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향기 / 18회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

장편소설

by 가야

18회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


헛간 초가지붕 위로 탐스러운 박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앞마당에 코스모스와 과꽃이 피어 깊어 가는 가을을 노래한다.


가을이 되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더욱 바빠졌다. 봄부터 여름 내내 가꾼 콩이며, 깨를 거두어들여 우리 집은 하루가 다르게 풍성해졌다.


아버지가 마당에 큰 덕석을 펴놓고 햇볕에 말린 콩을 털고 있다. 도리깨를 위로 치켜들면 두 가닥의 나무가 뱅그르르 돌다 힘껏 아래로 내려치면 먼지가 일면서 콩깍지가 터지고 콩이 튀어 오른다. 일정한 간격으로 하는 아버지의 도리깨질이 재미있어 도무지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 나도 한번 해보겠다고 조르고 졸라 간신히 허락을 얻어냈다. 그러나 도리깨가 너무 무거워 들 수도 없었다.


“거봐라. 보기는 쉬워 보여도 쉽지 않지? 얼른 이리 내라. 콩 타작 얼른 해 놓고 늦기 전에 나무 한 짐 더 오게.”


도리깨질을 끝마친 아버지는 나무를 하러 가셨다. 엄마는 아버지가 도리깨로 털어놓은 콩을 깍지와 줄기는 손으로 대충 추려내고 멍석 끝을 잡고 탈탈 털어 가운데로 모았다. 그런 다음 챙이(키)에 까불러 덤불과 쭉정이를 날려버리고 콩만 골라 자루에 담는다.


바람이 서늘해지고 가을은 깊어졌다. 꺼칠한 감나무 감도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빨강, 분홍, 흰색 예쁜 색으로 고운 자태를 과시하던 코스모스는 까만 씨만 남기고 내년을 기약하고 사라져 버렸다. 어쩌다 때를 놓쳐 뒤늦게 핀 코스모스는 가뜩이나 빈약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오스스 찬바람에 떨고 있다.


언니는 코스모스며, 분꽃, 해바라기, 아주까리,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의 씨를 받아 햇볕에 바싹 말렸다. 그런 뒤 직접 만든 작은 봉투에 넣고 하나하나 이름을 적어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었다.


저녁상을 물리려고 할 때였다. 얼굴이 푸석푸석한 아줌마가 엄마를 찾아왔다. 할 말이 있다며 엄마와 나란히 집을 나서는 아줌마의 뒤를 졸랑졸랑 따른다.


“할 말이 대체 뭔데 그려?”


“언니,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암만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글쎄 금식 씨가 추석 전날 날 찾아와서.”


“금식이가 대체 뭐라고 했는디?”


금식이란 말에 엄마는 긴장하며 묻는다.


“말을 다 하자면 좀 길어요. 허니 우선 좀 앉으세요.”


아줌마와 엄마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았다. 버버리 아저씨란 말에 나도 몰래 내 두 귀가 쫑긋해진다.


“대체 금식이가 추석 전날 뭘 어쨌는데, 그려?”


“잠깐만요.”


아줌마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보자기를 들고 나왔다.


“그건 또 뭐시여?”


자세히 보니 추석 전날 버버리 아저씨가 다녀간 뒤 마루에 있던 그 분홍 보자기였다. 아줌마가 보자기를 풀면서 말했다.


“글쎄 금식 씨가 선물이라며 이걸 가져왔지 뭐예요.”


“아니, 이건 한복감 아녀?”


보자기 안에는 노랑과 다홍색 공단 한복감 한 벌과 값비싼 검정 비로드 천이 들어있다.


“시상에 곱기도 해라. 가만있어봐, 긍게 노랑 공단은 저고리 감, 빨간 것은 치마 감이고, 그리고 이건 그 비싼 비로도 아녀? 이 귀한 것을 금식이가?”


부러움과 놀라움으로 엄마의 눈은 휘둥그레지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금식 씨가 힘들게 번 돈으로 왜 이런 비싼 것을 사 왔는지......”


“아녀, 괜히 사 왔을 리는 만무하고, 금식이나 얼매나 야문 사람인데. 어렸을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쭉 지켜봤지만, 땡전 한 푼 허투루 쓰는 그런 사람이 아녀. 여태 그 나이 먹도록 술 담배 안 하는 것만 봐도 몰라, 내가 언젠가 치사를 했더니만, 금식이가 뭐랬는지 알아?”


“뭐라고 그랬는데요?”


“쓰잘데기없는 일에 돈을 왜 쓰냐는 거여. 그런 금식이가 이렇게 비싼 것을 사 왔을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것지?”


엄마가 보자기를 옆으로 밀치며 아줌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심각한 엄마의 표정과는 달리 아줌마는 너무나 쉽게 말을 한다.


“한마디로 같이 살자는 거죠. 뭐.”


“같이 살자면 그럼 혼인을 하자는 말 아녀?”


너무 놀란 나머지 엄마는 생전 안 하던 말까지 더듬고 있다. 그런 엄마 못지않게 나도 깜짝 놀랐다. 그러나 아줌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상에,”


엄마는 무얼 생각하시는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버버리 아저씨와 아줌마가 혼인을 하면? 두 사람이 누구보다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버리 아저씨가 아줌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퍼뜩 무덤가에 아저씨와 같이 있었던 미친 여자가 생각났다.


“가만있어 봐. 금식이 나이가 올해 스물여덟일걸, 동상이 서른 살이니 나이로 따지면 두 살 차이네. 나 좀 봐 시방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여. 그건 그렇고 자네 생각은 어떤데?”


엄마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아줌마 의견을 물었다.


“언니도 참, 제가 생각하고 말 것이 뭐가 있어요? 순진한 금식 씨가 저러는 게 안타깝고 미안할 뿐이죠. 언니 보고하는 말이지만, 산전수전 겪고 살면서 별별 놈들을 다 만나봤지만, 금식 씨 만한 남자도 흔치 않아요. 말이야 바른말이지 사실 금식 씨가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버릴 것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야 그렇지, 사람 됨됨이나 인물로 보나 부지런한 생활력을 보나 금식이 만한 사람도 드물지. 금식이가 동생 좋아하는 건 안성장터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자네 맘이 중요허지. 자네는 참말 금식이한테 눈곱만큼도 맘이 없는가?”


