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계절, 다시 걷는 스페인-카탈루냐의 중심도시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Barcelona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리조트 단지는 푸른 바다를 막아서며 작은 위용을 드러내 보이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바다로 사라진다. 하늘은 낮고 바다는 여전히 푸르다. 30여 분 남짓 산악기차를 타고 몬세랏 Montserrat을 내려온 우리는 이제 한적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달려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엔리케는 낮게 떠서 비추는 해를 피하느라 차광막을 내린다. 카탈루냐를 비추는 따사롭고 평화로운 햇빛이 차창으로 쏟아진다. 반짝반짝 빛나는 지중해 위로 낮게 뜬 태양이 여행자를 쫓는다. 몬주익 언덕에 빛나는 바르셀로나의 햇빛이 낯선 여행자를 맞는다. 어느덧 엔리케는 우리를 몬주익 땅으로 데리고 왔다. 우리에겐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딴 도시로 더 익숙한 바르셀로나 몬주익이다.
몬주익, "유대인의 산"이란 뜻의 몬(Mont; 산, 언덕)과 주익(Juic; 유대)의 합성어인 지명으로 과거 유대인의 집단 주거지역이었던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많은 유해가 발굴되면서 ‘유대인들의 산’ 몬주익으로 지칭된다. 해발 213m의 언덕으로 우리나라 남산 정도의 산이라 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바르셀로나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특히 올림픽 항구 Port Olímpic의 모습으로 참으로 여유로웠다. 지중해를 통해 이탈리아로 나가는 대형 크루즈 여객선과 수많은 요트들이 바르셀로나 올림픽 항에 정박해 있다. 올림픽 항구가 바라다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올리브유를 곁들인 생쌀과 해물 등을 끓여 요리하는 빠에야 Paella를 즐긴다. 우리가 즐겨 먹는 게를 삶아 먹고 나서 게딱지에 비벼 먹는 밥과 유사한 맛이 나는 이곳의 특별 요리 빠에야이다. 이곳 사람들 역시 노천의 카페에서 빠에야를 즐긴다. 올림픽 항구변 산책로를 뛰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몬주익을 걷는다. 도시와 해변의 전망이 참으로 아름다운 몬주익 올림픽 항이다.
전국이 4개 권역으로 구분되는 스페인
스페인은 전국이 4개의 권역으로 구분된다. 이렇게 구분되는 역사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상당히 이야기가 길어진다. 간략하게 네 개의 권역으로 구분되는 스페인에 대하여 요약한다.
카탈루냐 Catalunya 지역은 스페인 북동쪽 지방으로 북쪽은 피레네산맥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프랑스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과 남쪽은 지중해에 면하고, 서쪽은 에브로 강 유역의 아라곤 지방과 발렌시아 지방에 접한다. 주도는 바르셀로나이며 4개 주를 포함한다. 스페인 내부에서도 바스크 지방과 함께 가장 분리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상징기는 노란색과 빨간색 줄무늬로 이루어진 깃발이다. 이 깃발은 과거 아라곤 왕국의 깃발이었다. 바르셀로나가 바로 이 지역에 위치하는 도시이다. 카스티야 지역을 대표하는 마드릿과는 라이벌 관계이고, 바르셀로나 FC와 레알마드리드의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은 그야말로 광분의 도가니로 변하는 곳이기도 하다. 과거 아라곤 왕국의 지배 지역으로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중심의 도시며 지리적으로 서유럽의 모습을 닮은 항구도시이다.
바스크 Vasco 지역은 피레네산맥 서부에 있는 지방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 걸쳐 있다. 바스크어를 쓰는 바스크인이 살고 있다. 바스크인은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오랜 시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으며, 역사적으로 824년 세워진 나바라 왕국만이 피레네 북부의 양쪽을 다스리는 나라였다. 스페인의 나바라와 바스크 지방, 남부 바스크 지역은 프랑스의 아키텐의 피레네자틀랑티크 주를 이루는 북부 바스크 지역과 구분된다.
