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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훈 Sep 21. 2023

얼간이기관사 그리고 낭만주의자

우리 기관사들과 특별한 유대를 가진 손님들이 있다.

그들과 우리의 유대는 대단히 두텁다고 자신 있게 말하겠다.

거의 모든 승객들이 기관사의 존재는 신경 쓰지 않고 어느 자리에 앉을지를 생각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승강장 제일 앞, 운전실이 멈추는 위치에서 열차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가 들어오면 아주 반갑게 손을 흔든다.

그들을 마주하면 우리 기관사들도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게 된다.

그들은 바로 애기손님들.




다음은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의 일부분이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어떤 놀이를 제일 좋아하니? 그 애는 나비 수집을 좋아하니?”

이렇게 묻는 일은 결코 없다.

“그 애는 몇 살이니? 형제는 몇 명이야? 몸무게는 얼마야? 그 애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벌지?”

질문들이 고작 이런 것들이다. 숫자를 통해서만 그 친구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도 있어요. 분홍빛 벽돌로 지은 아주 예쁜 집이에요.”

만약 어른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도 못한다.

“10만 프랑짜리 집을 봤어요.”

그제야 어른들은 “정말 멋진 집이로구나!”하고 감탄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다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어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항상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 하지만 인생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우리에게 숫자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소설 어린왕자 중.




‘어린왕자’는 어른을 위한 소설이며, 동심에 대해 말한다고 한다.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이었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어린왕자’는 ‘낭만’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건 내가 낭만추구자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하나 분명해 보이는 건 낭만과 동심은 결이 같다는 것이다.


기관사로서 일을 하는 중에 애기손님이 손을 흔들면, 그것은 어떤 초대와 같아서 그 삭막한 지하철 운전실에 낭만적인 것들이 깃들어감을 느낀다.

또한 손 흔드는 애기손님들을 마주하면 거기에는 강력한 마법이 숨어있어서, 그 어떤 무뚝뚝한 기관사들도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댄다.

[편견 덩어리인 나는 어떤 험상궂은 기관사가 해맑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인지부조화에 빠지기도 했다]


어떤 애기손님들은 장난기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기도 하는데,

그러면 갑작스레 ‘먼저 웃지 않기’ 게임이 시작된다.

보통은 내가 지기에, 신사답게 패배를 인정하고 손을 흔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처음 기관사로서 근무할 때 나는 [생텍쥐페리의 말을 빌리자면]숫자밖에 모르는 얼간이기관사였다.

처음으로 손을 흔드는 애기손님을 마주하고 바보처럼 얼어버렸다.

내가 일하는 중이라는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말이다.

사실 그건 내가 일을 똑바로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CCTV의 과실도 크다.

[가만두지 않겠다 CCTV 놈, 내게서 낭만을 앗아가다니]


여튼 나는 손을 흔들지 못했고, 그 이상한 죄책감이 한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죄책감에 휩싸인 나는 그런 기회가 오면 꼭 손을 흔들 것이라 대단한 각오를 다졌고,

그리고 다음에 마주한 애기손님에게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 댔다.

어쩌면 기괴했을지 모를 광경에도 그 애기손님은 관대하게 웃어주었다.

왜냐면 그들은 낭만주의자였으니까.


어른들이 즐비한 ‘비’낭만으로 표상되는 객실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큰 벽이 있어서,

승객들은 그들의 일상 속에 우리[애기손님과 그들의 기관사 친구]들의 시간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들은 숫자에 집중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가 많은 부분을 지배하기는 한다.

생계, 학업, 결혼, 취직 등.

숫자를 빼놓고선 얘기할 수 없는 것들이 즐비해 있다.


그래, 사실 어른으로서 숫자에 대해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낭만에 대해 모른 체 해서도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낭만은 모른 체 하고 숫자만을 위해 살아간다.


생텍쥐페리가 겪었듯이 누구든지 각자의 삶에 어린왕자는 찾아온다.

그때 진부한 숫자 얘기만 하지 말고 당신이 품고 살아온 낭만에 대해 얘기해 보라.

[진부한 얘기만 해대면 어린왕자는 이내 떠나갈 것이다]

혼자 간직해오던 어떤 꿈들에 대해 얘기해도 좋을 것이다.

내 손으로 집을 짓고 싶다거나,

직접 볶은 커피콩으로 커피를 내려먹고 싶다거나,

향기로운 다과와 함께 책을 읽는 일상을 갖고 싶다거나,

마음속으로 간절히 그리는 상대방과의 사랑이 있다거나 같은, 누군가에게 말하긴 부끄럽지만 소중히 간직해오던 낭만스런 꿈들 말이다.

[나는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 어딘가에 낭만이 있다고 생각하는 내 믿음에 대해 얘기해 볼 생각이다]


낭만 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 마무리될 삶에, 뭐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 이제는 낭만에 대한 외면을 끝내야만 한다.

숫자만 추구하다 인생 마지막에 [연말정산이 아닌]생말정산을 하고 갈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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