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지 Aug 23. 2022

12. 따뜻한 색감과, 차 한잔과 가을

스치듯 지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기다리며


계절이 서서히 변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는 몇몇 순간들이 있는데 특히 통통 튀는 색감들보다 은은하고 뉴트럴 한 색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느낀다.


싱그럽던 자연의 색들이 서서히 하엽할 준비를 하면서 싱그럽던 색을 내려놓고 서서히 토양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그 계절.


그리고 코끝이 연분홍빛으로 물들면서 아침저녁으로는 기분 좋을 정도의 알싸한 찬 공기가 느껴지는 그 계절.


아쉽기만 한 가을이라는 계절은 나에게 그런 색감과 공기로 기억되어 있다.


어렸을 때는 가을운동회가 가을이라는 계절의 가장 강력한 추억의 장면인데 나이를 먹고 나니 그런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있다. 그리고 가을을 느낄만하면 어느덧 아이 추워, 하면서 출근길에 패딩을 꺼내 입는 나 자신을 보면서 가을이 언제부터 이렇게 스치듯 아쉽게 지나갔었나, 하고 종종 생각하게 되었다.


스치는 가을을 붙잡기 위해서는 차 한잔을 마시면서 잠시 그 시간에 머물러보는 걸 권하는데, 그런 이유로 오빠랑 나도 맘에 드는 어느 조용한 순간, 그 순간을 오롯이 느끼고 싶을 때는 따뜻한 차 한잔을 끓인다.


가을이 성큼 오기라도 해야 스쳐 지나갈 것을 아쉬워할 수 있는데 올해 여름은 유독 더위가 길고, 비 피해도 길어 가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나자 거짓말같이 아침저녁으로 상당히 선선해지기 시작해서, 가을을 아쉬워할 준비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작년 가을의 기억을 더듬어 글을 남겨본다.





가을의 알싸한 차가운 공기는 차 한잔의 따뜻함을 더 극대화시켜준다.

잔을 감싸 쥐는 손부터 전해오는 온기가, 향 좋은 찻물이 부드럽게 목 넘김 되면서 몸 내부까지 따뜻하게 데워져서 비로소 몸도 마음도, 머리도 편안해지는 차를 마시는 시간.



그날 그날의 우리 생각과, 마음과 분위기에 따라 우리가 좋아하는 찻잔을 고르고, 좋아하는 향의 차를 골라서 천천히 차를 우려내는 그 시간도 참 좋다. 찻잎이 따뜻한 물과 만나면서 서서히 만들어내는 고유의 그 빛깔도 참 좋고 오빠랑 한 모금 더 마실래? 하면서 두 번째 잔은 잔이 넘칠 듯 더 많은 양을 부어주면서 장난기 어린 눈빛을 발사하는 순간도 좋다.



가을이 왔어!

하면서 한 날은 옷장 정리를 했다. 해묵은 옷도 버리고 가을에 어울리는 색감들로 옷장을 가득 채우고 나서 다음 주부터는 진정한 가을의 색으로 옷을 입고 다니겠어! 다짐한 게 고작 며칠 전인데 며칠 후의 아침은 유독 찬 바람이 평소보다 강하게 느껴져서 정말 서운하게 가을, 이러기야? 하면서 겨울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두툼해진 내 옷과 어울리지 않게 버스를 기다리며 바라본 가로수의 단풍은 한 층 더 가을스러워져서 아직 가을이긴 하네. 하면서 느꼈던 다행 감도 잠시 스쳐 지나갔다.



가을이 스쳐 지나가는 게 싫다고 하고선 몸과 마음은 또 다르게 움직이며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일찍 준비했다.

따뜻한 색감의 물건들을 식탁에 올려두고, 뒤편에 창고에서 꺼낸 크리스마스트리를 두었는데 이 묘한 가을과 겨울 사이는 모람?



빵은 커피랑만 어울릴 거라는 생각은 아주아주 짧은 생각.


사실 폭신한 빵은 따뜻한 차랑도 정말 잘 어울린다. 우리가 좋아하는 빵집에 가서 오빠가 특히나 좋아하는 빵을 가득 담은 뒤에 인심 좋은 사장님께서 문을 나서는 우리를 부르시며 이것도 드셔 보세요 하고 주시는 빵.


정이 들어가 더 맛있는 것 같은 빵. 그날의 선물 같은 그 빵은 맘모스빵이었다.


그냥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사 먹던 맘모스빵이랑 다르게 앙버터에 견과류도 훨씬 더 가득 들어있어서 한입 베어 물고 사장님 인심 생각하며 기분 좋게 함박웃음 짓던 이 날도, 가을의 차향이 가득한 어느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그릇들 중에 가지치기를 하고 몇 남지 않은 가마가 텅 빈 날 공방의 작품 같은 그릇.


이 그릇 특유의 거칠한 느낌은 날 것의 가을과도 참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타고난 센스가 없어서 가을느낌이 가득 드는 집은 어떻게 꾸미면 좋을까 매번 고민하는데 그냥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 자리에서 당장 가을 느낌을 가득 느끼고 싶다면 이런 소소한 가을 소품들이 도움이 될지도.



가을밤에 먹는 맛 쪄낸 가을의 밤 작년의 가을밤은 아버님께서 손수 가져오신 밤이었다.


'이번 알밤은 전부 알이 굵고 너무 좋아요.' 하며 행복하게 한 마디 할 수 있었던 뒤에는

수많은 크기의 알밤들 중에 윤기 나고 알이 큰, 좋은 것만 자식들에게 주고 싶은 부모님의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아차' 하며 깨달았다.


덕분에 가을을 만끽하며 김 모락모락 나는 밤은 손에 쥐고 야금야금 먹을 수 있었던 밤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이날은 따뜻한 둥굴레 차랑 함께였네.




갓 쪄낸 밤도 맛있고 통밤 가득 들어간 식빵도 맛있는데 가을에는 맛있는 이 두 가지는 한꺼번에 즐길 수 있으니 스치듯 지나가는 가을이지만 어느 계절보다도 그 계절의 분위기와 맛을 강렬하게 기억할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한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과, 도움 덕에 작년의 가을은 따뜻하고 뭉클하게 잘 지나왔던 것 같다.


짧아서 더 애틋하고 기다려지는 가을이라는 계절.

어서 남은 더위를 물리며 가을이 성큼 오기를 바란다.


아침의 시원한 공기 덕분에 상쾌하게 출근하고 잠자리에 들 땐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뽀송한 이불속에서 피로를 씻어낼 수 있는 계절. 많은 작물의 결실을 보며, 우리 인생의 어느 한 해도 조용히 꾸준하게 잘 익어가고 있음을 느껴볼 수 있는 그 계절.


스치듯 지나가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짝사랑하듯 기다려보는 저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1. 우리 집엔 지리산 산신령이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