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3개월 그리고 7일 만의 한국
많이 힘들었겠다니까
생애 처음으로 유럽을 다녀오시고 나서 만나는 지인들에게 말씀하신 나의 아버지의 말이었다.
울퉁불퉁한 발바닥 아픈 유럽 길바닥과 웅장한 중세시대 배경을 목격한 것에 대한 자랑인 듯 불만 섞인 듯한 말들이 있는 게 내 아버지 설명의 특징이다. 독일-체코를 돌아 들어온 한국에서는 사람들마다 내가 보낸 시간들을 쉽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생활을 했길래 그 모양이냐
한국에 와서 혈압을 3번 쟀는데, 죄다 180이 넘게 나왔다. 그 결과를 본 아버지가 내게 화가 잔뜩 나셨다. 사실 옷 셔츠가 팔뚝에 껴서 그런 것인데, 그마저도 재검사-간호사-의사의 정상 확인을 받고 나서야 안심하셨다.
생각보다 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어디 한 곳이 망가져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을 생활 습관이었는데 다행히 아직은 멀쩡했다. 그냥 잠을 좀 자라는 의사의 조언뿐임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화가 안 풀리셨다.
우리 아들이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왔는데요, 한국에서 업무 좀 하려고요
내가 혼자 할 수도 있는 일들을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옆에서 하나하나 챙겨주려고 하신다.
병원, 우체국, 은행 직원들에게 갈 때마다 쓸데없는 사족을 붙이는 아버지에게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따지면 입만 삐쭉 나오시는 아버지다. 이제는 하다못해 서울 길을 찾아가는 것도 하나하나 훈수를 두신다.
독일 거주지에 오자마자 밥솥과 냉장고부터 열어보고 청소하는 아버지의 손은 참 분주했다. 내가 먼 타지로 나와 혼자서 외롭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아버지는 나를 챙겨주고 싶은 거다. 표현이 서툰 것인지, 아끼려는 감정표현을 참 눈치채기 쉽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누구 자식이겠나.
한국에서는 가게 일을 도우며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갖고 싶었다. 나는 쉬는 법을 모르는 줄 알았는데,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내게 가장 큰 휴식임을 깨달았다. 이들이 내 가족이라서 마냥 좋다는 생각 뿐이다. 신기한 점이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순간을 바라왔던 건지 혼자 마라톤 하듯 이런 순간이 올 때까지 스스로를 괴롭힌 건지 모르겠다.
한국에 와서 달라진 또 하나의 이점은 이제는 자동차를 아주 잘 운전하는 동생과 함께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한데 일단 에어백이 어디서 터지는지부터 찾았다. 칼국수를 먹으러 대부도를 향해 가는 길에 떠오른 아버지의 말들은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표현도 안 하는 사람이 본인 몸이나 신경 쓸 것이지...
2년 만에 본 아버지의 얼굴 주름이 마음을 참 철렁 이게 만든다. 흘러가는 시간이 애석하고, 아쉽다. 나만 흘러갔으면 하지만, 시간이 흘러야 당신의 아들이 더욱더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나는 이들이 나의 가족이라서 좋다. 내가 더 잘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본래 한국에 오면 별이 보고 싶었다. 초기 계획은 몽골에 갈 예정이었지만, 그럴 일정들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돌아온 한국에서 동서남북 매일 같이 발등에 불이 붙은 듯 쉴 시간이 없었다. 오전 오후 두 번씩 약속을 잡게 된 상황에 휴가 같지 않은 휴가라 다 취소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어째서 왜 학위 발표를 끝냈음에도 내 구내염은 더 늘어만 가는가.
그럼에도 이렇게 다 만나고 나서야 이들이 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빛나는 인간들이 참 많구나. 나도 분발해야지. 이제 나는 내 앞길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350km 나 떨어진 시골 집성촌 동네 어르신들이 축하로 반겨주셨다. 현수막에, 잔치에, 덕담까지. 마치 아이돌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70-80년대 대학 등록금 마련용 애지중지 키우는 소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딜 가나 축하받고 하도 먹어서 24시간 내내 얼굴이 부어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에게 축하받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다. 내가 공부할 수 있는 것도, 공부하게 된 것도 모두 아버지 어머니 덕이다. 이 두 분이 입이 귀에 걸려 있으니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이들의 행복을 오래 보게 될 수 있는지는 답이 정해져 있다.
근데 제발 좀 결혼 이야기는 압박 안 해주셨으면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