엄마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아줌마가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저 같은 년이 언감생심 맘에 있고 없고 가 뭔 소용 있어요? 이거 금식 씨 맘 상하지 않게 언니가 얘기 좀 잘해서 돌려줬으면 해서 뵙자고 했어요.”


“그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런 일을 질질 오래 끌면 안 되지. 허먼, 내 시방 휑하니 댕겨오겠네.”


보자기를 들고 바삐 걷는 엄마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참고 아줌마네 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엄마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새 다녀왔어요?”


“양악 댁한테 대충 자네 의중만 전하고 선걸음에 돌아왔네.”


“금씩 씨가 암말도 안 해요?”


“다행히 금식이는 마실 가고 집에 없더만.”


“금식 씨 어머님 많이 놀라시지요?”


“어두워서 안색을 살피지 못했지만 반쯤 넋 나간 사람 같더구먼.”


“그 어른이나 언니한테 죄스럽고 미안해 고개를 들 수가 없네요.”


“별소릴 다 하네, 그게 어디 동생 잘못인가? 이 일은 우리끼리만 알고 깨끗이 잃어버리세. 남 말하기 좋아하는 입방아 오르내리면 두 사람 입장만 난처할 테니”


‘그래야죠. 아무튼, 하루라도 빨리 금식 씨에게 좋은 사람이 나서야 할 텐데.”


“근게 말이여. 부디 하루빨리 그랬으면 오죽 좋겠는가? 나 그만 가볼 라네. 자네도 맘 상하지 말고. 조끔 더 있다 가면 좋겠지만 동생이 알다시피 요새 자들 아버지가 병이 도져서......”


엄마가 아줌마를 혼자 두고 가는 게 안 되었던지 한마디 덧붙였다.


“참, 혹여 양악 댁이 동생에게 뭐라고 듣기 싫은 소리 하더라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당최 맘에 담아두지 말게. 하기야 그 성님 속이 깊은 사람이라 뭐라고 할 사람은 아니지만.”




언니와 오빠가 학교에 가고 우리는 모두 고구마밭으로 향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고구마를 캐는 동안 나는 뽕나무 그늘 밑에서 동생을 보는 임무가 주어졌다.


처음엔 방이 비좁다고 사방으로 기어 다니던 동생이 어느 날부터 밥상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더니 손을 잡아주면 한발 두발 위태롭게 떼기도 한다. 그런 동생은 이제 손을 잡아주지 않아도 두 팔을 강시처럼 앞으로 쭉 뻗고 넘어질 듯 뒤뚱거리면서 혼자 걷는다. 동생은 내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넘어져 울음을 터뜨린다.


“덕이 뭐하냐. 애기 넘어져 울잖아.”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며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밭고랑에 엎어져 고구마밭이 떠나갈 듯 울어대는 동생을 안아 일으킨다. 온몸이 흙투성이인 동생을 보니 슬그머니 화가 치민다.


“잘 걷지도 못하면서 가만히 있지 왜 자꾸 기어나가?”


엄마가 하던 것처럼 동생을 나무라며 흙을 손으로 대충 털고 동생을 거칠게 잡아끈다. 동생은 금방 숨이 넘어갈 듯 자지러지더니 몸을 뒤로 젖히며 운다. 어찌나 큰 소리로 우는지 목젖이 다 들여다 보인다. 동생을 안고 다독여 보지만 동생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울어라,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


너무나도 밉살맞은 녀석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꼬집어 버렸다. 소리를 더 높여 우는 동생을 보고 밭둑에 주저앉아 덩달아 울고 말았다.


“쯧쯧, 고구마 좀 캐려다 애들 잡겠네. 일 좀 늦게 하더라도 즈 어머니가 잠깐 가서 젖 좀 물리지 그래.”


아버지의 말에 엄마는 일손을 멈추고 나를 쏘아본다.


“내가 참말로 못살아. 저놈의 가시내 나이나 적어? 일곱 살이나 퍼먹은 것이 동생 하나도 제대로 못 보니 어따 쓸랑가 몰라. 옛날 같으면 일곱 살이면 밥도 실컷 해먹을 나인데.”


그러면 그렇지, 엄마가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이상하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들리지 않게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우리 곁으로 온다. 엄마를 보자 동생은 생글거리며 두 팔을 벌리고 엄마의 다리에 덥석 가 안긴다.


“오냐! 내 강아지,”


엄마는 동생을 번쩍 안아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다. 우리 사 남매 중 엄마는 나를 제일 미워한다.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런 현실이 서럽기만 하다. 엄마가 젖을 동생에게 물리면서 다정한 표정을 짓다가도 나를 보는 눈길은 싸늘하다 못해 찬 바람이 분다.


“그만 뚝 그치지 못해. 시방 뭘 잘했다고 울고 자빠졌어. 아무리 내 속으로 낳지만 누굴 닮아 너는 그렇게 아둔하냐? 지 언니나 오빠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좀 좋아.”


엄마는 듣기 싫은 그 말을 또 한다. 다리 밑에서 울고 있는 내가 너무나 불쌍해 아버지가 안고 와 어쩔 수 없이 키웠다는 엄마의 말을 떠올리고 나는 울음소리를 높인다.


“시끄러, 지 에미가 죽으면 아마 저렇게 서럽게 안 울 거야.”


아버지가 낫으로 깎은 고구마를 내 손에 들려주며 엄마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인다.


“덕아 이 고구마 먹고 그만 울 거라. 금방 캔 고구마라 참말로 달고 맛있다.”


아버지의 그 말 한마디에 내 설움은 그만 봄눈 녹듯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우리 강아지 착하지, 젖 많이 먹고 누나하고 놀고 있게. 그래야 엄마가 일을 얼른 끝내지, 몸도 성치 않은 느 아버지 혼자 저 넓은 밭 고구마를 캐자면 얼매나 힘이 드시겠냐, 알겠는가? 내 새끼!”