1491년에 바스크의 안드라에서 태어나 예수회(Jesuits)의 창립자로 유명한 이그나시오 로욜라 (Ignacio Loyola), 바스크 지역의 사회적 경제 운동인 몬드라곤 협동조합(Mondragon Corporation)의 창립자인 호세 마리아 아리스트기 (José María Arizmendiarrieta) 신부는 이곳 바스크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주의자들과 싸운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는 스페인의 독재자로서 바스크 지역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카스티야 Castilla는 스페인 중부의 역사적인 지역으로 이 지명의 유래에는 ‘성 castillo의 지방’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 덕분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만차 등 중세 카스티야 왕국에 속하는 지역의 중심부를 가리킨다. 지방행정구역으로서의 '카스티야'는 존재하지 않지만, 카스티야 이 레온 Castilla y León, 카스티야라만차 Castilla-La Mancha 두 곳의 자치 지방에 '카스티야'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마드릿 중심의 내륙지역으로 톨레도 등 과거 카스티야 왕국의 지배권이 미치던 중부지역이다.
역사적인 인물로 중세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인 엘시드 (El Cid, Rodrigo Díaz de Vivar),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자, 스페인 통합의 중요한 인물인 이사벨 1세 (Isabel I of Castile), 카스티야 출신의 스페인 황제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가 대표적이다.
엘시드는 11세기 초, 기독교와 무슬림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스페인의 재통합 과정에 기여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족적은 ‘엘시드의 노래'라는 서사시로 스페인 역사와 문학에 잘 남아있다.
이사벨 여왕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합병하여 에스파니아 왕국(현재의 스페인)을 탄생시켰다. 또한, 그녀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 아메리카 대륙 탐험을 지원하며, 스페인의 해외 확장을 이끌었다. 이사벨은 가톨릭 군주로서 종교적 통합과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추구했던 스페인 역사상 매우 중요한 여왕이다.
펠리페 2세 (Philip II of Spain)는 카스티야 출신으로 스페인의 황제로, 스페인의 황금기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으로, 16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의 지배를 확립했다. 펠리페 2세는 해상 제국을 구축하고, 스페인 내전과 영국과의 해전(스페인 무적함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외 카스티야의 귀족이자 정치가인 디에고 데 레온 (Diego de León), 중세 시기의 유명한 문학가로, 카스티야 문학의 기틀을 다졌던 라모스 데 카스티야 (Ramos de Castilla) 등이 카스티야 사람이다.
안달루시아 Andalucía 지역은 스페인 남부 해안 지역으로 과거 오랫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지로 세비야, 그라나다 등지의 지역이다. 스페인 올리브의 70%를 생산하고 있다. 지중해의 따듯한 기후와 이슬람 문화와 가톨릭 문화가 적절히 섞인 지역이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는 스페인 사람들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가장 많이 드러내는 지역이다. 이곳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과장이 심하며, 변덕이 심하고, 일하기보다 놀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보인다. 안달루시아는 플라멩코의 발상지인 데다 축제가 많기로 유명하니, 노는 문화는 스페인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방이다.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이며 낙천적인 기질을 갖고 있다.
저 유명한 비제의 <카르멘>이나 롯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혹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통해서 이 지방의 기질은 더욱더 잘 드러난다. 이곳에서 피가로는 주인을 제압하고 당당하게 약혼자를 구해낸 곳이고, 고야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곳이며, 스페인의 국민화가 벨라스케스와 그의 제자 무리요가 태어난 곳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비치어지는 이 지역 사람들의 열정적인 기질을 ‘안달루시안’ 기질이라 한다.
카탈루냐 광장 Plaza de Cataluña
우리는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위와 같은 스페인 4개 권역의 주요 도시와 문화유적들을 둘러보았다. 오늘 우리가 여행하는 바르셀로나는 가우디로 많이 알려진 도시지만 이들 스페인 사람들, 마드릿을 중심으로 하는 카스티야 사람들과의 갈등에 중심에 선 카탈루냐의 중심도시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 일단 언어가 스페인어가 아닌 그네들만의 언어인 카탈란어를 공식어로 사용하며 관공서의 공식 문서도 카탈루냐 지방에서만 쓰는 카탈란어를 쓰는 지역이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자신들은 스페인이 아니라고, 노 스페니쉬를 주장하며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카탈루냐를 상징하는, 과거 아라곤 왕국의 깃발을 게양하고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원하는 카탈루냐 사람들의 땅 바르셀로나다. 언어로만 따지면 스페인 속의 또 다른 스페인인 셈이지 싶은 바르셀로나는 과거 중세 시대 때는 아라곤 왕국의 중심도시였다.
