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의 추억

삶의 단상 /

by 가야


며칠 전 아버님 기일을 맞아 방앗간 이야기를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방앗간에 대한 추억이 있는 사람은 나처럼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장돌뱅이 허 생원이 젊은 시절 우연히 만난 성 서방네 처녀와 사랑을 나눈 물레방앗간이 먼저 생각난다. 나 역시 그러했다. 물레방아에 대한 기억은 아주 어슴푸레 떠오른다. 안성면을 흐르는 구량천(九良川) 맞은편 하산 마을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그 물레방아를 우리가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다 쓰러질 것 같은 낡은 물레방아였다.


면 소재지인 안성장터에서 5분 거리에 도치 정미소가 있다. 방앗간이라는 상호가 아니라 정미소였다. 이 정미소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운영되고 있다.


명절을 앞두고 대목을 맞아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장터는 사람이 넘쳤다. 장터 초입에 있는 우리 집에는 먼 곳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어린 나는 공연히 신이 났다. 설 명절을 앞두고 떡을 뽑는 일은 신나는 일이었다.


SE-52ded951-6393-45e6-b538-b866995066c9.jpg?type=w1
SE-a00b0fa5-ac99-48b1-9de2-3e7b423bff0e.jpg?type=w1

방앗간에 우리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건 이웃집 오빠가 방앗간에 따라갔다가 피댓줄에 딸려가 팔을 절단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욱한 안갯속에 높은 천장 거대한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피댓줄(벨트)을 방앗간 입구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커다란 공포였었다.


추석 전날 떡가루를 빻아와 송편을 만드느라 부산했고 설날은 며칠 전부터 가래떡을 뽑느라 엄마 말대로 줄을 서야 했다.


그러다 중학교 여름 방학 때 큰언니가 사는 부남면 장안리 상대 곡에 가서 교과서에서 배운 디딜방아를 보았다.


천정에 끈을 매달아 놓고 그 끈을 잡고 두 사람이 발로 밟아 곡식을 빻는 그 원시 형태의 디딜방아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었다. 호기심 많은 나는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여 방앗 다리에 올라서서 힘껏 밟아 보았지만 방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SE-f557bfcb-8715-454c-aeb4-e55b225f71e5.jpg?type=w1


그 후 도시로 이사를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명절 때 방앗간에서 떡을 하는 일도 버거운 일이 되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설 명절 준비 중 가장 큰일이 떡 방앗간에서 떡을 뽑아오는 일이었다. 큰 함지박에 떡쌀을 담가 불린 쌀을 머리에 이고 방앗간에 가는 엄마를 따라 방앗간에 가면 방앗간 앞에는 불린 쌀을 쭉 늘어놓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기다림은 밤새도록 계속되고 우리 차례가 되어 떡을 뽑아 와 엄마가 마루에 함지박을 내려놓기 무섭게 우리 형제들은 너 나 없이 한 가닥씩 들고 베어 물던 그 따뜻하고 쫄깃쫄깃하던 가래떡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떡은 쌀가루를 빻는 일은 방앗간에서 하고 대부분 집에서 직접 했다. 커다란 솥에 물을 붓고 그 위에 시루를 올려놓고 솥과 시루 사이에 밀가루 반죽으로 빙 둘러 가며 수증기가 새지 않게 꼼꼼하게 붙인 다음, 시루에 눈처럼 흰 떡가루를 한 켜 놓고 그 위에 미리 삶아놓아 손질해 놓은 팥을 뿌리고 쌀가루를 또 한 켜 올리고 다시 팥을 흩뿌리는 흰 머릿수건을 쓴 엄마! 그 곁에 앉아 삶아놓은 팥고물을 주워 먹다 엄마에게 주먹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눈물을 글썽이던 어린 내 모습도 눈에 선하다.


전주를 떠난 뒤 떡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어느 해부터 방앗간에서 떡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비닐에 담긴 손바닥만 한 떡을 사서 제사 때며 명절 때 쓰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그 일이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떡 방앗간에서 사 온 손바닥만 한 떡이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있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제사를 내가 지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신경 쓴 것이 떡집에서 떡을 맞추는 일이었다. 늘 초라한 스티로폼에 담긴 떡 대신 시루떡을 미리 주문해 사용했다.


제사상에 오래전 집에서 떡을 쪘을 때처럼 푸짐한 시루떡이 올려졌고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생겼다. 형제들이 시루떡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로서는 신경 써서 떡을 맞췄는데 그 떡을 탐탁지 않아하니 그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올해 아버님 기일에는 모두가 좋아하는 가래떡과 절편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떡 방앗간이 없다. 내가 처음 이 동네에 이사 왔을 때 떡 방앗간이 두 군데나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한 군데가 없어지더니 나머지 한 곳도 작년에 없어지고 그 자리에 4층짜리 신축 건물이 들어섰고 떡 방앗간이 있던 1층에는 예쁜 카페가 들어섰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조금 더 멀리 가 본다. 언젠가 갈산에 다녀오면서 언뜻 떡 방앗간 간판을 본 기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가면서도 마음을 조인다. 그곳마저 없어졌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20220803%EF%BC%BF102132.jpg?type=w1

구시가지를 걷는다. 오래된 건물과 신축 건물이 뒤섞여 있는 길,


저만치 떡집 간판이 아직 남아있다. 빛바래고 페인트칠이 벗겨졌지만 '신정 방앗간'이란 상호가 분명하다. 전화번호도 아주 옛날 사용했던 가운데 국이 세 자리다.


