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10
숟가락을 내려놓은 진대리가 말을 이어갔다.
“최근엔 좀 사소하지만 이런 일이 있었어. 우리는 내가 요리를 하고 남편이 설거지를 하거든. 근데 지난주에 시댁 가서 밥을 먹는데, 남편이 자기가 설거지를 하다 보니 주부습진 생겼다고 바를 약 있냐고 시어머니한테 묻더라고? 집에선 나한테 일체 말 안 하다가.
시어머니가 ‘우리 아들 설거지를 얼마나 했으면 주부습진이 생겨? 주부도 아닌데?’ 이러면서 나를 슬쩍 바라보시는 거야. 나는 주부야? 그리고, 내가 놀아? 나도 퇴근하고 와서 피곤하지만 저녁 했으면 본인이 설거지하는 게 당연한데 왜 굳이 시댁 가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집에서 약을 바르던지! 오해의 소지가 굉장히 다분하잖아.”
“헐. 왜 그런 말을 하셨대요?”
“본인은 별 의도 없이 손가락에 습진이 생겼으니 엄마 쓰던 약 있으면 좀 달라는 뜻으로 얘기했다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마치 나는 놀고 남편 설거지시키는 것처럼 보이잖아.”
“진대리, 남편 교육을 좀 시켜야겠다. 일부러 물 먹이려고 한 의도가 아니었다면, 교육시키면 나아질 거야.”
김 과장이 웃음을 참으며 열을 내는 진대리를 위로했다.
“과장님, 가끔 보면 저희 남편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자기는 자기 부모님이니까 편하게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요. 시부모님이 어렵고 불편한 존재라는 걸 전혀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친정엄마가 김장하는 날 수육 할 거니 먹으러 오라고 연락을 주셔서 같이 갔었어요. 간 김에 김장도 도와드리고 김치 좀 얻어오려고 했는데, 어차피 우리 가족들 먹을 만큼만 하시는 거라 많은 양도 아니었거든요.
남편도 제 옆에 앉아서 무를 썰었는데 자기는 김장을 태어나서 처음 해본다면서 '우와~ 이렇게 하는 거구나, 고춧가루가 이렇게 많이 들어가냐~ 배추가 이렇게 많냐, 엄청나다' 하면서 좀 오버하면서 추임새를 넣는 거예요. 대규모 김장이었냐고요? 아뇨! 배추 열 포기쯤 되었나?
저희 엄마는 괜히 사위가 저리 말하니까 눈치 보면서 김서방은 하지 말라고, 그냥 옆에 앉아 쉬라고 하시는데, 와 남편이 왜 그렇게 꼴 보기 싫은지. 몇십 포기, 몇 백 포기 담는 것도 아닌데, 이왕 하기로 한 거 그냥 입 다물고 열심히 할 순 없었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처음부터 오지를 말던지. 나 혼자 와도 되는데.
더 대박은, 그다음 주에 시댁에 가서였어요. 시어머니가 '김치 좀 줄까?' 하셨는데, 남편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지난주에 처가댁 가서 난생처음 김장이란 걸 해봤는데,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장모님한테 김치 받아와서 안 줘도 된다', 그러는 거예요. 아니 뭘 힘들어 죽어? 진짜 너무 오버하는 거예요. 힘들어도 우리 엄마가 힘드셨지, 지가 주도해서 한 것도 아니면서. 겨우 재료 좀 썰고 배추에 양념 묻히는 정도만 했었거든요.
제가 너무 당황해서 ‘우리 많이 하지도 않았잖아’라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우리 아들이 김장을 했어?’라고 되물으시는데 기분이 되게 묘하더라고요.
저희 시댁은 김장 얘기 따로 안 하셨었거든요. 물론, 김장한다고 연락 주셨으면 기꺼이 도와드리러 갈 수 있었어요. 그건 전혀 어렵지 않은데, 굳이 시댁에 가서 저렇게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시댁만 갔다 오면 싸움거리가 생겨요. 이래서 시댁 가기가 싫어지는데 또 제가 가기 싫어하면 서운한 티를 팍팍 내요. 지 때문에 그런 것도 모르고.”
진대리는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열받아서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진대리 남편, 진대리한테 뭐 쌓인 거 있는 거 아니야? 일부러 그러는 거 같은데?”
윤 과장이 킥킥대며 물었다.
“그런 걸까요? 지능적 안티인가?”
“남자들은 좀 둔한 경우가 많아. 여자들처럼 깊이 생각을 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데 여자들 입장은 또 다른 거지. 아마 진대리 남편은 그냥 있었던 사실과 자기가 느낀 그대로 전달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 것 같은데, 와이프 입장을 생각했으면 그렇게 말을 했으면 안 됐지. 부모님한테 나 힘들었으니 우쭈쭈 해달라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나. 근데 이젠 결혼도 했고, 남편이자 가장으로서 생각을 달리 해야지.