필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급히 화장실을 가기 위하여 람블라 거리로 이동하는 일행들과 떨어져 바르셀로나 공항 근처 카탈루냐 광장 Plaza de Cataluña 거리에 남는다.
도이치 뱅크 옆에 있는 젤라또 카페 빠지 Farggi가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서니 0층에는 주문하는 사람들과 종업원들이 제일에 여념이 없다. 1층으로 올라가니 커피를 마시는 사람,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우리나라는 어딜 가나 화장실 인심이 좋은 나라지만 스페인은 그렇지 않다. 공중화장실은 찾아보기 힘들고 주로 카페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것 또한 그리 녹녹지 않은 편이다.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대장암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필자는 이곳에서 화장실로 어려움을 겪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필자에겐 사실상 최악의, 화장실 인심이 박한 나라 스페인이지 싶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이네들의 문화이니 뭐라 말할 것까진 없어 보인다마는...
아무튼 대장암 수술을 하면 가장 좋지 않은 것이 장이 짧아진 탓에 갑자기 화장실을 가야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된다는 문제이다.
일단 주문이고 뭐고 급히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온 필자는 커피를 한 잔 들고 길 건너 광장으로 눈을 돌린다. 분수가 뿜어 올리는 물줄기들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따듯한 햇살은 카탈루냐 광장 거리를 비추고 노천카페 빠지 앞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는 거리 악사들의 연주를 들으며 뾰족한 에스프레소 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카탈루냐 사람들을 흉내 내 본다. 기타 소리는 지중해의 여유로움을 더해 주고 카페 안에서는 카탈루냐 사람들이 커피를 홀짝거리며 끽연을 즐기고 있다. 담배연기는 햇살을 타고 카탈루냐 광장의 허공으로 흩어진다. 광장 한쪽에 캔버스를 펼쳐 놓은 화가들은 바르셀로나의 거리를 그린다.
스페인 중앙 신용은행이 서있는 도로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로 거리는 더욱 부산하다. 이네들은 살인적인 주차비용 때문에 승용차보단 오토바이를 많이 이용한다. 도로변과 인도, 광장 곳곳에 마련된 오토바이 주차장에 오토바이가 가득하다. 주차비용은 공짜란다. 도심의 주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책이었으리라 여겨진다. 두 개의 차량을 이어 붙여 도심을 운행하는 시내버스와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전차가 사람들을 거리에 토해내고 이내 사람들을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세계 각지에서 지중해의 햇빛이 가장 반짝이는 이곳을 찾아온 여행객들이 물결처럼 넘쳐 난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발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걸어가는 젊은 여인들의 패션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눈이 깊은 이곳 사람들이 그네들만의 대화에 열중하며 활발히 걷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거리다. 비즈니스에 바쁜 세일즈맨의 가방에 그들의 꿈과 희망이 담겨있는 거리다. 작은 상점들도 아직은 골목상권을 유지하며 살아있는 듯하다. 거리 곳곳에서 큰 보자기를 거리 바닥에 깔고 대충 진열한 가죽제품이나 운동화를 파는 흑인 노점상들, 이들이 등에 지고 가는 둥그런 보따리 무게가 그네들의 고된 삶의 무게처럼 느껴진다. 햇살은 여전히 따듯하고 도심의 거리에는 넘쳐나는 사람들만큼 카탈루냐 광장의 비둘기들이 햇살을 즐기며 무리 지어 선회한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사람들의 모습은 활발하고 경쾌하다. 도시는 넘쳐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입체적인 교통수단과 반짝이는 건물들로 충분히 역동적이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중해의 여유를 만끽한다.
