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만으로 삶이 어떻게 살아질까. 오기만으로 삶이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평범하다 못해 게으른 나에게 있어 계획은 내일부터. 불타오른 의지와 오기도 하룻밤에 전부 타 재가 되는 삶이 늘 반복되며 이어진다. 나는 또 눈앞에 쌓인 일을 해치우느라 항상 핑곗거리를 찾고......
그래서 봄날의 남해 여행이 끝난 후 가을이 왔을 때 대학원이라는 핑계를 만들고 퇴사를 했다. 혼자 떠날 용기가 없는 사회인에게는 주변에 안전하게 둘러댈 핑계가 필요했고 대학원은 완벽한 핑계가 되었다.
즉, 나는 백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너는 백수가 아닌 대학원생이라고. 그건 어쩌면 조금 다를지 모른다며 나를 위로해 준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에서 집으로 온 건강보험납입증명서류는 정확하게 내가 백수라는 사실을 한번 더 확인시켜준다. 결국 지인의 눈이 아닌 사회적 관점에서 나는 31살 먹은 백수인 것이다. 나는 1994년 내가 엄마에게 향했던 것처럼 건강보험납입서류로 31년 만에 다시 엄마에게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백수에게 가장 많은 것은 당연히 시간이다. 그리고 난 궤도에서 벗어나버렸지만 일을 하다 백수를 택한 중도 백수. 그래서 많지는 않지만 1년 정도는 너무 작고 귀여운 자산을 까먹으며 버틸 여유가 있는 백수인 것이다.
그렇게 백수의 삶을 무료하게 보내고 있을쯤 엄마는 타 회사에서 이직을 제안받았다. 쉴 새 없이 일했던 엄마는 마침내 눈 수술을 위해서라도 이직을 하는 시기쯤 잠시 쉴 거라 말했다. 순간 머릿속에 생각이 스쳤다. 그동안 가족여행은 모두의 시간이 맞지 않아서였으니 이번 기회에 가족여행을 가보자고. 타이밍은 지금 뿐이었다. 다시 내가 사회에 뛰어들거나, 엄마의 이직이 이루어지면 현실적으로 연차를 맞춘 가족여행은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아빠한테 여행을 제안했다. 하지만 94년에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이전에는 내가 없어서 모르겠다) 1년 365일 경제상황이 좋지 않다 생각하는 아빠는 지금 시기에 무슨 여행이냐고 했다. 나는 아빠를 목록에서 지웠다. 그리고는 하나뿐인 남동생에게 여행을 제안했다. 지금 시기가 회사에서 가장 바쁜 시기라 불가능하다 했다. 그래서 남동생도 목록에서 지웠다. 그러자 남은 사람은 처음처럼 엄마와 나, 단 둘이었다.
‘그래! 둘이서 다녀오자!’
그땐 이 여행이 이렇게 큰 여행이 될지 몰랐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