이 졌다. "저, 너무 예뻐하지 마세요."
"응? 왜?" 은채가 물었다.
"어차피 저랑 결혼할 거 아니잖아요."
은채는 진우의 빈 잔에 소주를 따르고 소주가 조금 남아있던 자신의 잔에 첨잔 했다.
"옛날에 말이야..." 은채가 무언가 화제를 돌리려 할 때, 은채의 휴대전화에 알람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은채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오늘 저녁이나 돼야 들어갈 듯'
'ㅇㅋ' 답신은 더 간단했다.
다시 은채의 시선은 진우를 향했다.
말을 이어가려 할 때, 진우의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진우는 확인 대신에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꿨다.
둘은 계속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진우의 노란색 카톡 창에는 빨간 포도송이가 끊임없이 주렁주렁 피어가고 있었다.
둘은 계속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급스러운 오성급 호텔의 한정식 룸에서 그들의 해장술은 계속 이어졌다.
어느 현대 작가의 유화가 걸려있는 그 방은 창문도 없었다.
그래서 은채와 진우는 이미 바깥에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였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