엄마가 밭으로 가자 남동생은 다시 버둥거리며 칭얼거린다. 막무가내로 버둥대는 남동생을 제어하기가 너무나 버겁다. 동생을 얼리고 달래느라 이마에 땀이 송송 솟구쳤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참는다. 그건 엄마 말처럼 몸도 성치 않은 아버지 혼자 일을 하게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를 향한 남동생의 집요한 노력은 지칠 줄을 모른다. 잠시 후 가뜩이나 약한 내 인내심은 그만 한계를 드러내고, 동생을 안고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하는 수 없었던지 엄마가 다시 다가와 동생을 안으며 물으셨다.


“얘 보는 게 그렇게도 힘드냐?”


“내가 아무리 달래도 말을 안 듣잖아?”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엄마가 등을 보이며 돌아앉자 남동생이 두 팔을 벌리며 엄마의 목을 끌어안으며 덥석 업힌다. 엄마는 포대기를 접어 동생을 업자 동생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그제야 나는 떼보며 울보 동생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신 아버지가 캐어 놓은 고구마를 삼태기에 주워 담는 것을 도왔다. 갓 캐어낸 보랏빛 고구마는 그 빛깔이 너무나 예쁘다.


“앞에서 왔다 갔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저 밭둑에 앉아 고구마 순이나 따거라.”


내 딴에는 돕는 일이었지만, 엄마는 그런 내가 오히려 거추장스럽단다.


“알았어. 근데 고구마 순은 따서 뭐해?”


“말려놓았다가 시한(겨울)에 나물로 볶아먹고 또 정월 대보름날 무쳐 먹지.”


아버지가 엄마 대신 말했다.


고구마 순을 따는 일쯤은 나도 잘할 수 있다. 고구마 넝쿨에서 순을 똑똑 뜯어내면 하얗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나온다. 잎 부분은 위쪽으로 줄기는 아래로 향하게 차곡차곡 쌓는 나를 흘깃 바라본 엄마가 말했다.


“이파리는 뜯어내고 줄거리만 따.”


“왜?”


“어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넌 어떻게 된 애가 따지기부터 하냐? 이파리는 못 먹으니까 그렇지.”


엄마는 언제나 그런다. 그러나 고구마 순을 따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한동안 쭈그리고 앉아 단순한 동작을 계속하다 보니 목도 아프고 다리도 저리다. 발이 저려 벌써 몇 번째 손가락에 침을 묻혀 콧등에 발랐는지 모른다. 고구마 줄기에서 나온 하얀 액체가 묻은 손가락 끝이 새카맣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엄마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나, 고구마 순 그만 딸래. 팔도 아프고 다리도 저려 죽겠어.”


“그것도 일이라고 그 새 팔이 아파?”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시면서 물었다.


“아냐, 내가 얼마나 많이 땄다고, 저 봐! 저렇게 많이 따놓았는데,”


“참말 많이 땄네. 이제 그만해라.”


“덕이, 너는 고구마 순 따라니까, 왜 또 밭에서 알짱거리는 거냐?”


엄마는 내가 잠시도 노는 꼴을 보지 못한다. 엄마에게 일을 그만 시키라고 말해달라는 뜻으로 아버지 옆구리를 꾹 찔렀다.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시더니 허리를 펴시며 말했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어. 어린것이 팔 아픈데 그만하면 됐어.”


엄마는 나를 흘겨보곤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다. 엄마는 내게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이지만 나는 호랑이 같은 엄마한테 혼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우리 집안의 자랑인 오빠와 내가 다툴 때 하늘 같은 오빠에게 대들었다고 혼을 내는 엄마와 달리 다 큰 놈이 왜 동생하고 다투느냐고 오빠를 나무라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있어 정말 행복했다. 엄마에게 혼날 일이 있으면 아버지가 올 때까지 집 밖에서 기다렸다가 아버지와 함께 들어가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 오다가 보니께 저 아래 길옆 보리똥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었더라. 심심할 텐데 가서 그거나 따먹고 놀거라.”


아버지가 가리킨 곳에 빨갛게 익은 보리똥나무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가을은 온통 먹을 것 천지다. 보리똥나무 가지를 잡아당겨 한 주먹 딴 열매를 입에 넣었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향기가 입안 가득하다.


한참을 그렇게 정신없이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나는 아버지와 엄마에게 드리기 위해 주머니에 보리똥 열매를 넣지만 주머니가 너무 작아 조금밖에 담을 수 없다. 생각 끝에 가지를 통째로 꺾어가기로 했다. 내 깜냥에는 꽤 많은 양의 보리똥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고구마밭으로 향했다.


“아부지, 이것 먹어봐. 아주 맛있어.”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씀하신다.


“나는 됐다. 너나 많이 먹고 아프지 말고 쑥쑥 크거라.”


“아주 달고 맛있다니까 쪼금만 먹어봐.”


바짓가랑이를 잡고 조르자 아버지는 보리똥 가지를 받아 들고 몇 알 따서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우리 덕이가 따온 거라 더 맛있구나!, 네 엄마도 갖다 드려라.”


“엄마껀 여기 있어.”


나는 싫다며 고개를 외로 꼬는 엄마의 입에 넣어드렸다. 고운 숨을 쉬며 낮잠을 자는 동생 곁에 앉아 보리똥 열매를 따먹는다. 보리똥 열매는 크기가 콩알만 하고 빛은 붉지만 마치 파리가 똥을 눈 것처럼 하얀 점이 많아 언뜻 보면 분홍색처럼 보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고 지천으로 피어있는 갈꽃을 한 아름 꺾는다. 연보라색 들국화는 아줌마가 좋아하는 꽃이다. 이 꽃을 아줌마에게 갖다 드리면 ‘내 맘을 알아주는 것은 역시 우리 덕이 뿐이로구나.’ 라며 좋아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줌마는 전주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하여 집에 없다.