그런데 밖에서 보니 장사를 하지 않는지 캄캄하게 불이 꺼져있다. 조심스럽게 닫힌 문을 두들기다 옆으로 밀어보니 다행히 잠기지는 않았다.


"아무도 안 계세요?"


안으로 들어가 큰 소리로 묻는다.


곧 어둑 컴컴한 곳에서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와 허리가 구부러진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나온다. 방앗간 안쪽에 방이 있었고 할아버지 내외는 그곳에서 기거를 하시는 것 같았다. 가래떡을 뽑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 말을 물으면서도 내심 조마조마했다. 영업을 하는 방앗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해 주겠다고 하신다.


자세히 여쭤보니 나이도 들었고 손님도 없어 가게를 내놓았는데 나가지 않아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처지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버님 기일에 올린 떡을 맞출 수 있었다.


가래떡 한 말 8kg에 3만 원인데 10kg는 3만 5천 원에 해준단다. 나는 가래떡과 제상에 올릴 절편도 부탁하면서 더 받아도 된다고 하였더니 할아버지는 그냥 3만 5천만 받으시겠단다.


기일이 언제냐고 여쭤보시며 그 시간에 맞춰서 떡을 해 놓을 테니 쌀만 가져다 놓으란다. 조금 일찍 해놓으셔도 된다고 하니까, 제상에 올릴 떡인데 시간 맞춰서 따뜻하게 올려야지 무슨 말이냐고 하신다. 너무 감사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귀한 가래떡이다.

20220805_163112.jpg?type=w1

절편도 제상에 놓기 좋게 스티로폼에 홀수로 19개를 맞춰서 만들어주셨다.

20220805_163106.jpg?type=w1

너무 감사한 나머지 돈을 더 드리겠다고 해도 할아버지는 단칼에 거절하신다.


그날 엄청 무더운 날이었는데 수고 많으셨다고 하자,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하시며 웃으신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방앗간을 내놓다는 이야기에 만약 가게가 나가면 두 분은 어디로 가실 건지를 물었다.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환히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위층 우리 집으로 올라가야지요."


"그럼 이 건물이 할아버지 건물이에요?"


할아버지가 그렇다시며 말씀하신다.


"내 가게니까 여태껏 버티고 있었지, 세었다면 나도 벌써 문 닫았을 거야."


이 자리에서 50년을 넘게 방앗간을 운영하신 두 어르신, 이 동네의 산증인이시다.


몇 년 전 지금은 자이 아파트 자리에 있던 한평생 그곳에서 나고 자라 살아왔다던 그 낡은 집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그 낡고 오래된 건물과 풍경들의 사진을 참 많이도 찍었는데, 카메라 고장으로 그 기록은 사라진 할아버지의 집과 그 낡은 동네처럼 모두 없어졌다.


할아버지는 안타까워하셨다. 누군가 방앗간을 맡아 운영할 사람이 나타나면 권리금 하나도 안 받고 기술 전수는 물론 기계며 도구까지 다 그냥 줄 텐데... 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올겨울 음력 11월 7일은 어머님 기일이다. 그때까지 이 떡집이 남아있을 것 같지 않은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 않다.


어쩌면 이 동네의 50년 방앗간의 역사가 사라질 줄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이 방앗간의 마지막 손님이 아닌지...


아쉬운 마음에 작은 기록이라도 남기기 위해 방앗간 내부 곳곳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20220805%EF%BC%BF163152.jpg?type=w1
20220805%EF%BC%BF163125.jpg?type=w1

지금은 흔치 않은 귀한 절굿공이도 보인다.


20220805%EF%BC%BF163140.jpg?type=w1
20220805%EF%BC%BF163130.jpg?type=w1
20220805%EF%BC%BF163143.jpg?type=w1
20220805%EF%BC%BF163115.jpg?type=w1
20220803%EF%BC%BF102129.jpg?type=w1

기계에 붙어있는 명성 기계라는 스티커의 전화번호와 페인트칠이 벗겨져 너덜너덜 해진 방앗간 간판의 전화번호가 이 가게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SE-834da63a-15f8-11ed-8203-b1fcfb6e952e.jpg?type=w1
20220805%EF%BC%BF163337.jpg?type=w1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곱게 늙으신 할머니는 할아버지 앞에서 절대 먼저 나서서 이야기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웃으면서 자랑스럽게 지켜보셨다. 마치 '저 자랑스러운 분이 내 남편이 라우!'라고 하는 것처럼.


그 모습은 오래전 가부장적 제도의 할머니나 어머니들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런데 할머니의 그 모습이 전혀 시대에 동떨어졌다거나 어색하지가 않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보여 보는 내가 당황했을 정도였다.


배우자에게 막말하고 그것이 너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되어버린 오늘날,


배우자를 존경하고 공경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머님 기일까지 과연 이 방앗간은 남아있을까?


걱정 아닌 걱정이 하나 또 생겼다.







keyword
이전 02화비와 우산/ 꿈에서도 갖고 싶었던 빨간 장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