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트네 시토수도회 수도원(Cistercian Monastery of Fontenay)은 프랑스 브루고뉴 지방, 소도시 몽바르(Montbard)에서도 외떨어진 계곡에 숨어있다. 일반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들과 달리 시토수도회 수도원은 장식을 걷어낸 간결한 구조로 기도, 묵상, 노동의 규칙을 엄격하게 따르는 수도 생활에 알맞게 지어졌다.
수도원 찾아가는 길
계곡마다 봄꽃이 만발한 이른 5 월 아침, 베즐레에서 퐁트네 수도원을 찾아 떠났다. 두 시간가량 걸리는 시골길을 네비 따라갔다. 하이웨이 A6를 지나니 한적한 시골길. 한참 가도 차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지금 베즐레로 가고 있는 걸까? 구릉과 구릉 넘어 지평선까지 도배한 노란 겨자 꽃밭 사이로 난 길이 낯설다. 문득, 사막 가운데 서있는 것 같은 적막감. 차를 세우고 길가에 서서 겨자꽃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낯선 불안감이 주는 뜻밖의 평화. 갑자기 퐁트네, 몽바르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영원한 현재에 서서 시간이 멎은 듯 겨자꽃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야지… 다시 길을 떠났다. 계곡 넘어 빨간 지붕 농가 열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언덕을 너머 다시 마을을 지나 40분 정도 가니 개울 따라 포장도로가 나온다. 아! 퐁트네 계곡 물. 퐁트네 수도원 방향 표시판을 따라 개울가 숲길을 10 분 남짓 들어가니 깊은 계곡 아래 손바닥만 한 주차장이 보였다. 퐁트네 수도원이다.
퐁트네 수도원은 어떻게 지어졌나
퐁트네 수도원을 감상하기 전, 수도원 역사를 가볍게 돌이켜보자. 12 세기 초엽 베네딕트회 클루니 수도원(Cluny Monastery)은 유럽에서 가장 교세가 강한 수도원이었지만 교세가 크게 확장되면서 세속화되기 시작했다. 1098년 베네딕트 수도회 로베르토 신부는 세속화되어가는 클루니 수도원을 떠나 디종 근처 작은 마을 시토에서 성 베네딕트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정화 운동을 주장하며 시토수도회를 창설했다. 수도회는 청빈, 자애 등의 베네딕트 규칙을 철저하게 따랐다. 규칙은 예배, 묵상, 육체노동 등, 일상생활 속에 철저히 적용됐다. 궁핍에 가까운 가난을 너머 영혼의 가난을 구하는 청빈과 형제애를 담은 자애의 정신을 추구했다. 12세기 초엽, 성 베르나르도 신부 (St. Bernard)는 시토수도원을 나와, 크레르보(Clairvaux)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크레르보 수도원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불길처럼 번진 시토수도회 운동을 주도했다. 성 베르나르도는 당시 유럽 기독교 부흥에 크게 기여한 수도자였으며 신학자였다. 또한 그는 시토회 수도원 양식이라는 고딕 양식을 가미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창조한 건축가이기도 했다.
수도원은 드물게 시토수도원의 원형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12세기 초엽 년 성 베르나르도는 12 명의 수도사들과 함께 세상과 동떨어진 깊은 계곡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개울을 배수해 연못을 만들어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면서 수도원을 열었다. 14세기에는 300 명이 넘는 수도사들이 한 가족이 되어 살았을 만큼 큰 수도원이었지만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도원은 프랑스 왕의 영향력에 가면서 교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이후 수도원은 단돈 5 유로에 팔려, 20세기 초반까지도 방직공장으로 사용됐다. 1906년에는 지방 독지가가 수도원을 구입해 휴양지로 사용했으며, 1970년 무렵에서야 프랑스 정부 도움을 받아 퐁트네 수도원이 문화 유산으로 보존하게 되면서 지금은 문화 예술 공간으로 사용된다. 수도원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수도원은 중세 전형적인 클로이스터 (사각형 안뜰과 안뜰을 ㅁ자로 둘러싸고 있는 회랑과 회랑에 붙어있는 건물군, cloister)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수도원 건물들은 ㅁ 자 오른쪽 변에 수도원 성당(Cistercian Abbey of Fontenay)이, 윗변에는 수도원 생활의 중심이 되는 참사회 실과 다용도실이 있다. 참사회 실과 다용도실 위층에는 기숙사가 있고, ㅁ자 오른쪽 변 끝에는 온실과 식당이 있다. 클로이스터 뒤 계곡 쪽에는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고, 정원 오른쪽에는 클로이스터 콤플렉스와 좀 떨어진 곳에 의무실, 대장간, 게스트 하우스 등 부속 건물들이 있다. 부속건물들의 오른쪽 옆으로는 계곡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수도원을 감싸며 흐른다.
시토수도회 영혼이 깃든 성당
수도원 안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면 클로이스터 맨 왼쪽 수도원 성당을 만난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고요하다. 성당 안에 물끄러미 서 있으면 고요함은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이다. 아주 높지 않은 성당은 신랑 양쪽에 작은 회랑이 붙어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신랑은 아주 길어서 아홉 구획, 교차부와 성가대석은 각각 한 구획으로, 팔 부분은 거의 생략되고 긴 라틴십자가의 평면 구조다.
