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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재윤 Jul 02. 2022

아들, 독립. 성요셉마을로 가다.

그곳에 아들이 산다.

아들, 독립. 성요셉마을로 가다.

-그곳에 아들이 산다.-


아들이 커가고 있었다. 덩지가 커진 아이를 잠시 뉘어 놓고 가게 옆 재래시장에서 급하게 찬거리를 사왔다. 아들이 등으로 방바닥을 밀고 다니면서 이리저리 손을 놀린다. 커튼이 얼굴에 닿자 거미 같이 야윈 손을 뻗어 당겨본다. 커튼이 얼굴 위로 떨어진다. 아이는 커튼 자락을 걷어낼 줄 모른다. 커튼을 이불처럼 뒤집어쓴 채 놀고 있다. 커튼 놀이가 재미있는지 껄껄거리고 웃고 있다. 


아들의 손가락을 지긋이 깨물어 본다. 아들은 아프다고 얼굴만 찡그릴 뿐 손을 빼낼 줄 모른다. 아내의 속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아들은 가끔 괴성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무언가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뜻인데 말을 할 수 없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가 아픈가 배를 눌러도 보고, 모기가 물어서 어디가 가려운가 살펴보기도 했다. 한 번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면 두 시간은 기본이고 서너 시간씩 계속되기도 했다. 가족들의 어려움은 말로 할 수 없다.


재종 아우의 결혼식에 가족들이 참석했다. 피로연 식당에서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자극을 받았는지 아들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아들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가 달래주다가 했는데 영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때 얼마나 고함소리가 컸는지 재종 매형들이 깜짝 놀랐던 일을 지금도 이야기한다.  


- 처남, 처수가 욕보신다.


아들 덕분에 아내는 친척 어른들의 안쓰러움을 가득 안고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었다. 


2010년 여름, 이제 내년에 쌍둥이 여동생은 중학생이 된다. 아들은 엄마가 업고 다니기에는 키가 너무 커졌다. 띠 밖으로 마른 다리가 삐죽 나왔다. 다리가 땅바닥에 끌릴 듯했다. 머리는 제 엄마보다 한 뼘이나 위로 들려 있었다.


지나가는 할머니들은 다 큰 아이를 왜 업고 다니냐고 물었다. 아내는 그럴 때마다 울었다. 나는 아이를 장애인 보호 시설로 보내기로 했다. 아내 몰래 부산에 있는 장애인 시설들을 돌아다니며 아들이 지낼만한 곳이 있나 살폈다.


나는 경악했다. 시설들이 너무 열악했다. 대부분 기존에 지어져 있던 4,5층짜리 다가구 주택 건물을 개조해서 시설로 사용하고 있었다. 1층 현관을 개조한 집도 있었는데 건축 당시의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되다 보니 휠체어가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복도가 좁은 곳도 있었다.      


방안에 이불이 깔려있고 장애아동들이 방바닥에 눕혀진 채로 생활하고 있는 열악한 환경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그런 열악한 시설이나마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할 정도로 시설 자체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시설들조차 입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 무렵, 아픈 아들을 데리고 장사 일을 하는 내 처지를 안쓰럽게 생각해 동생처럼 보살펴 주고 있는 녹*푸드 대표 이*준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천주교 대구 교구에서 운영하는 경북 김천의 성요셉마을에서 막 시설을 개원하고 거주를 원하는 중증장애인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아들을 데리고 김천으로 갔다. 그곳에는 신부님이 계시고 물리치료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이 상주했다. 먼저와 있던 형들의 표정이 밝았다. 아들에게 인사해주는 누나들도 있었다. 마당의 잔디밭이 넓직했다. 저 멀리 들판 너머로 산과 들이 하늘과 닿아 있었다. 드디어 아들이 지낼만한 곳을 찾은 듯 했다. 


몇 번의 추가 상담이 있고 입소가 결정되었다. 2011년 1월 11일의 일이다.          


2011년 2월 새해 설, 아들은 설날을 엄마 아빠와 함께 보냈다. 설 연휴 토요일, 나는 노모와 아내와 아들을 트럭에 태웠다. 여든의 노모께서는 앞으로 손자가 살아가야 할 곳을 보아 두고 싶어 하셨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잘 웃지 않으셨다. 마음에 병이 드신 것이다. 


경북 김천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성요셉마을. 그곳에 아들을 두었다. 아들을 시설에 두고 돌아오던 트럭 안에서 흐느껴 울었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아들이 태어나고, 장애가 있을 거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머릿속이 하얘지고, 하늘이 무너지고.. 아들이 평생 먹고 입을 거리를 벌어놓아야 한다는 철없고 무의미한 생각으로 무턱대고 장사 일에 뛰어들고..


가족들을 경제적인 수렁에 내몰고만 어리석은 가장이 되었다는 죄의식이 하염없는 눈물을 불러왔다. 생전에 부치시던 밭에 모셔져 있는 선친의 묘소에서도 엎드려 울었다. 아들을 내가 거두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왔다는 사실에 끝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매일 저녁 현관문을 열면서 ‘하대’를 불렀다. 하대는 아들의 별명이다. 부산 성분도 병원 소아과 물리치료를 맡은 선생님이 수틀리면 목청껏 고함을 지르는 아들에게 이름처럼 대차다고 붙여준 이름이다.


-“하대”


원래 대답 없는 이름이었지만, 이제 실제로 아들은 나와 함께 있지 않았다.


아들을 성요셉마을에 맡긴 지 일 년 동안 두문불출했다. 오로지 집과 가게를 오가며 배달에만 열중했다. 2주에 한 번, 진주에 계시는 어머니를 뵙고 오고, 한 달에 한 번 김천으로 가서 아들을 만나고 왔다. 


