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렬히 좋아한 것은 언젠가 자기자신이 된다.
뱀처럼 펼쳐지는 꼬리 부분
쓰여 있지 않은 작품을 미리 완성해보는 일, 끊어짐과 탄생의 일은 동시다발적이다.
그 시절의 향수가 감싸는 감각에 심취하다가도 좀더 삶의 본질을 탐닉하게 된다. 원인이기 때문에 결과인 걸까, 결과가 있기 때문에 근거가 필요한 걸까.
얄팍한 인간의 너무나도 간단스러운 술수들, 그것이 어떻게 깨어져 가는지 감상하는 것.
생각해보아야 할 것: 예술의 기록적 의미, 창작의 범위, 임팩트와 불쾌감을 함께 주는 장치들
초등학교만 일곱 군데를 다녔다. 열여덟부터 스물아홉까지 기숙사 생활을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분당, 대구, 용인, 포항을 거쳐 가족 없이 다시 서울로 돌아와 지낸 지는 9년 차. 여전히 떠도는 삶. 정착을 원하다가도 이것이 내 정체성은 아닐까 하는 고민들.
고요하지만 벽을 사이에 두고 누군가 있다는 안도감. 10년의 기숙사 생활. 정말이지 지겨운 기숙사 생활이 체질이 되어버렸던 시절. 적당히 불편하지만 나를 오롯이 쓸쓸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공간에서 환멸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안쓰럽게 생각했던, 또는 이해할 수 없어 경멸했던 그 모두가 결국엔 내 속에도 있다. 그들의 행복한 공허함에 이제는 공감할 수 있다.
스스로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깊어지고, 또 그 선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어느 정도의 경계를 두고 가까워지고 이해하는 것. 그것들 때문에 살아간다. 그래도 되는 건지의 의문-감격과 카타르시스-와 함께. 그것 또한 순간의 것. 내 삶을 실제적으로 영위하도록 돕지는 못하니 생각은 계속된다. 눈앞의 현실이 나를 계속 몽상하게 만들고 짧은 꿈에서 깨고의 반복. 평생이란 이런 것인가 궁금하다.
믿을 수 없는 것들의 세계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이 바로 꿈의 본질이겠지만 이런 것을 어떻게 이야기 속에 옮길 수 있겠는가. 일생에서 그 어떤 특정한 시기의 삶에 대한 지각은 옮길 수 없다. 그 삶의 진실, 그 의미 그리고 그 오묘하고 꿰뚫는 본질을 구성하는 것. 그걸 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꿈을 꾸듯 혼자 누릴 뿐. 하지만, 우리 인간의 대부분은 바보도 아니고 고상한 인물도 아니어서 사소한 주변인이 있느냐 없느냐가 큰 차이를 이룬다.
다른 것: 생각과 계획, 원망과 불평과 침묵
새벽 까마귀가 무언가를 물고 있다. 날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그 생각은 언젠가부터 나만의 주장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망상적인 말이 되었다.
재고 따지는 것에 대한 반감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는 할머니와 '보고 싶다'라는 정확한 감정을 느낀 2019.05.13., 할머니는 감기에 걸리셨다.
남들과 다른 무언가 특별한 미래를 기대하던 10대 때 자기계발서를 한참 읽었다. 조금 더 나은 나를 바라며. 사람마다 성공의,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는 걸 알아갈 무렵, 에세이나 자기계발서가 와닿지 않는 순간이 왔고 오히려 반발심을 느꼈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책과는 아주 멀어졌는데, 6년 전 오랜만에 꺼내든 건 우습게도 에세이였다. 그러고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느끼는 것 자체로 내 속이 풍성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의 계절이 그렇고, 그때의 감정이 퍽 좋은 계절과 닮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복잡스러운 줄만 알았던 단상들이, 그로 인해 객관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던 내가, 생각보다 굉장히 일반적이고 식상하기까지 하며 어느 때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단순하다는 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