엄마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아줌마는 자궁에 혹이 생겨 수술을 받아야 한단다. 자궁을 들어내면 앞으로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이라며 시집가기 영영 틀린 것 아니냐고 걱정하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혹시 수술이 잘못되어 아줌마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된다.


엄마는 거만하게 뒷짐을 지고 주근깨가 다닥다닥한 나리꽃을 좋아한다. 언니는 풍요로우면서도 정열적인 달리아 꽃이 제일 예쁘단다. 정열적이란 뜻이 무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언니가 좋아하는 걸로 미루어 그리 좋은 뜻은 아닐 것이다. 나는 족두리 꽃이 가장 예쁘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슨 꽃을 좋아하실까? 갑자기 궁금해진 내가 아버지에게 큰소리로 묻는다.


“아부지! 아부지는 세상에서 어떤 꽃이 젤로 이뻐?”


내 물음은 곧 산골짜기에 울리고 이내 에코가 내 목소리를 흉내 낸다.


언젠가 메아리에 대해 오빠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오빠 대신 언니가 나서서 말했다.


“그건 내가 이야기해줄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메아리에 대한 이야기야.”


“그리스 로마 신화?”


오빠와 내가 동시에 묻는다.


“그래, 그리스 로마 신화!”


언니가 의젓하게 그러면서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게 뭔데?”


“너는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옛날 서양에 그리스와 로마라는 나라가 있었어.”


언니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또 잘난 체를 한다.


“너도 나만 할 때는 잘 몰랐잖아! 나도 언니 너만큼 크면 너보다 훨씬 더 많이 알 거다. 공부도 못하는 게 눈곱만큼 안다고 말끝마다 때리고 지랄이야. 나 언니 너한테 그딴 거 더러워서 안 들을 거다.”


내가 삐쳐 돌아서자 다른 때 같으면 ‘그래라, 그럼 너만 손해지.’라며 얼씨구나 할 언니가 웬일로 나를 붙잡으며 공책을 펼쳐가며 친절하게 말했다.


“미안 미안. 아주 옛날 신들의 나라인 서양에서 있었던 이야기야. 물가의 요정 에코는 너무나도 잘생긴 양치는 목동 나르시스를 너무나도 좋아했대. 그렇지만 나르시스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던 에코는 몰래 숨어서 나르시스를 바라보며 짝사랑을 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에코는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보게 되었어. 에코에게 들킨 제우스는 이 일을 눈감아 주면 후한 상을 주겠다고 에코에게 제의를 했대. 에코는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어. 그런데 문제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나중에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이야. 헤라는 후한 상에 눈이 멀어 제우스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자기에게 알려주지 않은 에코가 괘씸해 참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헤라는 에코를 불러다 추궁을 헸어. 그런데 에코가 거짓말로 변명만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헤라는 에코에게 저주를 내리고 말았어. 너는 앞으로 평생 남의 말만 따라 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말이야. 그래서 에코는 남의 말만 따라 하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단다. 에코는 나르시스를 너무나도 사랑해 그 뒤를 쫓아다녔어. 어느 날 에코는 나르시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로 작정을 했단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에코는 좋아한단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그건 헤라의 저주로 인해 나르시스의 말만 따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야. 에코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울다 지쳐 그만 죽고 말았단다. 제우스는 자신으로 인해 죽은 에코를 가엽게 여겨 에코를 산의 메아리로 만들어 줬단다. 그 후 사람들은 메아리를 에코라고 부른단다. 에코가 영어로 메아리란 뜻이란다.”


언니의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그 에코란 요정의 마음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것은 버버리 아저씨가 아줌마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것일 테니까.


“그럼 에코가 사랑한 나르시스는 어떻게 되었어?”


오빠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언니에게 물었다.


“에코의 동료 요정들이 에코가 죽은 것은 나르시스 때문이라 생각하고 나르시스에게 저주를 내리고 말았지. ‘너는 앞으로 너의 오만함 때문에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물에 비친 너의 모습만 사랑할 것이다.’ 나르시스는 자신이 요정들의 저주에 걸린 줄 까맣게 모르고 어느 날 연못에서 물을 마시려다 연못에 비친 너무나 멋진 자신의 모습에 그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지 뭐냐. 너무나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에 반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는데, 나르시스가 죽은 자리에 다음 해 예쁜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수선화란다. 그래서 수선화는 물가에 피는 거란다.”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오빠는 언니가 읽었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매료되어 그 책을 빌려다 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하였다. 하지만 그 책이 있는 곳은 안성장터를 통틀어 진자 언니 네 집뿐이었다. 그러나 진자 언니가 자기 아버지가 책은 함부로 빌려주는 게 아니라고 했다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은 후 산에서 메아리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물의 요정 에코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생각나 메아리가 된 에코가 내 곁에 떠도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곤 했었다.




내 질문에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손 나팔을 만들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부지! 아부지는 세상에서 무슨 꽃이 젤로 이뻐?”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에 생기는 파문처럼 골짜기에 퍼져나갔고 가엾은 에코는 내 말을 따라 했다.


아! 가엾은 에코.


그제야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허리를 펴신 아버지가 큰소리로 대답하셨다.


“나는 이 세상 꽃 중에서 우리 덕이가 젤로 이쁘다.”


아버지의 그 말에 내 마음은 새하얀 구름이 되어 하늘을 두둥실 떠다닌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얼굴을 붉히며 짐짓 태연한 듯 다시 묻는다.


“아이, 그게 아니라 어떤 꽃을 좋아하냐니깐?”


“우리 덕이가 세상 그 어떤 꽃보다 가장 이쁘다니까 그러네.”


아버지는 다시 한번 똑똑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무나 뜻밖의 대답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너무나도 기뻐 실성한 사람처럼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추며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내가 정말 아버지 말씀처럼 꽃같이 예쁜 아이였다면 아마 난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예쁘다는 말과 거리가 먼 아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주면서 언니는 말했다.


