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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less Sep 27. 2024

시작,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1994년의 여름은 너무나 더웠다. 그때 나는 엄마와 함께 있었다. 엄마는 1994년의 여름, 너무 더운 날에는 불룩 솟은 배를 안고 집을 나와 버스의 시작과 종점을 오갔다고 했다. 엄마의 태교 덕분일까? 이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나는 긴 노선의 좌석 버스를 정말 좋아했다.


그렇게 방랑자의 피가 흐르던 철없던 시절의 나는 티비에 인근 지역이 나올 때면 부모님 몰래 노트의 귀퉁이 어딘가에 그곳으로 가는 버스 노선을 찾아 적어두었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나는 명연기를 펼치며 아픈 척 학교를 나와 버스를 타고 티비에 나온 그곳으로 떠났다. 


그렇게 나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걸 좋아했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혼자 떠났고 혼자 돌아왔다. 결국 나는 졸업식날 대부분의 친구들이 받은 개근상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영광을 얻었다. 

나는 고등학생까지도 혼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겁이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혼자 걷는 길에서는 늘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종종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숨은 공간을 찾을 때면 내 키가 10cm는 자란 것 같은 뿌듯함과 함께 잠들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른들 몰래 이런 멋진 여행을 떠나는 나의 용기와 감성은 분명 평범한 사람의 삶과 다르다며 스스로가 특별하다 착각하며 학창 시절을 하염없이 보냈다. 


특별하다 믿어온 시간이 지나 나는 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특별하지 않았고 아픈 척 연기할 수 없는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어른들이 맞이하는 사회의 책임과 역할이 주어졌다. 그건 마치 두치수나 큰 청바지를 입은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결국 학창 시절을 흘려보낸 대가로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노력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확고한 취향조차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20대를 보냈다. 


특별했던, 아니 특별하다 믿었던 피는 어디로 휘발되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늘어난 청바지에 몸을 맞추고 나서였을까. 더 이상 나에게 떠남의 의미는 그저 일상을 살다 떠나는 휴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경험에 불과했다. 그렇게 되자 혼자 떠나던 길은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길로 변했다.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던 어린 날의 여행과 다르게 어른이 되어 함께 떠나는 여행은 모든 것이 편리했다. 나는 길 위에서 혼자서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고 구름같이 피어오르던 생각들은 동행자의 이야기로 손쉽게 잊힐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이제 혼자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함께 떠나는 여행을 선호하는 게으른 어른이 되었다. 그러자 나의 감각은 소멸되었고 때론 여행으로 명명된 경험은 누군가에게 보이거나 증명하기 위한 찰나의 이벤트로 변했다. 


나는 내 방에서 혼자 잠을 잘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지만, 더 이상 새로운 공간을 찾아도 내 키는 자라지 않았다. 고민하고 방황하며 걸었던 그 길들이 마치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삭막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시멘트 벽돌 같은 회색 빛의 어른이 되자 어떤 색도 입혀지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회색인간에게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그 어떤 색도 없기에 함께 떠난 동행자들이 정말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회사의 직장동료부터 연인까지. 때때론 친구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난 친구의 친구와도 함께 여행을 했다. 편리한 여행이었다. 그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상대에 따라 유행하는 MBTI의 P와 J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사람이었다. 엑셀로 물을 마시는 시간까지도 계획을 할 때가 있었고, 여행당일까지 그 어느 것도 준비하지 않아 인천공항에서 비대면 긴급서비스로 달러를 인출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취향이 없기에 그 누구든 동행자로 여행이 가능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런데 그 시간들 속에서 이상하게도 가족과의 여행은 초등학교 시절을 제외하고는 간 적이 없었다. 이 아이러니한 진실을 인지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사실 그냥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작년 사촌 언니와 함께 외할머니, 엄마, 이모, 언니, 나 여자들끼리의 여행을 계획해 남해로 떠나기 전까지 말이다. 함께 떠난 남해 여행에서 나는 많은 것을 직면했다. 나는 외할머니가 협착증으로 잘 걷지 못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얼마나 사진을 못 찍으며, 칼국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엄마와 30년을 넘는 시간을 한집에 살면서도 이런 간단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여행 이전에는 엄마와 사진을 서로 찍어줄 일이 없었으며 엄마는 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어 주어서 당연히 엄마도 칼국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나는 평범하다 믿었지만 그 이하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눈앞에 놓인 낯선 사실과 생각을 곱씹으며 식당 밖 남해바다 위에 떠있는 배를 하염없이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늘 보던 그 바다일 뿐인데. 이 여행은 왜인지 나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엄마는 여행 내내 나에게 이야기했다. 


“할머니도 다리가 안 좋고 또 오기 힘들지, 이런 여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야.” 


그런데 정말 어이가 없게도 그 말 때문에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던 여름날의 무덥던 날씨가, 낯선 버스번호가 적힌 버스계단을 오르던 가볍던 발걸음이, 거짓말로 두근거리던 감정이, 버스에서 나오던 라디오가 나를 감쌌다. 


정해진 길을 자꾸만 벗어나고 싶은 무언가 뭉클한 감정들. 

나에게 찾아오던 알 수 없던 용기들. 


그러자 오기가 생겼다. 떠나야겠다는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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