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땅'! "달려. 벼랑 끝으로."
글쓴이 주: 죽기 살기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먹고살기 힘든 5, 60대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던지는 삶과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입니다. 쌀장사로 20년을 살아온 제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풀어보고 있습니다.
아들은 물리치료가 필요했다. 아내는 아들을 업고 초량동 병원으로, 연산동 장애인복지관으로 정신없이 오갔다.
낮에 점포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매장은 늘 문이 닫혀 있어야 했다. 점포 문이 닫히니 방문 손님은 끊어지고 순전히 배달에 의존하게 되었다. 점포를 알리기 위해서 새벽시간에 아파트 계단을 돌며 전단을 붙이면서 가게를 알려나갔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나의 쌀장사는 지지부진했다. 행복 끝, 불행 시작의 서막이었다.
나의 쌀장사는 수입보다 살림살이로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다달이 적자의 연속이었다. 아내도 힘겨워하고 있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데리고 장사일 까지 같이 하는 것은 아내에게 너무 벅찼다.
결국 장사한 지 2년여 만에 점포에서 살림집을 따로 떼어 가게 일에서 아내를 분리시켰다.
가게 부근에 2층 단독 주택이 있었다. 1층에는 주인 내외가 살고 2층을 세 놓고 있었다. 우리 가게에도 자주 오시는 분이었다. 주인 내외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장사하는 신출내기들이 안쓰러웠는지 선뜻 2층을 내주었다. 가게 보증금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2층 집을 세로 얻었다.
가게 달세와 살림집 달세, 은행이자까지 부담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업한 지 3년이 채 안되었을 때, 나의 사업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결국 매장을 없애기로 했다. 내가 배달을 나가는 동안 계속 문이 닫혀있으니 방문손님을 위한 매장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었다. 인근에 창고로 쓸만한 곳을 알아보고 다녔다.
다행히 원래 있던 점포 부근에 형성완구점이 있었다. 완구점 뒤편에 무허가 창고를 지어 놓은 데가 있었다. 말이 창고지 삽이나 연장 따위를 넣어 두기 위해서 건물 외곽 벽에 잇대어 좁다랗게 지어놓은 헛간이었다. 지붕은 나무 각목으로 얽어서 슬레이트를 얹힌 상태였다.
입구가 좁아서 쌀포대를 짊어지고 출입하기에도 버거웠다. 그래도 비를 피할 장소가 필요했다. 비가 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실리콘을 보강해서 내가 쓰기로 했다. 쌀을 길바닥에 쌓아둘 수는 없지 않은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300만 원을 보증금조로 잡혔다. 나는 그렇게 장사 3년이 채 못 되어서 장사 밑천을 다 까먹었다.
눈물이 났으나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쌀창고를 그렇게 허름한 헛간으로 옮겼다고는 차마 아내에게 말하지 못했다. 아는 분이 쓰던 매장이 여유가 있어서 같이 쓰자고 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아내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이 있는가? 더구나 남편이 하는 일을 아내가 눈치 채지 않도록 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아내가 알게 되었다. 무엇을? 내가 다 말아먹은 것을!
아내는 밤새도록 울었다.
-왜 잘 알지도 못하고 장사를 시작했느냐?
-아이들은 커가고 있는데 이제 어쩔 거냐?
할 말이 없었다. 막막한 밤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러나 새벽은 눈물로 지새운 밤보다 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다섯 형제 중 막내딸이 아닌가. 호강은 못 시켜줄 망정 이 무슨 낭패인가 말이다. 그런데 아내에게 미안은 했지만 마음속으로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아내에게 큰소리쳤다.
아직 서른다섯, 그런 오기가 넘칠 수밖에..
처음에 가정집 손님을 대상으로 고급 브랜드 쌀을 취급하기로 했던 쌀장사였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한다는 거창한 생각이었지만 가게에서 불과 3km 부근에 있는 동래 메가마트만 가보더라도 전국 산지에서 올라온 쌀들이 '삐까번쩍'한 자태로 손님들을 유혹하면서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나 같은 개인 자영업자가 첨단 서비스를 갖추고 있는 대형마트와 경쟁한다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다.
내 쌀가게의 주고객 목표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들었다. 순수 가정집 손님만으로는 쌀을 많이 팔수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많이 팔아 내지 못하면 구매 자체가 대량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고, 대량 구매가 안 되면 쌀을 싸게 사 들일 수가 없다. 상품의 원가가 높게 먹히면 무슨 경쟁력이 생기겠는가.
또 아파트 가정집 손님들은 주문하고는 전화 끊기가 무섭게 금방 독촉 전화를 하기 일쑤였다.
- 쌀 받아놓고 나가려고 했는데 언제 오냐?
- 지금 밥해야 되는데 언제쯤 오냐?
하는 식이다. 독촉을 하면 배달 구역을 넓힐 수가 없다.
쌀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식당이나 병원, 건설현장 등의 거래처로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 결국 가정집 손님을 버리기로 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아까웠지만 사업 전환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대형식당 사장님들을 찾아다녔다.
헛간에서 생활이 십여 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여기서 더 어려워지면 진짜 끝이다 싶은 순간에 식당 사장님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거래처가 조금씩 늘어갔다. 배달지역도 가게가 있던 동래구에서 벗어나 금정구로, 노포동으로, 서면으로, 자갈치로, 광복동으로 확대되었다.
비로소 아, 이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