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트고 스러지고 살아나는 것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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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백색 벽면이 더 어둡게 보였다. 비가 그친 지 조금 되었는데도 통창에 달라붙은 빗방울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교실은 전등이 일부 나간 것처럼 살짝 어두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빗발이 잦아들어가자 다행히도 학생들은 수업에 더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식물 관찰 일지’를 적으라 시키고는 교탁에 서 있었다.
교탁 표면에 여기저기 긁힌 자국, 휘어진 곡선 모양으로 스크래치가 생긴 것을 괜히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기도 했다. 실내 온도가 너무 낮지 않냐고 물었다.
학생들이 일지 작성하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면 나는 뒷짐을 지고 교실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일지 작성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식물 학명을 적는 칸, 관찰한 식물의 생김새가 어떠한지 설명하는 칸, 느낀 점을 한쪽 가량 적는 긴 여백이 있었다.
간혹 학생들은 내가 일지를 보고 있으면 황급히 일지가 보이지 않도록 숨겼다.
굳이 들추지 않았다. 나도 고등학생 때 내 학습지에 적어놓은 수학 문제 풀이가 너무 미흡해
누가 볼까 봐 숨긴 적이 많아서였다.
일지 작성이 끝나면 내가 그걸 걷어놓고 마저 수업을 한다.
이 식물을 다룰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 주로 어디에서 서식하는지, 이 식물은 모종의 이유로 교과과정에서 제외되었으나 다시 제정되었다는 사실. 이런 내용은 중간고사에 다수 출제되는 내용이니까 꼭 외우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A식물’이라는 교과목은 ‘B식물’에 비해서 중요도가 낮다고 평가받았다.
그래서 과목에 필요한 최소한의 노력도 기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다.
일지를 들춰보면 여백의 반절도 채우지 못한 글씨가 있거나, 일부러 글자 크기를 크게 하여 억지로 공간을 채운 흔적. 그걸 보면 나는 앞머리가 이마 위에 붕 뜰 정도로 센 한숨이 나오곤 했다.
조금만 더 채워보자, 이 과목과 네 성향이 맞지 않다는 건 알겠지만 자꾸 아무것도 안 쓰면 부분 점수도 줄 수 없어. 하고 타일렀다. 학생들은 대개 ‘모르겠다’라는 말로 일관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오늘도 일지에 아무 글자도 적지 않은 채 제출한 학생이 있어서, 눈여겨보던 참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백지로 일지를 제출한 학생을 호명해 남겼다.
한 학생은 ‘죄송하다’고 말하고 나갔고 다른 학생은 어떤 반성도 느끼지 못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수업이 많이 버거운지, 매번 백지로 내는 이유가 있는지.
학생들은 수업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안함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세게 체감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나는 섣불리 화내지 않으려 했다. 말해줬으면 했다.
수업 진도를 끝내야 할 기간이 촉박해 슬라이드를 평소보다 빨리 넘긴 게 불만이었다.
아니면 식물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어 학습에 지장이 있었다. 등.
내 말을 듣고 눈동자를 끝에서 끝으로 굴리던 학생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본인은 ‘B식물’과 ‘A식물’ 과목을 둘 다 듣고 있고, 특이하게도 본인 학교도 아닌 타학교에 수강신청을 했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A식물’은 공부하기 너무 어렵다, 그래서 성의 있게 참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지 못했고, 지겨운 A식물 학명이나 외워야 하는 학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가 그의 답변이었다.
내가 그 말에 어이가 없어 눈의 초점이 머무르지 못하고 흩어지는데.
학생은 이제야 말문이 트인 듯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을 잽싸게 주절거렸다.
- 백일장 수상 문집에서 선생님께서 쓰신 수필을 봤어요. 부문은 산문, 차하로 수상하셨잖아요. 지금 가르치고 계시는 A식물 글이던데요.
나는 이제 속으로도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화두가 갑자기 바뀐 것도 당황스러운데,
지금 내 설득을 들을 생각도 않고 느닷없는 이야기를 끼얹는 이유가 뭘까.
학생이 말하고 있는 백일장 수상 문집은 제대로 펼쳐보지도 않았다.
펴 봤자 백일장에 참가한 사람들의 명단이 각진 컴퓨터 문체로 입력된 색인 정도였다.
내가 어떻게 ‘차하’로 수상할 수 있었나, 수치심이 들 정도로 부족한 글이었고,
그 글을 적은 기억이 제 발로 달아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글이었다.
내 글이 문집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내에서 널리 알려져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던
존재였다. 무슨 배짱으로 심사받을 글을 인쇄해 동봉해서 우편으로 송부할 수 있었던 걸까.
교단에 섰던 인생 중 오늘이 제일 버겁다고 느꼈다. 수업이 어렵다, 지겹다는 말은 매번 들어도 어떻게 응해야 하는지 몰랐고, 스스로 부끄러워서 잊으려 했던 글이 또다시 언급되니 나는 평정을 잃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학생이 한 말은 매번 뜻밖이었다. 뜻밖이라는 단어가 그를 지칭하기에는 참 제격인 것 같다.
멍하니 선 나를 앞질러 앞문으로 나가다가 그 학생은 멀찍이서 말했다.
자신의 말에 반박하지도 못하고 넋이 나간 내가 안쓰러웠던 탓인지,
이렇게 말했다. 뭔가 진지하게 한 말 같았는데, 내 머릿속이 하도 혼곤해서 그 말 전체를 알아듣지는 못했다.
- 전 선생님께서 쓴 수필을 보고 마음이 들떠서, 관심도 없는 'A식물'을 듣기로 결심했어요.
이건 내가 진짜 들은 걸까. 이 문장의 진의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그렇지만 내 마음대로 저 문장은 그래도 저 학생의 진심이었다고 믿고 싶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