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난 너의 바람을 알고있다

by 산호초

밤마다 친구들이 찾아와 왁자지껄 떠들고 간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조용한 걸 보면 곯아떨어진 게 분명하다. 저녁엔 깨어나서 TV를 킨다. 아무도 놀러 오지 않는 밤이면 예능 출연자가 '억억억억' 웃는 소리가 새벽까지 들린다. 내 방 천장은 당신의 방바닥. 그쪽 사정은 익히 들어 안다. 내가 모르는 건 얼굴과 이름이다. 지금부터 내가 할 험담이 당신 체면을 떨어드리려면 나도, 이걸 읽는 사람도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 성이라도 알면 '위층 사는 이모(某)씨'라고나마 겨냥하겠지만, 그마저도 모르니 '모모(某某)'랄 수밖에.




위층 사는 모모의 일거수일투족은 택시 속 라디오 같다. 마음에 안 든다고 끄라 할 순 없어 그저 들어야 한다. 그쪽 세탁기 소리가 거슬리니 돌리지 말라는 건 패악질이니까. 대신 모모도 제 발 저릴 정도의 소음이 나기만 기다렸다. 그때 가선 얼굴을 마주보고 투덜거릴 생각이었다. 천장에서 드르륵- 드르륵- 돌돌이 소리가 난 어느 새벽. 잠에서 깨니 새벽 세 시였고, 난 마침내 모모의 현관문을 쾅쾅 두들기고 있었다. 저기, 아래층인데요. 너무 시끄러워요. 현관문 너머 잠깐 조용했다. 둔중한 발걸음이 가까워더니 문이 열렸다. 머리가 까치집 같은 남자가 나와 죄송하댔다. 목소리가 걸걸했다.


나라면, 얼굴이 까발려진 이상 민망해서라도 꼬리를 내릴 텐데. 위층에선 또다시 놀자판이 열렸다. 그는 체면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꾀죄죄한 몰골로 나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 우린 한번 더 마주쳤다. 이번엔 1층 가는 엘리베이터에서였다. 문이 열리자 까치집 머리의 남자와 긴 생머리를 드리우고 고개 숙인 여자가 보였다. 난 올라타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에 거의 코를 박고 섰다. 접때 까발려진 얼굴엔 내 것도 있어서였다. 빨리 좀 내려가라고 속으로 염불을 외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자기 친구들은 언제 오냐'고 그랬다. 연인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사이 같다.


그날 밤은 어김없이 소란스러웠고, 위층에서 하는 얘기는 제발로 아래층에 흘러들었다. 콘크리트 벽이나 공기처럼 귀가 없고 무심한 것들을 타고 내게로 왔다. 악의는 없지만 귀가 두 개나 달린 존재다. 난 자주 들리는 몇몇 목소리를 분간하기 시작했다. 까치집 머리의 걸걸한 목소리. 미성의 남자 목소리.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 이건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위층의 사정에 관해 무언가 말해줬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와 대화하는가. 그리고 누가 누구와 말을 섞은 적 없는가. 까치집 남자와 카랑카랑한 여자는 가끔 사랑 싸움을 한다. 남자가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면 여자가 ‘내가 말했었잖아’ 윽박지른다. 카랑카랑한 여자와 미성의 남자는 새벽에 꽁냥거리곤 한다. 남자가 뭐라 말할 때마다 여자가 ‘아 뭐야아아아아’하고 아양을 떤다.


그러나 까치집 머리와 미성의 남자는 대화한 적이 없다. 위층엔 늘 둘 중 하나만 있다. 언제나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자와 함께다.


바로 여기에서, 난 모모의 정체에 관해 무언가 쳐버렸단 걸 직감했다. 위층 현관문을 두드린 날, 거기엔 정말 까치집 머리의 남자뿐이었나? 방 안에서 숨죽인 다른 누구는 없었나? 이를테면 그녀. 엘리베이터에서 커튼 같은 생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위층에서 오가는 모든 대화에 섞인 뾰족한 목소리의 주인. 싸울 때마다 물건 던지는 소리가 나는 걸 보면 까치집 머리의 남자친구든 본인이든 욱 하는 성격이고. 그래서 나긋나긋한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린 거겠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지만,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내가 다 알 순 없지만, 어쨌거나 내가 그녀의 바람을 눈치채고 말았다는 걸 그녀도 알까?




나의 모모. 내가 찾아가면 남자친구를 대신 내보내는 모모. 기상 시간, 빨래 주기, 남성 편력까지 내게 간파당했지만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알아볼 길이 없는 그녀. 이 대도시엔 비밀이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이 좁으면 속사정은 어떻게든 새나간다. 약간 열린 창문 사이로, 우리가 지나칠 때마다 내가 하는 곁눈질로. 그래도 우린 얼굴만 가리면 무엇이든 하지. 그래서 신도 치부를 보이고 얼굴을 숨기지. 전기 고지서를 가지러 건물 밖 우편함에 들른 저녁, 내 우편함 위에서 고지서를 빼가던 여자가 있다. 거긴 모모네였다. 그 여자가 돌아서서 나올 때까지 기다릴까하다 내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하필 내게 마스크가 없어서. 전날 스피커폰 모드로 남자친구와 통화했는데, 그게 위에 다 들렸을까봐.




외줄타기 인류애:

17살부터 26살까지 이사를 10번 했다. 기숙사·고시원·셰어하우스를 전전하다 가족 아닌 남과 10년을 부대꼈다. 남은 진절머리 나고 방구석은 우울하다. 아직도 발 하나 헛디디면 ‘아 진짜 싫다’의 늪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인류애는 외줄타기, 사람과 간신히 더불어 사는 법을 쓴다.


이정표:

2013년~2015년) 대구외고 기숙사
2016년)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7년) 학교 후문 H 고시원
2018년) 학교 후문 L 고시원
2019년 상반기) 중앙대 서울캠퍼스 기숙사
2019년 하반기) 학교 후문 B 고시원
2020년~2021년 4월) 학교 후문 L 고시원
2021년 4월 둘째 주) 일산 S 고시원
2021년 4월 셋째 주~2022년 1월) 일산 변두리 셰어하우스
2022년 2월~현재) 서울 중랑구 원룸 (▶현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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