‘덕이 너는 내 동생이지만 암만 뜯어봐도 예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냐? 대체 누굴 닮았는지 몰라? 눈도 생기다 말았는지 단추 구멍만 하지, 그렇다고 코가 크냐, 거기다 입은 닭똥구멍같이 작지. 기왕에 태어나려면 나나 양호처럼 이쁘게 태어났으면 좀 좋았겠냐?”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을 하며 머리를 쥐어박는 언니가 정말 밉다. 그러나 언니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언니 말처럼 기왕 세상에 태어날 바에야 좀 예쁘게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건 언니보다 내가 더 간절하게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말하는 언니는 빼어나게 예쁘지는 않지만, 커다란 눈과 시원시원한 생김새로 젊은 사람들에게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다. 언니와 오빠 남동생도 눈이 커 왕눈이 형제라고 부르는데 유독 나만은 언니의 표현대로 찢어진 눈이 영락없는 단추 구멍 같다며 돌연변이가 분명하단다.


나는 대체 누구를 닮았는지 궁금했다. 6척 장신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한 아버지를 닮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체격은 왜소하지만, 동글납작하고 곱상한 엄마와도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 식구 중 가장 못생겼다고 자타가 공인받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단다. 따뜻한 바위에 기대앉아 아버지의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골백번도 넘게 생각해봐도 기분이 너무나 좋다. 바람이 억새풀을 살며시 쓰다듬는다.


“잘 들어, 우리 아부지가 그러는데 울 아부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꽃이 바로 나래,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도 바로 나고.”


내 뺨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바람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거짓말!”


바람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샐쭉한 표정의 언니처럼 나를 흘겨본다.


“참말이다! 이 바위한테 물어봐라. 이 돌도 듣고, 국화도 듣고 산도 모두 다 들었으니까.”


“그게 참말이니?”


억새풀과 들국화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었다.


“거봐. 참말이지.”


그러나 내가 그렇게 어깨를 으스대며 말했을 때, 바람은 이미 저 건너 숲으로 달아나 버리고 난 뒤였다.


“덕아! 점심 먹자.”


엄마가 부르지 않았더라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아마 바위 뒤에 숨어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을 것이다.


촐랑거리며 개울가 납작한 돌 위에 쪼그리고 앉는다. 개울물이 맑아 물속 바위와 모래가 다 보인다. 손을 씻고 막 일어서려는데 바위 밑으로 가재 한 마리가 들어간다. 얼른 주저앉아 가재가 들어간 바위를 살그머니 집어 든다. 흐려진 물이 점차 맑아지면서 모습을 드러낸 가재가 움직인다. 나는 물리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면서 가재를 덥석 움켜쥔다.


“가재 잡았냐?”


손을 씻으러 온 아버지가 물었다.


“응, 아부지, 이것 봐. 엄청 커.”


“놔줘라.”


“싫어. 내가 잡았는데?”


“아따 그놈 크기도 하네, 이 큰 집게로 물면 손가락이 뚝 끊어져 피가 철철 나겠구나.”


가뜩이나 가재에게 물릴까 봐 조심을 하던 나는 얼른 가재를 아버지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부지, 나 무서워. 아버지가 들고 있어.”


“그럼, 놔주는 거다?”


아쉽지만 하는 수 없다. 나는 아버지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예뻐해 주는 아버지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버지 손에서 풀려난 가재는 재빨리 바위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엄마가 광주리에서 밥과 반찬을 꺼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메주콩을 볶아 만든 콩장, 열무김치, 장아찌, 풋고추와 고추장도 빠뜨리지 않았다. 밥도 내가 좋아하는 팥밥이다.


나는 잡곡밥을 싫어하지만 팥밥과 강낭콩 밥은 좋아한다. 언니나 오빠도 그렇다. 어쩌다 강낭콩 밥을 지으면 우리는 밥알을 헤치며 강낭콩을 식기 뚜껑에 골라놓았다. 나중에 심심할 때 간식으로 먹기 위해서였다. 모처럼 팥밥을 보자 배가 더 고픈 거 같다. 엄마는 밥을 먹기 전 음식을 조금씩 덜어 고시레 하고 사방으로 던진다.


언젠가 고시레가 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그러셨다. 우리가 이런 음식을 먹게 해 주신 땅 신과 천신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먼저 음식을 올리는 의식이라고.


“고시레,”


오늘도 아버지와 엄마가 밥과 반찬을 조금씩 덜어 이곳저곳으로 던진다. 쑥스럽지만 나도 따라 한다.


“엄마! 오늘 누구 생일이야?”


“새똥 빠지게 생일은 무슨 생일?”


엄마가 수저 끝으로 고추장을 찍어 먹으면서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본다.


“아무 날도 아닌데 흰쌀밥을 먹으니까 이상하잖아.”


“흰쌀밥 먹으니 좋냐?”


“그럼, 우리 맨 날 맨 날 이렇게 흰쌀 밥만 먹고살았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구름 한 점 없어 더 높아 보이는 하늘을 보고 한숨을 내쉬셨다.


“밥 먹을 때 지껄이면 복 달아난다. 즈 아버지 막걸리 한잔 따라드릴까요?”


“그거, 좋지.”


엄마는 주전자를 흔들어 사발 가득 막걸리를 따라 아버지에게 건네며 말씀하셨다.


“갸가 시방까지 살았더라면 올해 열다섯이 되었겠지요.”


“벌써 그렇게 됐나? 우리 자식 되기 싫어 그렇게 일찍 부모 형제를 버리고 떠나간 놈 생각하면 뭘 해. 괜히 맘만 아프지.”


막걸리를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단숨에 들이마신 아버지는 입가를 훔치셨다. 풋고추를 집어 들며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신다.


“생각 안 하려 애를 써도 해마다 이맘때면 자꾸만 눈에 밟히네요. 팥밥을 그렇게도 좋아했는데.”


나는 그제야, 엄마와 아버지가 오래전에 죽은 오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엄마는 장안리로 시집간 큰언니 밑으로 아들 둘을 내리 두셨다. 그런데 둘 다 대여섯 살이 무렵 홍역을 앓다가 잃었다고 했다.


