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의 기억, 열도를 걷다]
신주쿠의 시작, 역사의 흔적
도쿄의 심장부, 신주쿠(新宿). 낮에는 복잡한 교통과 고층 빌딩이 도시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밤이 되면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네온사인이 흐드러지게 빛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우는 이곳의 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축제다. 처음엔 그 화려함에 압도당했지만, 이내 그 안에서 묘한 따뜻함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신주쿠의 밤은 복잡하면서도 어딘가 편안한, 그런 아이러니한 공간이었다.
신주쿠는 단순한 번화가 그 이상이었다. 지금의 화려함과 불빛 뒤에는 깊은 역사와 변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주쿠의 시작은 에도 시대인 16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이토 가문의 저택 일부가 고슈 가도(甲州街道)를 따라 새로운 역참, '나이토 신주쿠(内藤新宿)'로 바뀌면서 신주쿠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원래는 여행자들이 쉬어가는 장소였지만, 점차 유원지와 유흥가로 발전하며 에도의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신주쿠는 또 다른 변화를 맞았다. 1885년, 야마노테선의 전신인 시나가와선이 개통되면서 신주쿠역이 설립되었고, 이후 철도 노선이 확장되면서 사람과 문화, 상업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에는 지반이 단단해 피해가 적었던 신주쿠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며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1933년에는 신주쿠 산초메에 이세탄 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상업 지구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고, 전후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신주쿠는 도쿄 서부의 핵심 부도심으로 성장했다. '잠들지 않는 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밤낮없이 번화한 현재의 모습은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온 역사와 변화의 결과였다.
지금 신주쿠를 걷다 보면 그 과거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에도 시대 나이토 가문의 저택 부지에 세워진 신주쿠 교엔(新宿御苑)은 여전히 고즈넉한 정원을 유지하며, 사무라이 박물관에서는 일본 무사들의 갑옷과 무기를 통해 전통 무사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소방 박물관에선 도쿄 소방청의 역사와 함께 도시 재건의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번화가 뒤에 숨은 이 오래된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신주쿠 거리를 걷다 보면, 화려한 네온사인과 복잡한 거리조차도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이곳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면서도, 과거의 기억들을 품고 살아 숨 쉬는 도시였다.
골목 깊숙이 숨겨진 온기 — 골든 가이
신주쿠의 밤을 걷다 보면, 현대적인 고층 건물들 사이로 시간이 멈춘 듯한 작은 골목이 나타난다. 골든 가이(ゴールデン街)다. 좁은 골목길에 작은 바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각 가게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네온사인 불빛 아래 아슬아슬하게 엉켜 있는 듯한 이 골목은 마치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선 기분을 선사한다.
그날 밤, 나는 오래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작은 바에 들어갔다. 자그마한 공간엔 낡은 벽과 주인장의 오랜 손때가 묻은 술병들이 가득했다. 따뜻한 사케 한 잔을 마시며 스탠더드를 듣고 있으니, 낯선 도시의 밤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옆자리 손님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갔다. “여행이요? 한국에서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 한 마디가 묘하게 마음을 데워주었다. 신주쿠의 밤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잇는 온기를 품고 있었다.
오모이데 요코초 — ‘추억의 골목’ 속 따뜻한 연기
‘추억의 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모이데 요코초(思い出横丁)는 마치 오래된 일본 영화 속으로 들어간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좁디좁은 골목길에 자리한 작은 이자카야(居酒屋)에서는 연기 가득한 야키토리(焼き鳥) 냄새가 진하게 퍼지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맥주 한 잔과 함께 뜨거운 꼬치를 먹다 보면 마치 오래된 단골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날 밤, 나도 작은 가게에 홀로 앉아 맥주 한 잔을 시켰다. 옆자리 일본인 아저씨가 “한국에서 왔어요? 신주쿠 좋죠?”라며 웃어 보였다. 우리는 짧은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손짓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같은 맛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한 순간이었다.
도쿄도청 전망대 — 도시의 불빛 위에 선 나
신주쿠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도쿄도청 전망대(東京都庁)에 오르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무료로 개방된 이곳에서는 신주쿠의 화려한 야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빛나는 도심과 저 멀리 보이는 도쿄타워, 날씨가 좋으면 후지산까지도 보인다고 한다.
그날 밤, 나는 전망대 유리창 앞에 서서 한참을 내려다봤다.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불빛이 마치 반짝이는 별바다 같았다. 저 불빛들 사이에 나도 한 조각으로 빛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주쿠의 밤을 걷던 내가 이제는 신주쿠의 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같은 공간이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밤거리에서 찾은 나만의 순간
신주쿠는 화려하고 시끌벅적하지만, 그 안에 따뜻한 순간들이 숨어 있다.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짧은 대화, 골목 어귀에서 느낀 아늑함, 빛나는 야경을 보며 떠올린 나만의 생각들. 그 모든 순간이 모여 신주쿠의 밤을 완성시킨다.
여행이란 결국 낯선 곳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신주쿠의 밤거리 어딘가에서도 누군가 자신만의 순간을 찾아가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다시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어쩌면, 신주쿠의 밤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방문: 도쿄타워
두 번째 도쿄 방문에서 나는 도쿄타워에 올랐다. 첫 번째 도쿄 여행의 설렘을 기억하며, 이번에는 탑 데크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도쿄타워의 탑 데크는 250미터 높이에 위치해 있어 도쿄를 360도로 내려다볼 수 있다. 낮에는 도쿄의 빽빽한 빌딩 숲과 멀리 후지산의 실루엣이 보였고, 해가 저물면서 도시는 점차 불빛으로 가득 찼다. 레인보우 브릿지와 오다이바, 츠키지 대교와 스미다가와 강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도쿄타워 내부의 기하학적인 거울과 LED 조명은 마치 미래로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었고, 공간 전체가 은하수를 떠다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신주쿠 도청 전망대에서 본 도쿄는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도쿄타워 탑 데크에서는 같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더 따뜻하고 감성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특히 밤이 되자, 도시의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였고, 도쿄의 화려함과 고요함이 공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이 도시의 모든 불빛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탑 데크에서 내려와 풋 타운을 둘러본 후, 나는 거리로 나섰다. 도쿄의 저녁 공기를 느끼며 걷던 중, 뜻밖의 풍경을 마주쳤다. 길가에 피어난 벚꽃들이 상큼하게 새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돗자리를 펴고 작은 소풍을 즐기기도 했다. 도쿄의 밤거리에 벚꽃이 만개한 그 모습은,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의 시작을 알리는 듯 따뜻하고 희망에 가득 찬 풍경이었다.
마지막 하루: 롯폰기와 스테이크
저녁에는 롯폰기로 향했다. 고층 빌딩 사이로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거리를 걸으며, 나는 스테이크를 먹었다. 하루의 끝을 맞으며, 나는 도쿄에서의 두 번째 여행을 마무리했다. 첫 번째와는 또 다른, 깊은 기억을 남기며. 도쿄의 야경과 거리, 벚꽃, 맛있는 음식 —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도쿄의 밤거리에 남겨진 벚꽃의 잔상과 야경의 불빛들은, 마치 다음 봄을 약속하는 듯 내 안에서 오래도록 피어나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부족해 급히 지나쳤던 이곳에서, 나는 이번에는 더 천천히, 도쿄의 깊은 매력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날 일본 여행을 처음으로 하는 필자에게 신도청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쿄의 밤은 그 어떤 여행지에서도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도쿄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도쿄는 다시 한번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내 안에 남은 그 작은 빛들은, 언젠가 다시 오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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