성당에는 장식이 없다. 신랑의 기둥머리에만 작은 꽃잎 부조를 새겼을 뿐, 단순함이 기교라면 기교다. 검박한 분위기다. 교차부에서 나지막한 두 개 계단을 올라가면 제단이 있는 내진이다. 성가대석 바닥에는 윤기 나는 타일을 깔아 성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당 입구에 서면 성당 저 끝에 내진 공간은 두 겹 뾰족아치 기둥으로 감싸여 있고, 큰 창으로는 빛이 들어와 내진이 밝기 때문에 성당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내진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내진이 성당의 중심이다.
수도원 생활의 중심 공간: 클로이스터
성당 오른쪽 익부로 나가면 클로이스터를 만난다. 회랑은 40 미터 정도 되는 정사각형 수도원 안뜰을 ㅁ자로 감싸고 있어 안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클로이스터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ㅁ자 회랑의 오른쪽 (북쪽) 변 참사회실이 붙어있다. 참사회실은 수도원 일상생활의 중심 장소이기에 다른 건물들보다 기둥이나 천장이 조금 다듬어진 모습이다. 여기서 아침마다 수도사들이 모여 성 베네딕트 규칙을 되새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고, 수도원장의 지시가 하달되고, 일상적인 문제도 토론했다. 12 세기 여기서 교황도 맞이했다고 한다.
참사회 실과 맞붙어 다용도실이 있다. 여기서 수도사들이 문헌을 필사하고, 세탁도 하는 등 일상의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참사회실 이층에 긴 기숙사가 있다. 기숙사에 들어서서 눈길을 끄는 건 길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 목재 천장이다. 공룡 고래 늑골을 덮어놓은 것처럼 장대하다. 난방 시설이 없는 수도원이지만 기숙사는 일부러 햇빛이 잘 드는 이층에 지었다. 추운 겨울, 엄격한 정신과 육체 생활에 지친 수도사들이 밤에는 온기가 남아있는 곳에서 잠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수도사들은 옷 입은 채 잠들었고, 이른 새벽 미사를 드리며 하루를 열었다.
클로이스터 ㅁ자의 성당 벽과 마주 보는 남쪽 변에는 온실과 식당이 있다. 추운 겨울에 육체노동을 한 수도사들이 온실 벽난로에서 언 몸을 녹이곤 했다.
성당은 수도원의 영혼이고, 참사회실은 수도원의 마음이다. 온실과 식당은 성당의 몸이 된다. 클로이스터 회랑은 영혼과 마음, 몸을 하나로 묶어 순환하도록 만든다. 클로이스터를 중심으로 수도원의 구조는 밖으로는 닫혀있지만 안으론 열려있어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회랑은 폭이 넓어 책상을 놓고 공부하고, 회랑과 안뜰을 소요하며 묵상하고 토론하는 개방된 도서관이었다. 생각이 깊어지면 소요하게 되고, 소요하면 생각은 더욱 깊어진다.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도원의 클로이스터 회랑을 거닐면서 사유하다가, 사유가 맹렬해지면 뛰었다고 한다.
정원과 부속 건물들
참사회 실과 다용도실 사이에 난 복도로 클로이스터 뒤쪽으로 나오면 계곡 아래 아주 넓은 정원이 있다. 네 개의 큰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정원이다. 중세에는 이 정원에서 약초와 야채를 재배했다. 정원 숲 속 이끼 낀 돌 벤치에 앉아 계곡을 올려다본다. 도시 한가운데에 군림하듯 지은 고딕 성당들과 달리 시토수도원은 계곡에 나지막하게 숨어있다. 겸손하다.
클로이스터와 좀 떨어진 정원 오른쪽의 계곡에서 흘러온 개울을 따라가면 의무실, 대장간, 게스트 하우스 등의 부속건물들을 만난다. 이중, 특히 대장간은 성당과 거의 맞먹는 큰 규모다. 노동을 몸소 실천하는 수도사들은 큰 헛간이 필요했다. 계곡 위에서 철광석을 깨서 물레방아의 수력으로 굉장히 큰 절구 망치를 돌려, 야금 화덕에서 손수 철광석을 녹여 농기구, 말발굽 등 연장을 만들었다. 야금장 안으로 들어서면 장대한 물레방아가 물안개 피우며 물을 쏟아내고 있다. 우람한 물레방아 소리가 천년 동안 켜켜이 쌓인 정적을 일깨운다.
다시, 성당 안에서
수도원에서는 때론 고딕 양식 기술을 사용했지만 고딕 양식의 성당처럼 높고 밝은 공간은 피했다. 나지막한 신랑과 벽에 작은 창으로 성당 내부에 따뜻한 빛 무리가 들어와 긴 그림자를 만들어 내면서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루는 아담한 공간을 지었다. 퐁트네 수도원은 교구 성당이 아니라 세속으로부터 떨어져 용맹전진하는 청정도량이었던 것이다. 고딕 양식이 물성을 걷어낸 밝은 공간의 아름다움이라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시토수도원 성당은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만든 그늘진 공간의 아름다움이다.
저녁 어스름이 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 수도원 정원 모서리에 서면, 먼 분수 물소리에 고요함은 더욱 깊어진다. 다시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본다. 석양을 받으며 연한 어둠이 드리운 성당 안은 비어 있다. 어느 건축가는 시토수도원 건축을 중세의 미니멀리즘이라고 했지만, 그건 단순히 기술적인 관점에서 본 건 아닐까. 20세기 미니멀리즘은 철저하게 표현을 절제해 오히려 표현을 극대화한 것이라면 시토수도원은 마음까지도 비움을 말한다. 퐁트네 성당은 비어 있음으로 충만하다. 신앙의 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