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코로나 스토리
2019년 말,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서서히 퍼지고 있었을 때, 나는 가족과 필리핀에서 지내고 있었다. 확진자 관련해서 세상은 시끄러웠지만, 필리핀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하였고, 정부에서도 다음 해인 20년 2월까지도 그다지 큰 대응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안전해서가 아니라, 정보력 부족으로 인해 준비가 늦었던 터였다. 20년 3월, 필리핀 정부는 갑작스럽게 국경의 문을 닫아 버렸고, 그즈음 잠시 미국에 들렀다가 필리핀으로 돌아오려던 와이프는 필리핀 행 비행기 보딩 게이트 앞에서 갑자기 탑승을 거부당했다.(이 락다운은 이후 2년 가까이 지속된다)
갑작스러운 국경 폐쇄로 와이프는 졸지에 영화 '터미널'의 톰 행크스처럼 오갈 곳이 없는 국제 난민이 되었고, 결국 그녀가 갈 곳이라곤 고국인 '한국' 밖에 없었다. 필리핀 역시 열악한 보건 인프라와 정부 관리 때문에 코로나가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나고, 모든 학교도 폐쇄됨에 따라 주재원 가족들 모두 한국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20년 9월이 되어서야 우리 가족은 한국에서 상봉을 하게 된다. 나는 6개월 간 필리핀에 혼자 남아 법인 청산 작업을 하며 영화 '캐스트 어웨이' 같은 야인 생활을 하게 된다.
[필리핀 봉쇄 시절 마트에 한번 가면 계산 대기가 두 시간씩 걸리곤 했다]
결국은 운이 좋은 거였다. 나는 코로나 발발 이후 약 2년 반넘도록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한국 복귀 후에 재택근무도 거의 하지 않았고, 종종 사람들을 만나서 저녁식사도 했다. 자녀도 일반학교가 아니어서 학교를 하루도 쉬지 않았다. 배우자와 아이가 한국에서 막판에 걸리긴 했어도 나는 걸리지 않아서 신기하기도 했다. 흔히들 말하는 슈퍼 항체 보유자인가 싶기도 했다. 기세 등등하던 나도 지난주에 결국 걸리고 말았다. 어디에서 감염되었지는도 알 수도 없다. 갑자기 목이 조금 따끔거렸고, 오후가 되니 어질어질 한 느낌이 들어 열을 재보니 38도였다. 집에 있는 자가 키트를 해보니 그동안 수십 번 해도 빨간 두줄 보기 어려웠는데, 시험액이 다 퍼지기도 전에 양성 판정이 나왔다.
[거짓말처럼 빨간 두줄이 나왔다]
미국에 도착해서 놀라웠던 건, 정말 어디를 가도 마스크를 쓴 사람을 보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물론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공항에 내려서부터는 20년도 이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출국 전부터는 야외 마스크 착용이 없어져서 산책할 때는 편하게 다녔지만(그래도 우리나라는 야외에서도 70% 정도는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이렇게 실내외에서 편하게 다니다니 놀라웠다. 막상 모두가 마스크를 안 쓰고 다니니 나 혼자 쓰기도 참 머쓱했다. 한번 벗기 시작한 마스크는 다시 착용하려니 너무나도 답답하기도 하고, 금세 적응이 되어서 한국에서처럼 병적으로 챙겨 다니지도 않아 어느덧 마스크는 일상의 루틴에서 사라진 존재가 되었다.
[스트로베리 축제가 열렸던 Long Grove마을, 제목과 달리 딸기 축제는 아니었다. 아무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다]
그동안 코로나 걸렸던 사람들의 수많은 후일담을 듣긴 했으나 막상 내가 걸리니 당황스럽기도 했다. 목도 아프고 열이 39.7도까지 올라서 정신을 못 차리기도 했다. 오한이 들어서 으슬으슬 춥고, 몸 여기저기가 쑤시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작은 방에 격리되어 와이프가 문 앞에 갖다 주는 음식과 물, 각종 약품에 의지해서 버티었다. 기나긴 시간은 유튜브와 넷플릭스에 의존했다. 요즘에 사람들이 극찬하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덕분에 정주행 하였다. 역시 넷플릭스 시리즈는 정주행이 국 룰이다. 미국은 확진(이것도 본인 스스로에게 맡긴다)되면 5일 격리가 의무이나, 사실 그냥 밖에 돌아다녀도 아무도 알 길이 없는 게 현실이다. 상태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실내외를 오가니 어찌 보면 그동안 내가 미국에서 한 달 넘게 안 걸린 것도 용하다.
(다음 회에 계속)
*표지 설명: 시카고에서 전통 있는 재즈 클럽으로 유명한 'Green Mill'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들의 재즈가 무척이나 멋스럽다.