긴긴 겨울밤 오빠가 호롱불 앞에서 바느질하는 엄마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엄마는 오래전에 죽은 두 오빠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시곤 했다. 이야기 도중 엄마의 목이 잠기면 덩달아 우리도 목이 메곤 했었다.


“느 성들이 얼마나 잘 생기고 영리했는지 모른다. 네 큰 성이 다섯 살 먹던 해 가을이었다. 구천동 골짜기에 사시던 외삼촌이 장터에 볼일이 있어 우리 집에 잠깐 들렀지. 어른들은 모두 밭에 가고, 그 어린것 혼자 마루 끝에 걸터앉아 뭔가를 꼼지락거리고 있더란다. 외삼촌이 성 곁에 걸터앉으며 뭐냐고 물으니 네 성이 그러더란다. ‘고추 골라요. 외삼촌. 외삼촌이 가만히 보니 그 어린것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루에 있는 고추를 빨간 고추 따로, 파란 고추 따로 고춧잎은 고춧잎대로 또 따로 각각 다른 소쿠리에 골라 담더라는 거야. 어린애 하는 짓이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해서 느 외삼촌이 다시 물었대. 엄마가 이렇게 하라고 시키대? 그랬더니 네 성이 고개를 살래살래 옆으로 흔들면서 이러더래. 외삼촌! 엄마가 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와서 저녁에 하려면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잖아요. 그래서 외삼촌이 또 물었다지. 근디 어째서 빨간 것과 파란 것, 그리고 이파리를 따로따로 고르는 거냐?’고, 그랬더니 느 성이 그 초롱초롱한 눈으로 외삼촌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래. 빨간 고추는 말려서 가루를 빻아야 되고, 파란 고추는 장아찌를 담거나 솥에 찐 뒤 밀가루를 묻혀 말려야 하고, 이파리는 말려두었다가 시한에 나물로 무쳐 먹어야 하니께요. 그런 네 형을 보고 외삼촌은 할 말이 없더란다. 누님, 석호는 나중에 커서 머시 되려는지 참말 모르겠당게요. 내가 이 나이 먹도록 그렇게 많은 동네를 댕기면서 똑똑하고 영리하다는 애들 숱하게 많이 봤지만 우리 석호 같은 얘는 첨 봤당게요. 네 성은 그런 아이였다.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으면 느네들이 얼매나 든든했었겠냐?"


그 일 말고도 죽은 두 오빠의 특별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엄마, 그럼 오늘이 오빠 생일이야?”


엄마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생일이 아니라, 오늘이 바로 네 큰오빠가 저세상으로 간 날이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려고 한다. 지금까지 내가 태어나기 전 죽은 두 오빠를 그리워 한 일도, 그들이 내 오빠였었다는 사실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두 오빠에 대한 기억은 엄마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아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오빠를 기리기 위해 엄마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고 있다. 나는 두 오빠가 엄마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 아닌 나와 한 형제이며 가족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남동생이 잠에서 깨어 칭얼거리며 일어난다.


“아이고, 우리 새끼! 밥때는 용케 알고 밥 먹으려고 깼는가?”


엄마는 짬짬이 밥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동생에게 뱉어 준다. 엄마가 뱉어 주는 밥을 넙죽넙죽 맛있게 받아먹는 동생은 위아래 합해 모두 네 개의 이가 났다. 웃을 때마다 하얀 이가 드러나는 동생이 너무나 귀엽다.


점심 식사 후 곧바로 엄마와 아버지는 밭으로 향했고 동생을 보는 일은 내 차지다. 동생은 지난 장날 외삼촌이 사준 장난감을 흔들며 놀고 있다. 점심을 먹은 뒤라,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내게 동생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줄 모른다. 동생이 없다면 이렇게 졸릴 때 나무 그늘 밑에 누워 늘어지게 잘 수 있을 텐데. 누가 장난꾸러기가 아니랄까 봐 동생은 딸랑이를 흔들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즐거워한다.


그런 동생이 얄미워 머리를 쥐어박는다. 그러나 동생은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장난감을 흔든다. 약이 올라 조금 더 세게 쥐어박는다. 그러자 동생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다.


“아가! 울지 마. 옳지 착하지.”


재빨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동생의 엉덩이를 토닥거린다. 동생은 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소리를 지르며 노느라 정신이 없다.


휴! 다행이다. 전에도 가끔 엄마 몰래 동생을 꼬집거나 때린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동생은 숨이 넘어갈 듯 울었고 나는 엄마한테 혼이 났다. 엄마는 보지 않아도 내가 때려서 우는 건지 그냥 우는 건지 귀신같이 알아냈다.


오전 내내 그렇게도 맑고 화창하던 하늘에 양떼구름 가족이 소풍을 나와 한가롭게 우리를 지켜본다. 학교를 마친 오빠와 언니는 물론 이순 언니까지 책보를 맨 채 밭으로 왔다. 언니와 이순 언니까지 거들자 일이 훨씬 수월하고 빨라졌다. 기운이 센 이순 언니 열세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키도 엄마보다 더 크고 힘도 세 웬만한 어른 몫은 너끈히 해낸다. 언니와 이순 언니는 아버지가 밭고랑에 파헤쳐 놓은 고구마를 삼태기에 담아 밭둑으로 날랐다.


“이순이 너 집에 일찍 안 가봐도 되냐?”


엄마는 일 잘하는 이순 언니가 거드는 것이 내심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되는 눈치다. 바쁜 농번기 때에는 아궁이에 있는 부지깽이도 들에 나가 일을 거든다는 말처럼 가을걷이로 바쁜 요즈음 어느 집이나 막론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오늘 학교에서 늦게 끝난다고 할머니한테 이야기하고 왔어요.”


“그래도 그런 거짓말 하면 못쓴다. 서울 간 느네 성한텐 편지는 자주 오냐?”


이순 언니 바로 위, 그러니까 일순이 언니는 국민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 다닌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순이의 유일한 자랑이 일순 언니가 서울서 공장에 다닌다는 것이다.


