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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훈 Sep 26. 2023

늙은 열차의 시간

‘쿵!!!’

그리고 바라본 기관사 모니터에는 ‘XXX에러’, ‘비상제동 체결’

열차가 급격하게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정지한다.


20년도 넘은 노쇠한 열차로 운행하는 우리는 프로페셔널한 기관사이므로 업계의 프로답게 우선 짜증 낼 시간을 부여받는다.

[사실 이 짜증을 내는 거 자체가 기관사들의 짬의 상징이다. 신참 기관사는 짜증이 새어 나올 틈도 없이 똥줄이 타들어가는 긴장감을 선물 받기 때문이다.]

“아 정말… 이거 또 왜 이래 진짜…”

잠시 허락받은 짜증 시간을 아쉽지만 뒤로하고, 이내 세상 친절하고 정중하고 전문적인 기관사의 역할을 시작한다.


해야 할 일을 나열하자면,

1. 안내방송 [어두운 터널에 정지한 지하철에서, 승객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2. 관제 보고 및 협의

3. 고장 조치

4. 정상운행 복귀

+ 수시로 사과방송


우선 사과방송을 한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우리 열차 현재 차량고장으로 인해 잠시 정차 중에 있습니다. 안전한 객실 내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용에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숙달된 기관사인 우리는 이런 방송이 전혀 어렵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상제동이 걸려 급격히 속도를 줄이는 열차가 미처 정지하기도 전에 방송을 완료했을 때, 내 기관사다움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리고 관제에 보고와 협의를 한다.

“관제 관제 여기는 XX역 발차한 XXXX열차 XX편성입니다. XXX에러로 비상정차 했습니다”

“XXXX열차 기관사님 수동운전 가능합니까?”

“안됩니다. 비상운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네 XX역까지 비상운전하시고, XX역에서 바로 복귀조치 하겠습니다.”

XX역 도착 후 빠르게 정해진 조치를 완료하고 시스템이 정상화되길 잠시 기다리는 동안, 불안해할지 모를 승객들에게 다시 안내방송을 한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우리 열차 현재 차량고장으로 인해 잠시 정차 중에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시스템이 정상화되는 걸 확인하고 열차를 출발시킨다.

그리고 승객들에게 다시 사과방송을 한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우리 열차 차량고장으로 인해 잠시 정차했었습니다. 현재는 다 복귀되었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관제에 정상화되었음을 알리고 정상운행을 재개한다.

“관제 관제 XXXX열차 XX편성입니다. XX역 정상발차 했습니다.”

“네 기관사님, 비상운전 승인 XX호입니다. 안전운행 하십시오.”


실제로 아주 복잡한 조치였다.

이걸 가끔 듣는 아내는 세상 힘들었겠다며 걱정하고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우리는 그렇지가 않았다.

20년도 넘은 노후 열차에 고장은 오히려 정상적인 일이었고, 복잡한 조치들은 반복되는 고장 속에서 별거 아닌 일들이 되었다.

우린 그저 사과하기 바빴다.


늙는다는 게 이런 거 아닐까?

미안할 일이 많아지는 거.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잡고 기다려주는 내게 미안하단 말을 셀 수 없이 하시던 이웃 할머니.

마음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서 몸의 시간을 따라갈 수 없었고, 그게 우리를 사과하게 만들었다.

아직 32살에 불과해서 제대로 된 세월을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처럼 주변의 늙어감을 보며 짐작할 뿐이었다.


다만 약간의 노화를 겪으며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노화를 시작한 내 몸과 달리 내 마음은 오히려 크고 있었다는 사실.

마음은 몸과 달리 발육의 한계가 없어서 내가 영양분을 주기만 하면 계속 자라날 수 있었다.


툭하면 멈추고 고장 나는 늙은 열차에게 짜증 내던걸 이제는 이해하며 조심스레 다루어주고,

늙어가는 열차가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가,

은퇴한 열차들이 타국으로 수출되어 어떤 무언가를 이어가는 것을 보며 내 일처럼 기뻐했고,

또 나 자신으로서도,

세상의 초점이 다시 맞춰지는 듯한 깨달음의 순간들을 만나기도 하고,

영원할 것만 같던 내 생각들의 변화를 받아들이기도 했으며,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일 때의 묘한 기분을 알아가기도 했다.


사실 몸의 시간도 마음의 시간도 공평히 흐르고 있었다.

다만 마음의 시간은 몸의 시간과 달리 늙는 것이 아니었다.

깊은 수심과 막대한 수압을 가진 바다가 수많은 생명을 품듯, 마음은 늙고 있던 것이 아니라, 깊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쿵…’

처음 닿아본 심해였다.

깊이에서 오는 묘한 만족감이 있었고,

기분 좋은 수압이 나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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