람블라 거리에서 일행들이 돌아와 합류한다. 아내의 말론 겨울철이어서 인지 람블라 거리는 한적했다 한다. 거리의 예술가들도 없었고 사람들도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가본 사람이나 안 가본 사람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무튼 람블라 거리는 La Rambla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구시가지 거리이다. 시내 중심에서 해안까지 이어지는 길이 1.2㎞의 가로수길이다. 람블라 거리 반대편, 카탈루냐 광장 위쪽으로는 그라시아 거리가 이어진다. 공항 근처 카탈루냐 광장을 중심으로 두 거리가 이어지고 공항을 이용하는 여행객들의 출발점이자 도착지가 되는 바르셀로나 여행의 관문인 셈인 카탈루냐 광장이다.
가우디의 유산을 찾아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바르셀로나의 거리에서 자연과 곡선을 사랑하고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카탈란어 :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넷 Antoni Placid Gaudí i Cornet, 1852년 6월 25일 - 1926년 6월 10일)는 스페인 카탈루냐의 건축가이다. 그의 작품을 찾아본다. '가우디가 먹여 살리는 도시 바르셀로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르셀로나에는 사람들이 걷는 인도 바닥, 길가의 의자와 가로등부터 시작해서 가우디의 다양한 건축 작품, 가우디의 유산이 남아있다. 가우디의 대표적인 작품은 까사밀라 Casa Mila, 까사바트요 Casa Batlló,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사그라다파밀리아(성가족성당) 등이다.
가우디는 당시 카탈루냐 건축의 주류였던 고전적인 양식을 지양하면서 건조한 기하학만을 강조했던 당시의 건축에서 벗어나 나무, 하늘, 구름, 바람, 식물, 곤충 등 자연의 사물들을 세심히 관찰하면서 영감을 얻으려 했다. 그리고 그런 형태들의 가능성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다. 그 결과 그의 건축물은 기하학적인 형태들 외에도 곡선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으며 오늘날 남아있는 그의 작품들은 당시 치열하게 고민하고 영감을 얻으려 했던 가우디의 성실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까사밀라 Casa Mila, 현지 사람은 까사밀라가 어디냐고 물으면 모른단다. ‘라 페드레라’라고 물어야 안다고 한다. 라 페드레라, 우리말로 옮기면 채석장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가우디의 작품 까사밀라, 우리네 아파트 같은 주거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스페인어 까사 Case는 ‘집’이라는 의미다. 위에서 바로 보면 건물의 중간은 텅 비어 있어 옥상에서 1층이 내려다보이고 그 두 개의 텅 빈 공간을 한 집, 한 집들이 모여 빙 둘러싼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가우디는 천재성과 독특한 개성 탓에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미학이 아닌 '기괴함'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지금에야 가우디의 건축세계가 천재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예술의 범주에 속해있지만, 당시에는 거센 반발과 조롱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우리가 평소에 일상적으로 보는 건물들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기에,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축세계였지 싶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람에게도 호불호가 분명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라 페드레라는 당시 일반 대중들이 까사밀라의 벽면을 보며, "아파트가 아니라 꼭 채석장 같다"라고 조롱하며 붙였던 별칭이다. 또한 밝은 벽면 사이, 창과 발코니를 메우는 철골 구조 등은 ‘감옥 같다’라는 악평을 받기도 했다 한다.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일부 공간만 관광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특히 옥상에 만들어 놓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듯한 각기 다른 모양의 굴뚝이 불쑥 솟아 있는 모습들은 비일상적이라 한다.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기에도 아주 좋은 바르셀로나 중심에 있는 까사밀라를 바라보는 여행자의 눈에도 이들이 붙인 별칭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라 페드레라, 까사밀라다.
우리는 예약시간이 30분이 초과되면 입장이 자동 취소되는 성가족 성당의 입장 예약 때문에 까사밀라를 버스에서 내려 관람하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바르셀로나 도심을 돌며 가우디의 건축물을 주마간산 식으로 보는 것과 현지 가이드의 설명으로 만족하며 사그라다 파밀리아로 향한다.
@thebcstory
#스페인여행 #몬주익 #바르셀로나 #가우디 #까사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