“우리 큰언니가 지난 추석 때 서울서 이 옷 사 왔다! 너는 이런 거 없지?”


나하고 무슨 일로 다투다 자신이 불리해지면 사순이는 지네 언니가 서울에서 공장에 다닌다고 거들먹거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나쁜 계집애!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내가 아니다. 비록 친언니는 아니지만 사촌 언니인 금자 언니가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그런 거 무지 많이 있네, 느네 언니만 서울에 갔냐? 우리 금자 언니도 서울에 있다.”


“느네 금자 언니는 남의 집 식모살이 한대며?”


사순이의 말에 내 억양은 사뭇 높아진다.


“왜 식모살이가 어때서?”


“우리 언니가 그러는 데 식모살이는 아니꼽고 더러워서 못 해 먹는다고 그러더라. 남의 집에서 밥과 청소는 물론 잔심부름까지 다 해야 하고.....”


사순이는 그렇게 말하며 약을 바짝바짝 올린다. 나는 사순이에게 마땅히 할 말이 없다. 공장이 무얼 하는지, 또 일순 언니가 공장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모가 하는 일은 너무나 잘 안다. 호로리에 사는 언니 친구 점순 언니가 대성상회에서 식모를 살고 있어 식모가 하는 일은 다 알기 때문이다.


“시상에 아까 개울가에서 보니께 점순이 손이 얼어서 터져 피가 다 나오더라. 부모 잘 만났으면 해주는 밥 먹고 학교나 다닐 나이에, 어린 게 참 안되었지 뭐냐?”


어쩌다 장터나 빨래터에서 점순 언니를 보고 온 날이면 언니한테 들으라는 듯 엄마는 혀까지 끌끌 차며 말했다. 남의 집 식모로 허드렛일을 대신해주며 주인 눈치 보고 사는 일인 만큼, 사순이 말처럼 아니꼽고 더러울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금자 언니는 왜 일순 언니처럼 공장에나 다니지 왜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순이 말에 의하면 일순 언니가 공장에서 번 돈을 꼬박꼬박 부쳐주어 사순 네는 논도 사고 송아지도 두 마리나 샀단다.


그런데 이순 언니도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일순 언니가 있는 서울공장으로 갈 거라며 사순이는 지금부터 자랑이 대단하다. 우리 언니도 이순 언니처럼 서울에 있는 공장을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언니는 내년에 중학생이 될 거라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있다.


“암튼 이순이 니가 괜찮다니께 나는 그렇게 믿으마, 그리고 너 이따 집에 가서 행여 우리 고구마밭에 와서 일 거들었단 말 헛버도 하면 안 된다. 접때처럼 느네 할머니 역정 내신 게. 알겠냐?”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지가 뭐 한두 살 먹은 어린앤가요.”


“하기야 이순이 너는 원체 속이 깊은 게. 근데 이순이 너도 학교 졸업하면 서울 올라간담서?”


“예.”


“너는 서울로, 진자는 전주로 가버리고 나면 눈만 쥐어뜯으면 셋이 형제처럼 붙어 댕기다가 우리 순자 혼자 끈 떨어진 두름박 맹키로 혼자 안성장터에 남겠구나.”


아버지는 두 언니가 모아 놓은 고구마를 지게 위 바지게 담아 집으로 져 나르기 시작했다. 벌써 몇 번째 집과 밭을 오갔는지 모른다. 어느새 남동생의 놀이터는 가마니 위에서 밭고랑으로 변해 버렸다. 나도 짬짬이 밭고랑에 흩어져있는 고구마를 주워 나른다. 두 언니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까르륵까르륵 꽈리를 불 때처럼 웃음을 쏟아내며 고구마 순을 따고 있다.


해가 설핏 서산으로 내려앉으며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을 펼쳐놓았다. 서쪽 하늘이 온통 핏빛이다.


“오빠! 저 하늘 좀 봐! 하늘이 너무나 빨갛다. 아마도 해님이 어디를 다쳐 피를 많이 흘렸나 봐.”


내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자, 언니와 오빠는 물론 엄마까지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와! 참말 멋지다!”


언니가 탄성을 지르며 좀처럼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늘이 사람이냐? 피를 다 흘리게. 저런 것을 바로 노을이라고 하는 거야. 저녁노을.”


“저녁노을?”


“그래, 저녁놀”


하지만 오늘은 오빠의 핀잔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노을이 진 서쪽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이다. 노을을 바라보노라니 까마득히 잊었던 선녀가 생각났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으로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할 수만 저 하늘로 올라가 저곳에서 영원히 살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오빠가 읽어준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이야기에 나오는 선녀처럼 날개옷이 있다면 훨훨 날아 저 핏빛 바닷속으로 퐁당 빠져들 텐데.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엄마도 보지 않을 것이고, 동생을 보는 지긋지긋한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달콤한 상상을 지속할 수가 없다.


“이제 그만들 하거라. 고구마 줄거리는 한쪽에 잘 모아 놓고, 순자 너는 느 동생 업고 이순이랑 더 어둡기 전에 얼른 내려가서 저녁쌀이나 안쳐놓고.”


“엄마는 언제 올 건데?”


몸을 뒤로 젖히며 심통을 부리는 남동생을 달래 언니에게 업혀주며 엄마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 오시면 마무리하고 곧 따라갈 팅게.”


오빠는 나중에 엄마와 함께 오겠다며 밭에 남았다. 두 언니 뒤를 따라 집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무겁다. 집에 어른들이 없으면 언니는 자신이 할 일을 나한테 시킨다. 때문에 나도 밭에 남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잔소리 말고 느 성 따라가 동생이라도 봐. 그라고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이순이 너, 혹시라도 우리 집으로 갈 생각하지 말고 곧장 느네 집으로 가야 한다. 알겠냐?”


엄마는 언니가 이순 언니에게 저녁을 시킬까 봐 미리 주의를 했다. 내 기분과는 무관하게 하늘은 점점 더 빨갛게 익어간다. 어찌나 빨갛던지 흰 구름조차 붉게 물들어 버렸다.


