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사 작업 내규
열차가 종착역[열차가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역]에 닿아간다.
내가 근무하는 부산 2호선의 경우 종착역은 일반적으로 ‘장산역’, ‘양산역’이다.
예외적으로 광안행, 전포행, 호포행 등의 열차들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장산역과 양산역이 종착역이 된다.
종착역에 닿아가면 우리 기관사들은 우선 운전실 의자에서 일어난다.
우린 이걸 기립집무라고 한다.
이 기립집무는 기관사가 근무하는 내부 규정에 명시되어 있다.
‘기관사는 종착역에서 기립집무를 하여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종착역에 닿아갈 때 기립집무를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
애국가를 부르거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일어서는 것과 비슷하다.
기립집무는 대한민국에서 철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쭉 이어져 왔을 것이다.
이걸 수행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생각에 아마 그 이유는 종착역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닐까.
종착역에서 기립집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규정에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종착역이라는 단어가 우리 철도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시성과 공공성을 약속하는 지하철이 착실하고도 끊임없이 달려 최종적으로 닿고자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닿아야만 하는 곳, 그 결과물이자 귀결점, 종착역.
그렇게 도착한 종착역, 길었던 운행의 끝점에 다다라 승객들을 떠나보낸다.
정확한 위치에 열차를 정차시키고 출입문을 열어 승객들이 내릴 수 있도록 한 뒤 승객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양산역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모두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시고, 안 좋은 일 슬픈 일들은 열차에 두고 내리시면 저희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부산 도시철도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승객들이 무사히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출입문을 닫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러고는 이제 회차[종점까지 운행 후 열차의 운행 방향을 바꾸는 일]를 시작한다.
우선 신호를 확인하고 열차를 회차선[열차가 회차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선로]으로 진입시킨다.
정해진 위치에 확실히 열차를 정차시킨 후 반대편 운전실로 이동을 한다.
객실을 통해 이동을 하는데, 미처 내리지 못한 승객이나 유실물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내리지 못한 승객은 잠시 뒤 내릴 수 있음을 안내하고, 유실물은 유실물 센터나 종착역에 인계한다]
반대편 운전실에 도착해 키를 돌려 운행 방향을 바꾼다.
운행을 시작하는데 문제는 없는지 운전실내의 스위치들과 장비들, 제동장치의 정상작동 유무 등을 확인하고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아까 종착역으로써 정차했던 양산역에 다시 정차한다.
그런데 이번엔 시발역[열차 운행의 기점이 되는 역, 처음 출발하는 역]으로써 정차하게 된다.
모든 종착역들은 종착역인 동시에 시발역이 된다.
시작과 끝, 또는 흑과 백, 혹은 빛과 어둠.
빛과 어둠이 결국은 빛의 유무에서 비롯되었듯,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것들이 사실 알고 보면 같은 곳에서 비롯되었을지 몰랐다.
오늘 내가 정차했던 양산역은 종착역인 동시에 시발역이었다.
끝인 동시에 시작이며, 시작인 동시에 끝이었다.
돌이켜보자면 내가 살아왔던 인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마지막이고 끝인 줄로만 알았던 것들이 새로운 시작이 될 때도 있었고, 대단한 시작이라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끝일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시작과 끝 혹은 끝과 시작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사실 놈들은 한통속일지도 몰랐으니까.
다만 나는 오늘 양산역에서 아쉬운 마음에 안내방송을 아주 조금 더 길게 하긴 했었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당신도 안 좋은 일 슬픈 일들은 여기 이 페이지에 끼워두고 책장을 넘기길 바란다. 나는 승객들이 두고 내린 안 좋고 슬픈 일들을 수없이 처리한 전문가니까 말이다. [알림. 이 페이지는 아무리 많은 안 좋은 일 슬픈 일들을 쏟아부어도 터지지 않고 잘 넘겨지도록 특수 제작되었음.]
“넘긴 당신의 다음 페이지가 또 다른 시발역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