나도 신혼 때는 와이프랑 별 거 아닌 걸로 되게 싸웠어. 내가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에서 와이프가 열받아하는 경우가 있더라고. 그런 걸 알려줘야 해. 남자들은 말 안 해주면 모르거든. 콕 집어서 알려주고,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도록 교육을 시켜야 해.”
“내가 무슨 교사도 아니고, 교육을 시켜야 한다니. 너무 피곤해요. 이런 것까지 알려줘야 한다니.”
“어쩔 수 없어.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났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과정이야.”
“이런 과정을 대체 얼마나 거치면 나아질지 모르겠어요.”
김 과장의 따스한 위로에 진대리가 한숨을 쉬며 다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전화 스트레스가 엄청 컸어.”
윤 과장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시어머니가 매주 전화를 하라고 하시더라고. 처음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드렸어. 근데 날이 갈수록 할 말이 없는 거야. 전화기 속에서 흐르는 그 어색함이란... 그리고 나도 녹초가 되어서 퇴근하니 집에 가서 밥 먹고 쉬고 하다 보면 전화하는 걸 잊어버린단 말이지? 그러면 꼭 금요일쯤 전화하셔서 왜 이번 주에는 연락이 없냐, 별일 없냐, 하시는 거야. 당연히 별 일이 없으니 전화를 안 드리지. 별 일이 있었으면 진작에 알려드렸겠지.”
“과장님 남편분은 시부모님이랑 전화 자주 하세요?”
“몰라. 할 말 있으면 하겠지 뭐, 자기 부모님이니까. 그런 것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나도 우리 엄마 아빠랑 할 말 있으면 통화나 카톡 하는데 남편은 전혀 신경 안 쓰거든. 근데 우리 엄마나 아빠는 사위한테 전화하란 얘기를 안 하신단 말이야? 근데 왜 시어머니는 그렇게 전화에 집착을 하시는지 이해가 잘 안 되더라고.”
“그럼 요즘도 계속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드리세요?”
“아니. 당연히 안부가 궁금하고, 통화할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겠지만, 이유 없이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게 마치 업무처럼 느껴져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더라고. 그래서 남편한테도 똑같이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엄마한테 전화하라고 시켰어.”
“그랬더니요?”
“남편도 당연히 불편하고 힘들지. 할 말도 없고. 내가 시어머니한테 전화 한번 드리고, 남편한테 바로 빨리 우리 엄마한테 전화드리라고 얘기하고 옆에서 도끼눈을 뜨고 지켜봤더니, 본인이 힘드니까 어머니랑 이야기를 했는지, 그다음부턴 전화 강요가 사라졌어. 근데 아이가 태어나니까 또 바뀌더라고.”
“어떻게요?”
“아이들 태어나고 나 육아휴직 중에 전화 강요가 아니라 전화를 자주 하시기 시작했는데, 내가 애들 돌보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전화를 몇 번 못 받았어. 그러니까 또 엄청 서운해하시면서 뭐라고 하시더라고. 근데 나는 애들 케어하면서 시부모님 마음까지 케어 해드릴 여유가 전혀 없었어. 나한텐 애들이 1순위니까. 그래서 남편한테 시부모님 전화는 퇴근 후 전담해서 하라고 맡겼지. 낮에는 전화하시지 말고. 남편이 잘 말씀드렸는지 그다음부터는 좀 괜찮아졌어.”
“다행이네요. 말이 안 통하는 분은 아니었나 봐요.”
“나는 장모님이랑 통화 자주 하는데.”
듣고 있던 김 과장이 입을 뗐다.
“오, 김 과장 되게 살가운 사위네. 내 남편은 우리 부모님이랑 일체 연락 안 해.”
“저희는 장모님이 저희 아이를 봐주시는데, 소소하게 용돈 드리긴 해도 얼마나 힘드신지 아니까 감사해서 일이 주에 한 번은 전화드려요. 장모님도 제가 전화드리면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장모님이랑 자주 통화하니까 와이프도 저희 엄마랑 가끔 통화하는 것에 대해 별로 불만 없는 것 같아요.”
“둘이 잘 조율해서 하고 있네. 각자 맞는 방법을 찾아서 하면 되는 것 같아. 누가 그러더라고. 결혼이란 평생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나도 11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싸우는 게 있고 맞춰야 하는 것들이 있어. 쉽지 않지만 좋은 점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미 했으니 좋은 점 위주로 생각하면서 살아야지 뭐.”
점심 교대시간이 끝나간다. 넷은 커피를 한 잔씩 사서 손에 들고 지점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