바깥출입을 일절 하지 않았다. 같이 장사하는 사람들과 식사자리도 하지 않았고, 오래 동안 사귀어 온 고향 친구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나의 결혼식 때 사회를 보았던 대학 동아리 친구들과는 지금까지 인연을 끊고 산다. 

집 옆에 있는 부산 시립 명장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었다. 주로 아리랑 같은 장편소설을 빌렸다. 도서관이 유일한 피난처였다.


마음이 허전했다. 그해는 유난히 비가 자주 왔다. 비가 오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아이를 살리고자 시작한 장사일 이었다. 아이의 치료비를 위해서, 아이가 먹고살 돈을 벌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돈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돈은 벌리지 않았고 아들을 감당하지 못한 못난 아버지가 되었다. 장사일을 시작한 지 십 년이 흘렀음에도 가족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가장이 되었다. 살아갈 의미가 없었다.      


장영희 선생은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를 가졌다. 선생은 자신의 저서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적었다.


딸이 발붙일 한 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운명에 반항하여 싸운 나의 어머니. 장애는 곧 죄를 의미하는 사회에서 마음속으로 피를 철철 흘려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딸을 지킨 나의 어머니, 업어서 교실에 데려다 놓고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시던 나의 어머니, 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학교를 찾아가 제발 응시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며 다니시던 나의 아버지..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131쪽)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대지의 작가 펄 벅은 한국의 고아를 포함, 국적이 다른 아홉 명의 고아들을 입양했다. 그러나 그녀의 유일한 피붙이는 중증의 지적장애와 자폐증이 겹친 딸 하나뿐이다. 펄벅 여사는 우리나라에도 혼혈아를 위한 재단을 세우고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헌신했다. 펄벅 여사는 자신이 가장 어렵게 쓴 책이라고 고백한 “자라지 않는 아이”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교육을 받을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외쳤다.


아, 나는 아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던가.


아, 나의 아들은 아버지를 기억이나 할까. 나는 한참을 울었다.


아아, 나는 무능한 아버지.     


나는 아들을 시설에 맡긴 무능한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풀리는 한강가에서

    -서정주-     


시인 서정주는 봄이 왔다고 제 멋대로 혼자 풀어져 버리는 강물을 적었다. 자연의 시계는 무심하다. 사람들의 아픈 마음 따위에는 아랑곳 않고 얼음이 녹고 꽃이 피는 봄이 와 버린 것이다. 나에게는 무관심한 타인과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의 상처가 어루만져진다.      


2022년 여름이다. 풀리는 강물처럼 무심하게 세월은 잘도 흐른다. 아들은 김천 성요셉 마을에서 신부님과 친구들과 11년째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의 독립. 나에게는 아들이 김천 성요셉마을에서 아프지 않고 잘 지내 주는 것. 그것이 아들의 또 다른 독립이다.     


장사일로 식당 사장님들을 오래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아이들 이야기를 물어온다.


-하 사장은 아이들이 몇이고?

-아들 한 마리, 딸 두 마리입니더.

그러면 또 아들은 몇 살인지 물어온다.

-스물다섯 됩니다.

-군에는 갔다 왔것네? 복학하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스무 살 중반의 남자는 항상 군에 갔다 와야 하고 대학생이어야 한다.     


-네, 군에는 안 가도 되고, 뜻한 바 있어서 경북 김천에서 신부님들하고 친구들하고 같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 신부님들과? 신부가 되려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는 아들을 독립시켰다.


이번 설에 김천에서 내려와 가족들과 같이 명절을 보냈다. 키가 커져서 아빠 가슴팍까지 올라온다. 아빠랑 같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바꼭질을 하고, 서로 보듬고 뒹굴다 돌아갔다.  






글쓴이 주: 

쌍둥이 여동생의 일기. 2007년 1월 26일. 초3.  과음(고함)

쌍둥이 오빠에게.


오빠야 왜 과음을 질으니? 어디가 아파?

오빠야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오빠야, “으이그 진짜.” “아야야..” 이런 말 말구.

동생도 착한 말 잘 쓸게.     


오빠야 어디가 불편하든가 어디 아프면 표현을 해. 

과음질르지 말구. 뭐 말을 하던가. 손으로 말을 하던가.. 

동생도 말을 또박 또박 말하려고 애쓰잖아.      


또 오빠야가 말도 하면..


엄마, 아빠도 고생 안하시잖아. 만약에 말을 못하면 과음을 질르지 마. 

과음을 질르지 않아도 엄마, 아빠, 내가 잘 알아.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지마.. 우린 다 아니깐,      


왜냐하면 오빠는 우리 가족이니깐.. 


그러니깐 과음을 질르지마.     

과음을 안질으면 여행도 많이 다니고 좋은 경치도 많이 볼 수가 있어. 

오빠야, 약속~     


2007년 1/26일 (초3때 가족 일기장)     




-by 하재윤-


글쓰기 프로젝트

가제 : 쌀장사 20년, 인생은 아름다워

부제 : 외롭고 높고 쓸쓸한 당신에게


들어가는 말


목차     

1. 인생은 닥치는 대로 사는 것.  


순전히 내 탓이다.

인생은 느닷없이 오고..

세상의 중심은 나.

적당히 하고 살아요.

현재글 : 아들 성요셉마을로 가다.

일기 아빠의 사과문 2009년 3월 29일 .

천직.

선택은 나의 몫. 아들 탓하지 마라.

물밑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인생은 불공정하다.  


2. 장사는 힘들어  

3. 세상이 만든 질서에서 벗어나기

4. 내 인생의 주인 되기

5. 인생은 한 방향으로 버티는 힘이다.

6. 인생,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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