내게 날개옷이 있다면 하늘로 날아올라 다시는 내려오지 않을 텐데. 그러나 하늘은 내게 너무나 멀다.




양악 댁이 초주검이 된 얼굴로 엄마를 찾아온 것은 늦은 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 버버리 아저씨가 아파서 다 죽게 생겼다는 것이다. 마루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양악 댁 아줌마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용자 엄니, 암만해도 우리 금식이가 가슴앓이를 단단히 하는가벼. 그날 저녁 용자 엄니가 가져온 옷감을 본 뒤부터 곡기를 끊고 이불을 쓰고 누워 꼼짝달싹도 안 한당게요.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나 혼자서 속을 끓이다 하도 답답하고 폭폭혀서 이렇게 용자 엄니를 찾아왔네요.”


“그게 참말이에요? 그래서 뒷골 금식이 네 고구마밭에 고구마가 여태 그대로 있었고만요. 그렇지 않아도 금식이 몸이 아픈가 보다고 즈 아버지가 아침나절에 금식이네 고구마밭 옆을 지나가면서 그러더니만, 그런 일이 있었고만요.”


“말 못 하는 우리 금식이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용자 엄니도 지켜보았으니까 누구보다 잘 알 거여. 근디 저렇게 술집 여자 땜에 머리를 싸매고 앓아누워있는 걸 보니께 속에서 천불이 활활 난다니까 참말로.”


양악 댁 아줌마는 눈물과 콧물을 치맛자락으로 훔쳤다.


“참말로 그거 큰일이고만요. 그래서 어쩐 대요? 이러자는 말도 저러자는 말도 안 나오네요. 금식이는 대체 뭐래요?”


“남원관 집 여자가 자기를 받아주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네. 그전에도 툭하면 남원관 집 여자가 아니면 절대로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기에, 그냥 해보는 소리겠지 싶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었더니 시방 보니께 그게 아니랑게. 그러니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아무리 우리 금식이가 말 못 하는 병신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총각 아닌가요, 세상에 쌔고 쌘 여자 중에 하필이면 술집 여자냔 말이여, 그것도 그렇지만 남원관 집 여자가 어디 혼자 몸뚱이냐고? 군청 박 과장이 요새도 가끔 들락거리는 눈친가 보던데. 박 과장이 우리 금식이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이 돼서 잠도 안 온당께.”


“성님 말을 듣고 본 게 성님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네요. 박 과장 그 사람 성질 불같은 건 무주읍내가 다 아는 사실인 게요. 근데 성님! 그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남원관 집 동상 말로는 이제 참말로 박 과장하고는 깨끗이 끝냈다고 하더만요.”


“그려?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이고만. 해서 하는 말인디.”


“네, 성님.”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금식이가 황소고집 아닌가벼. 저 미련한 놈이 저러다 영영 곡기를 끊고 죽어버리면 어쩌단 말이여?”


“에이,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아녀, 그런 소리 말아. 곡기 끊은 지 벌써 엿새도 넘었다니께 그러네. 그러니 어쩌겠냐? 자식이기는 부모 시상에 없다고. 자네가 남원관 댁 만나서 그 여자 속을 넌지시 한번 떠보면?”


“그럼 성님! 남원관 댁만 좋다면 금식이와 혼인이라도 시킬 생각이에요?”


엄마의 뼈 있는 말에 양악 댁 아줌마의 주름진 얼굴에 잠시 곤혹스러운 빛이 스친다.


“꼭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남원관 댁이 죽는 사람 살려주는 셈 치고 우리 금식이 좀 살려 달라고 부탁이나 한번 해보자는 말이지. 힘들겠는가?”


엄마가 양악 댁 아줌마의 의도를 충분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심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요, 그 사람 비록 술장사를 하지만 행동거지를 보면 반듯한 집안에서 제대로 보고자란 것이 분명하고 배운 것도 많은 거 같은데. 이런 부탁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고만요. 자칫 잘못 말을 꺼냈다가 말을 하지 않은 것만도 못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늦게 염치 불고하고 용자 엄니를 찾아온 거 아닌가벼.”


팔짱을 낀 엄마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성님! 호랭이를 잡으려면 호랭이 굴로 들어가랬다고. 어서 일어나 가서 직접 부딪쳐 봅시다.”


“시방 나랑 같이 남원관 집에 가자는 말이여?”


양악 댁 아줌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께 그 방법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당게요. 내가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서는 이렇고 후는 저렇고 시간을 끌게 아니라 당사자인 성님이 직접 말을 하는 게 백 번 천 번 낫당게요.”


엄마는 양악 댁 아줌마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엄마의 당찬 행동에 양악 댁 아줌마는 잠시 망설인다.


“젊은 여자한테 면전에서 면박이나 당하면 어떡하고?”


“아따, 성님도 참,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거야 성님이 말하기 나름이지요. 그 여자 인정 많고 눈물 많은 건 성님도 잘 알잖아요. 제가 옆에서 거들 테니까 성님이 직접 말해봐요. 그래야 쓸데없는 오해도 안 생기는 법이에요.”


“무식한 내가 어디 말주변이 있는가? 암만해도 다리가 후들거려 나는 못 가겠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당께요. 그럼 성님은 금식이 저대로 굶어 죽게 내비 둘랑가요?”


엄마는 양악 댁 아줌마 소매를 잡아끌고 남원관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아줌마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던 버버리 아저씨는 다음날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남원관 집 아줌마가 술장사를 그만둔 것도 그때부터였다. 버버리 아저씨네 집에 이따금 아줌마가 드나들기도 하였다.


우리 집은 가을걷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윗방 윗목에 수수대로 얼기설기 만든 커다란 통가리에 고구마며 감자가 가득하다. 처마 밑에는 옥수수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바싹 말린 강냉이는 내년에 종자 씨앗으로 쓰거나, 겨울 동안 잡곡밥에 섞어 먹거나, 튀밥이 되어 우리들의 훌륭한 간식으로 거듭날 것이다. 마루 밑에는 감자와 늙은 호박이 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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