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 맑은 날들] 가을
단편집 : 맑은 날들단편집 : 맑은 날들
남자와 여자가 일부러 절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나와 돌아가다 보니 주차장 뒤쪽 낮은 산이 예뻐 가볍게 오르게 되었다.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너무나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는 산이 있는지 몰랐던 둘은 제법 신이 났다.
얼마 걸어가지 않아서 웅장하지는 않지만 작은 암자도 아닌 어엿하고 고풍스러운 사찰이 나왔다.
가벼워 보이던 야산이 깊은 숲으로 이어진 것처럼 일주문을 지나자 가까이 갈수록 사찰은 점점 커졌다.
그 길에 많은 대화를 하다가 경내에 이르러서야 남자는 여자에게 이미 여러 번 들어 알고 있던 것을 물었다.
"절에서 1년 지냈었다고 했나요?"
"1년까지는 아니었어요. 한 8개월"
"어떤 절이었어요? 이런 곳이면 저도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절은 아니었어요. 그냥 현대식 건물에 조금 내려가면 마을이 나오는 곳이었어요"
"아 그랬구나. 그럼 불자세요?"
"아뇨, 종교는 없어요. 참, 선생님은 종교 있으세요?"
"저요? 아, 네, 기독교예요."
"그래요? 몰랐네요.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면 무교, 아니 무신론자이실 거라 생각했어요."
"아 맞아요. 제가 생각해도 저 무신론자 맞아요... 그런데 이게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제가 이제 그 기도를 해요. 혼자 신하고 일대일로. 그래서 저는 제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해요."
"기도! 절에 있을 때 엄청 많이 했어요. 108배를 하고 나면 정말 생각이라는 게 없어져요."
"그렇군요! 난 무릎 아파서 못할 거 같은데"
"한번 해보세요. 정말요. 그런데 무슨 기도를 보통 하세요?"
"음... 다양한데요. 당신 만난 뒤엔 사실 한 번도 못했어요. 기도를."
"왜... 요?"
"기도를 하면요. 특히 간절하게 하면 할수록 마지막엔 늘 신에게 '당신 뜻대로 해주세요'라고 하게 된단 말이죠. 그러면, 제가 기도를 하면, 신이 항상 제 기도를 들어줘요. 그러니까... 기도를 하면... 당신을 더 이상 못 보게 될 거 같아서. 아플 거 같아서 못하고 있어요."
어느덧 두 사람은 대화를 하며 경내에서 대웅전 앞으로 옮겨와 있었고, 여자는 불상을 보고 가볍게 합장했다.
그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까, 그 저 때문에 기도 못하신다는 거요. 그럼 제가 그 악마, 아니 뭐라 그러지 사탄 같은 건가요?"
"네에?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냥... 제가 당신한테 그런 존재인가 하는 생각은 가끔 들지만요."
두 사람의 대화는 사실 가볍고 웃음과 농담으로 가득했다.
아직 일주문을 빠져나오기 전이라서 이쯤이면 사찰의 종소리가 울려줘야 한다고 생각할 법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사찰은 고요했고 산과 주차장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둘기들만 구르륵 구르륵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