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거울 앞에 출몰하는 한 기관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존재는 어딘가 이질적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처음에 그를 봤을 때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지만, 그를 알게 될수록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회사에는 헬스장이 있다.
뭐 대단한 헬스장은 아니다.
그저 간소하고 필수적인 기구들 몇 개 있는,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아주 노후되었고 제대로 관리되어지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한계점이 있지만, 민원 넣을 일 없는 우리 지하철 직원들이 쓰는 곳이라 큰 문제 없이 존재한다. [우리 지하철 직원들 대부분은 민원 PTSD를 앓고 있기에]
그 헬스장에 자주 출몰하는 한 선배 기관사가 있었다.
우리 기관사들의 일이 혼자 하는 일이고 불규칙하다 보니, 근무가 맞는 사람이 아니면 잘 만나지 못한다.
선배는 나와 근무가 맞지 않았고, 근무 중에는 거의 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헬스장에서 늘 만났다.
운동에 집착하는 우리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회사 선후배 사이라기보다는 운동 친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얼마 전 운동하다가 또 헬스장에서 만난 날이었다.
운동을 먼저 끝낸 선배가 옷을 갈아입다 말고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말한다.
“터리야, 내가 육십이다.
믿기나? 나는 너무 만족스럽다.
내 나이 육십이라 하면 아무도 안 믿는다.”
그 이후로 또 헬스장에서 만나길 열 번 남짓.
우리는 거의 하루걸러 헬스장에서 만나기 때문에 기간으로는 2,3주 정도 지난 날이었다.
또 운동을 먼저 끝낸 선배가 옷을 갈아입다 말고, 반쯤 헐벗은 상태로 거울 앞에 얼어버린 듯 서있다.
거울 안을, 더 정확히는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말한다.
“터리야, 내가 육십이다.
이게 말이 되나?
얼마 전에는 지리산 천왕봉에 가서 꼭대기에 딱 서서 일출을 보고 있는데 누가 나를 찍어주는 거라?
그러더니 너무 멋있어서 찍었다고 하더라고.”
내 생각에, 그 내막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사진이야 찍어 줬겠지만 그 의도에 대한 부분은 모를 일이었다.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선배 말대로 실제로 멋있어서 찍어 줬을 수도,
아니면 본인도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찍어 줬을 수도 있었다.
[관광지에서 흔한 ‘사진 품앗이’를 위해 선제적으로 찍어줬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튼 뭐 무엇이 답이던 간에 선배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누군가가 찍어준 일출과의 투 샷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내막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선배가 가진 ‘방향성’ 이었다.
기관사로 일하며 남는 시간에 운동을 했던 선배.
기관사로 일한 세월이 운동을 한 세월이 되어버렸다.
내가 알기로 선배는 예전에 당뇨로 인해 몸이 좋지 않았다고 했었다.
선배는 아침을 먹고 여유롭게 집에서 나와 회사까지 걸어서 출근을 했고,
간헐적 단식을 위해 점심은 먹지 않고 점심시간을 한 시간의 운동시간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육십이 다 되어가는 그는, 건강뿐만 아니라 거울 보는 시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정도의 자기애와 그를 뒷받침하는 몸과 동안을 스스로 빚어냈다.
그 좋아하는 지리산에 갔다가 우연히 시간과 세월을 관장하는 신을 만나 뒷돈이라도 찔러준 건지,
응당 60살이라면 감내해야만 하는 세월이라는 것을 혼자만 비껴간 듯 보였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 사십 대 후반쯤으로 생각될 만큼 동안이었고, 또한 실제로 운동 웬만큼 하는 이삼십 대의 몸을 가졌다. 근무복 위로 드러나는 빵빵한 어깨와 가슴. 과하지 않고 적당한 역삼각형의 몸테. 또한 근무복 아래에는 복근이 장착되어 있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60살이다.]
[또 선배는 항상 미소와 여유가 있는데, 그 출처가 아마 운동에서 비롯된 자애심일 것이다.]
다른 선배들은 어떨까?
많은 선배들이 있었다.
열심히 노력해 많은 동료 기관사들의 감사를 받는 선배도 있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평만을 해대고 본인이 일으킨 문제들 속에서 살아가기 바쁜 선배도 있었고,
공짜라면 사족을 쓰지 못해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선배도 있었다.
이외에도 탁구 2부 리그 선수까지 진출해버린 탁구왕 선배,
수십 가지의 자격증을 보유한 자격증 헌터 선배,
남는 시간을 TV 앞에서만 보내다 인간 TV 편성표가 되어버린 선배 등 정말 다양한 선배들이 존재했다.
사람에게 중요한 건 어떤 방향성을 가지는지가 아닐까.
어디를 바라보고 나아갈지,
그래서 어떤 시간들을 보내게 될지,
마침내는 그 시간들이 모여 어떤 세월을 만들어내는 것인가에 대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의는 내가 가진 방향성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선배는 운동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들이 쌓여 그러한 세월이 되었고, 거울 앞에서 멋지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지금의 그가 되었다.
세월이 선배를 비껴간 것이 아니라, 선배가 보낸 세월이 지금의 선배를 정의했을 뿐이었다.
선배는 거울 속에서 멋진 자신과 자애심을 찾았지만,
내가 보았을 때 선배가 거울 속에서 보았던 것은 선배가 가졌던 방향성일 뿐이었다.
거울 앞의 그는 후배라는 사실이 기분 좋게 해주는 선배였다.
[곧 퇴직하시는 선배님의 시간에, 낭만과 여유 그리고 미소가 지금처럼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